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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비 오는 연지 / 박양근

부흐고비 2021. 4. 15. 16:07

비가 그치지 않던 날이면 경주 불국사 못미쳐 자리한 연못으로 간다. 언젠가 찾아갔던 푸른 호수 물빛을 닮아 한결 아늑한 곳이다. 사방이 둑으로 싸여 빗기가 가득 차면 물안개가 피어오른다. 늦은 오후 시간이면 더욱 적막해진다. 그 호수도 그랬다.

자네.

들리는가. 이곳에는 가을비가 사흘째 내리고 있네. 대지는 아직 뜨거우나 빗물엔 가을 기운이 서늘하네. 비가 아닌 가을비이지 않은가. 비록 차가울지라도 물기가 흥건히 밴 땅바닥을 맨발로 딛고 싶을 걸세. 비파 현을 지그시 누른 손마디가 떨리는 느낌이지. 일찍 떨어지다가 가지에 걸린 잎이 사립문 댓살에 걸린 종달새 깃털처럼 흔들거리네. 어떤가. 내 가슴은 이미 안개에 도적맞아 버렸는데.

자네의 도시에도 비는 내리겠지. 모두 우산을 펼쳐 자연의 강림을 가로막고 있을 것이지만 자넨 그냥 빗속으로 나서게. 비가 오면 더욱 목마르고 비를 맞으면 더욱 뜨거워진다는 자네 아닌가. 나뭇잎들이 몸을 떠는 건 외롭다는 몸짓, 이번 여름은 그냥 숨쉬기도 버거운 광증의 계절이었으니까 말일세.

가려네.

나도 입던 옷 그대로, 머리카락 휘휘 날리며 그곳으로 가려네. 동구 밖 미루나무가 후줄그레 사위바람을 안고 있고 산길 물도랑 넘치며 소리쳐 주는 곳. 산골마다 은근히 단풍 물드는 낌새는 높아가고 반기는 그대 발자국 소리 다가오니. 빗물 주르륵 흘리는 나무가 되고 싶다고 하던 지난해 추억도 따라오네. 인간은 누구나 쓸쓸한 나무이고 나무는 우리의 벌거벗은 육신이 아닌가. 호수 둑 곁에 서 있는 나무들은 그대로인데 우리는 지금 그곳에 없어.

지금도 기억하는가.

수면에 번지는 파문이 두려워 하늘만 쳐다보던 날. 그날의 오후는 참을 수 없을 만큼 가벼웠지. 무엇으로든 우리를 묶으려 했었네. 빗줄기가 머물게 하고 바람이 떠나게 한다면 어떡할까 라는 물음에 자네는 말이 두렵고 두려움을 그리워한다고 하였던가. 서로가 곁에 있어 말이 필요 없다. 보이지 않도록 떨어져 있어도 언제든 유령처럼 다가설 수 있다. 그 두 마디 진담을 농담처럼 했다네. 그러면서 나누었던 웃음을 잊지 않겠지. 그때의 반짝이던 조그만 갈색 호수에 비치던 햇살.

빨리 나서게.

아직도 바람이 부느냐고. 비안개가 출렁인다면 어찌 바람이 없다할까. 배꽃 과수원을 거쳐 온 들녘바람은 아니야. 광녀의 머리칼 사이로 밀려오는 바람일세. 산으로 줄행랑을 치고 싶은 바다바람도 아니지만 달려도 달려가고픈 바람이지. 그런 바람이 실은 마음을 떨게 하지. 가슴에서 가슴으로 넘실대는 바람이므로, 곧 있을 작별을 예감하듯 오직 나무 그늘만이 만남조차 숨겨줄 것이니 말일세.

비 내리는 날이면 마냥 까닭도 없이 한숨 쉬며 가슴을 두드렸지 않았던가. 푸른 맥박이 아쉬웠던 자네였으니 오늘만큼은 황토 흙이 부드러운 호수 둔덕으로 올라가세. 야생초가 쭉쭉 뻗은 들판을 내려다보며 저 밑 마을 고샅길을 내려다보세.

무엇을 생각하는가.

물의 나라 호수는 모든 산기운이 흘러 들어오는 곳. 풀리지도 헤아리지도 못할 언어가 고여 드는 미궁. 마를 수도 흘러내릴 수도 없는 한이 넘실대는 가슴. 아니면, 깊이도 넓이도 알 수 없는 마성. 그러니 호수 둔덕을 천천히 걸어보세. 콜로세움의 돌담벽 위를 걸어가는 유령인 듯.

이제, 자네를 위해 마련한 수십 폭 휘장을 치려네. 휘장마다 자네가 외우던 시구를 적어두겠네. 멱 감던 어린 시절부터 지쳐가는 지금의 삶까지 그려진 병풍도 세우겠네. 한 길 휘장을 펼칠 때마다 한 잔 술을 따르겠네. 한 폭 병풍을 세울 때마다 한 가락의 노래도 불러줌세. 호수 네 모퉁이를 한 번씩 돌 때마다 나비처럼 춤도 주리니.

비가 내리는 수면을 보게나.

빗방울이 금속 파편처럼 흩뿌려지고 있네. 온몸에 쇳조각이 박히는 아픔은 여전하네. 벗어 버린 몸에서는 푸른 김이 무럭무럭 돋아나는 걸. 낙숫물이 떨어지는 소리만 들려도 들판으로 달려가던 옛 시절이 있었으니. 지금도 그렇게 한다면 어찌 불면의 멍울로 돋아날 터인가.

둑을 내려가 해거름 깔린 물속에 손을 담그세. 온몸이 푸르도록 엉킨 두 손을 담가 보세. 오래, 깊게. 손바닥 가득히 시퍼런 물을 뜨면 손금 따라 촘촘히 박힌 이야기가 건져 올려질 테지. 자네가 내게 할 이야기가 말일세.

눈을 뜬다.

가느다란 빗방울이 아직 연지에 떨어진다. 푸르게 고인 연지에 머물려는 미련과 떠나보내려는 아쉬움이 흐른다. 호수물이 연지물로 흐른다. 그래, 모두가 하나이다. 안기려는 마음도 버리려는 마음도 안팎, 정적과 음향도 하나, 언젠가는 바다, 호수, 강이 있어 만난다. 지금까지 그랬듯이.

고적한 오후, 봄비가 안개초로 피어나는 날, 호젓한 못 하나를 가슴 속에 판다. 안개비에도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을 닮은 사람을 찾아 나선다. 이유가 있다면, 서로의 분신인 탓이다. 반쪽의 삶인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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