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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손 / 반숙자

부흐고비 2021. 4. 14. 13:21

심부름꾼이다. 좋은 일, 궂은일 가리지 않고 충직하게 소임을 다하는 심복이다. 어떤 주인을 만나는가에 따라 그 손의 사명이 달라지듯이 병고를 치유하는 인술(仁術)의 손이 있는가 하면 파괴와 살생을 일삼는 저주받은 손도 있다. 기왕이면 좋은 손을 갖고 싶었다. 아름답고 우아하고 겸손한 그런 손을.

어느 가정이거나, 주부는 그 집의 손이어서 모든 것을 알아서 관리한다. 겨울 채비를 하느라고 이불에서 커튼까지 있는 대로 빨아 널고, 화초 분 갈이 하고, 김장을 담그고 나면 내 손은 엉망이 되고 만다. 조심성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일이 서투른 탓인지 손이 성할 날이 없으니 민망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손등은 생채기투성이고 손가락은 군데군데 칼자국이 스쳐 가관이다. 낮에는 바빠서 별로 모르다가 밤에 잠자리에 들면 그제야 얼얼하고 화끈거린다. 한때는 길쭉하니 메마르고 거기다가 머큐로크롬을 훈장처럼 바르고 지내는 내 손이 남 부끄러웠다. 어쩌다가 동창 모임에 간다든가 외출했을 때 손마디가 굵어져서 반지조차 들어가지 않는 손이 초라해 보여 적잖이 신경이 쓰였다. 그러던 것이 차츰 생각이 달라져 갔다. 아마 가끔씩 받는 누시아의 편지 때문이 아닌가 싶다.

누시아, 그 이름은 빛이라 했는데, 그녀는 그 반대편에서 살고 있다. 중학교 다닐 때 관절염을 앓기 시작하여 사십 고개를 넘어선 여태까지 투병 생활을 하고 있다. 이십 년 넘게 누워만 살고 있어 무릎 아래쪽부터 발가락까지 성장이 멈춘 아이 같고, 양팔은 어깨 밑에서 굽어져 내려 가느랗게 야위어 다섯 손가락이 거의 다 오므러 붙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파리가 얼굴에 새까맣게 앉아도 그것들을 쫓아버릴 아무 방도가 없다. 얼굴과 머리에 비듬이 덕지덕지 앉은 그녀를 씻기고 오는 날에는 목숨이 꼭 축제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일은, 열일곱 소녀의 얼굴로 살고있는 그녀는 오히려 평화롭다. 배설물이 두려워 몇 수저의 곡기로 연명만 하고 사는 터에 천진무구한 동안의 평화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모로 누워서 막대기 같은 손가락 사이에 수저를 꼽고 엎지르며 한 두술 밥을 넣던 손에 어느 날 볼펜을 쥐어주었다. 무엇이라도 써보면 큰 위안이 될거라고.

그녀는 천신만고 끝에 겨우 글씨를 쓰게 되었다. 글 몇 자 쓰는 데 몇 시간이 걸리는 고행을 거쳐서다. 그리고는 자신과 같은 이웃을 위하여 그 손으로 사랑의 체온을 나누고 있다. 교도소에 수감 되어 있는 수인에게, 마음을 앓고 사는 어느 주부에게, 양로원에 있는 불구노인에게 오그라든 손의 봉헌은 끝없이 펼쳐지고 있다.

나는 누시아의 편지를 받을 때마다 나의 고통은 하찮은 것이라는 내송(內訟)의 아픔을 겪는다. 그러던 어느 날, 부자유한 육신으로부터 자유로와 질 귀한 선물을 받았다. 가나 화랑으로부터 발송된 화집이 그것이다. 조심스레 봉함을 열어보니, 거기 낯익은 조각가 C교수님의 친필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C교수님의 작품을 좋아한다. 까막눈인 내 눈에 무슨 안목이 있을까마는, 반듯하게 참으로 인간답게 살아온 그분 삶의 열정을 익히 알고 존경한 까닭에 그분의 작품에 더 크게 공감하는 모양이다. 어느 분야의 예술이건 작가와 작품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를 많이 보아왔기에, 나는 예술가라면 우선 그 사람됨을 꼽고 작품을 뒤에 두는 편견이 있다. 가장 불완전한 것이 인간이므로 완성을 향한 이상의 작품으로 형상화되어 작품과 작가 사이에 괴리가 생길 수도 있지만.

그런데 삶과 예술이 일치하는 예술가가 그리 흔치는 않은 모양이다. 유독 C교수님의 작품이 그렇게 형형한 빛으로 영혼의 문맹을 비추는 것은 삶 자체가 작품이라는 그분만의 진실한 철학이 있어서다.

화집을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무표정한 소녀상의 눈길에서 안개 같은 슬픔이 배어 나오고 도끼 같은 얼굴에서 범종 소리가 울릴 것 같다. 서 있는 사람, 소녀상, 어디서나 불쑥불쑥 살아 있는 손의 질감을 느낀다. 결코 크달 수 없는 두 손안에 광대무변한 우주가 담겨 있고 끝이 없다는 영원까지 수용돼 있다.

참 이상한 일이다. 다소곳이 모아 쥔 자그마한 손인데 시공을 뛰어넘어 생동하고 있다. 그 손은 어느 사이 현대의 성녀 테레사 수녀의 깡마르고 큰 손이 되어 썩어가는 나병 환자의 환부를 어루만지고 고통 속에서도 아픔을 나누는 누시아의 목각 같은 손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세계적인 작가가 된 C교수님은 육체를 넘어서는 그곳에 비로소 열리는 창조의 영안을 얻음일까.

이제야 조금씩 누시아의 평화를 알 것 같다. 두 손을 가지런히 책상 위에 얹어본다. 이제야말로 좋은 손을 가져야 한다는 다짐을 하며, 사랑과 정성으로 저녁 식탁 차려놓고 거기 둘러앉아 즐겁게 식사하는 식구들 틈에서 행복을 느끼는 어머니의 따뜻한 손이다.

정말로 아름다운 손은 누군가를 위하여 끝없이 봉사하는 그런 손이다. 비밀한 기쁨을 간직하고 고뇌의 정으로 창조의 촛불을 켜는 그런 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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