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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연의 호환(虎患) / 김창흡

부흐고비 2021. 5. 12. 08:55
번역 및 원본


마구간이 불타 죽는 것보다 더 심한 화이니
제 명을 다 산 것이라면 죽은들 누가 슬퍼하랴
그저 첩첩산중 향한 원망 깊고
아직도 성근 울타리엔 핏자국 남아있네
늙은 암말은 그리움 속에 홀로 남았고
바깥의 거위는 밤에 울어 경보함이 더뎠어라
어이하면 사나운 범을 베어다
가죽 깔고 누워 이 마음 통쾌히 할까

禍甚於焚廐 화심어분구
天年死孰悲 천년사숙비
寃深只疊嶂 원심지첩장
血在尙疎籬 혈재상소리
老㹀依風獨 로자의풍독
寒鵝警夜遲 한아경야지
何由斬白額 하유참백액
快意寢其皮 쾌의침기피

- 김창흡(金昌翕, 1653~1722), 『삼연집(三淵集)』 권5 「말이 범에게 물려간 것을 슬퍼하며[哀馬爲虎所噬]」 제1수

삼연집(三淵集)은 조선후기 학자 김창흡의 시·서(書)·제문·일록 등을 수록한 시문집이다. 36권 18책. 목판본으로 1753년 문인 유척기(兪拓基)가 간행하였다.

 

 

해 설


전통 시대에 호환마마(虎患媽媽)는 극악한 재앙이었다. 죽음이야 사람이 피할 수 없는 것이거니와 범에게 물려가 육신이 찢어발겨져 참혹하게 잡아 먹혀 시신도 찾지 못하고, 역병으로 어찌 손쓸 도리도 없이 시름시름 앓다가 순식간에 황망히 죽는 것은 참으로 제 명에 죽지 못하는 참화(慘禍)였다. 우리는 항용 호환마마라는 말을 쓰지만 조선 시대 명망 있는 사대부들은 대개 인가가 밀집한 지역에 거주하거나 혹 은거한다 할지라도 완전히 깊은 산중에 따로 혼자 거처하는 경우는 드물었으므로 호환의 참상을 글로 남긴 경우는 드물다. 그런데 삼연 김창흡만은 특이하게 일생동안 무려 세 번이나 호환을 당했다. 『삼연집』의 어록(語錄)에는 다음과 같은 사건을 기술하고 있다.

선생이 설악산 영시암(永矢菴)에 계실 때 거사(居士) 최춘금(崔春金)이 판자방에서 염불을 하고 있었다. 야밤에 홀연 산이 무너질 듯 범이 우는 소리가 나더니 선생을 모시던 노비가 놀라 소리치기를 “거사가 없어졌습니다.”라고 하였다. 모두 황망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 노비 두 사람이 판자방에서부터 밖으로 나가면서 횃불을 들어 살펴보니 옅게 깔린 눈 위에 혈흔이 남아 있었다. 선생이 멍하게 한참을 있다가 말하기를 “내 일찍이 이 범놈에게 말을 잃고 또 노복을 잃었는데 지금 다시 이런 변고를 당하는구나.”라고 하였다. ······ 이튿날 아침 승려들을 불러 모아 산에 올라 찾게 하였는데 승려들이 돌아와 단지 머리와 발만 남았다고 알리므로 다비하도록 하였다. 선생이 비로소 대성통곡하고 마침내 산을 나가기로 하였다. ······

머리와 발만 수습했다는 위의 기록에서 당시의 참상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삼연은 무슨 연고로 이렇듯 세 차례나 호환을 만났을까. 이는 삼연이 부유한 명문가의 자제이고 명망 있는 선비였음에도 일생의 많은 시간을 깊은 산중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마치 산승(山僧)처럼 판잣집을 짓고 살았던 독특한 이력에 기인한 것이다. 아무래도 호환을 당할 여건이 충분했던 셈이다. 그렇다면 삼연은 이런 위험을 감내해 가면서 어찌하여 심심산중에 살았던가.

부친을 여읜 이후로 한 조각 마음속이 전부 다 원통과 울분으로 잠식당해서 놀라고 요동치고 감정이 치밀어 오르고 벌벌 떨려 잠시도 평온할 때가 없었네. 이미 광질(狂疾)이 생긴 것이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 나는 이미 도리를 어그러뜨린 몸이 된지라 정말이지 다른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네. 손님을 응대하고 서로 대화를 나눌 때 한 마디라도 나의 이러한 마음을 격발시키면 오장육부가 칼로 찌르는 것 같아서 비록 집사람이나 아이들이 하는 말일지라도 이 마음의 고통과 번민을 감내하지 못한다네. ······ 집에서 처자식을 거느리고 살면서 시속(時俗)에 응하여 남을 조문하고 문병하는 등의 일은 지극히 중한 인사(人事)로 사람이 살면서 폐할 수 없는 일이네. 유도(儒道)의 큰 요체가 대체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지. ······ 이것을 억지로라도 행할라치면 반드시 광질이 발작한다네. ······ 이제 만사가 다 끝나버렸으니 온갖 상념도 식은 재처럼 사그라지고 갖가지 쓸데없는 습관들도 내다버린 채 그저 참선하면서 선열(禪悅)만을 탐미하고 있을 뿐일세. ······ 슬프다! 어이하랴. 일찍이 한밤중에 잠들지 못한 채 벽에 기대 가슴을 치면서 속이 다 찢어발겨지는 듯할 때면 모친상을 당한 율곡(栗谷)이 “망령된 불교로 슬픔을 막아본다.”는 말을 재삼 외면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네. ······ 그러나 율곡은 나이도 지금의 나보다 젊었고 맞닥뜨린 사정도 나만큼 혹독하지 않았으니 괜찮았지. 그래서 오히려 불교에서 유교로 다시 돌아갈 길이 넓었던 것일세. 그러나 지금의 나는 이미 다 끝났네. 이 궁박한 운명이라니. 장차 요순과 주공(周公)과 공자의 도와 서글피 작별을 고할테지.

위의 글은 삼연에게 불경(佛經)을 그만 읽고 유가로 돌아오라고 충고하는 아우에게 삼연이 답한 말이다. 삼연은 숙종조(肅宗朝)의 거듭되는 환국정치 속에서 부친 김수항(金壽恒)을 비롯한 여러 지인들을 비명에 떠나보내고 그 끓어오르는 울분을 삭이면서 일생을 보냈다. 위의 편지는 그러한 삼연의 심정을 그야말로 여실히 보여준다. 위에 서술된 삼연의 심정은 단순히 슬픈 감정을 토로한 것이 아니라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고 진단해도 될 만큼 극심한 심적 장애라 할 수 있다.

오늘 한시감상에서 갑자기 호환을 거론한 것은 단순히 호환의 참상을 말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바로 조선 후기의 대문호인 삼연의 외롭고 처절한 심정을 엿보기 위한 단초로 거론한 것이다. 삼연의 시는 정조(正祖)가 이미 동국(東國)의 시를 완전히 일변시켰다고 평한 바 있다. 실제로 그의 시는 이전 시기의 시와 비교할 때 파격이다. 근체시의 형식미를 전혀 답습하지 않고 초사(楚辭)와 악부(樂府)와 장자(莊子)와 불전(佛典) 등을 섭렵한 바탕 위에 자신의 감정을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토로하는 그의 시세계는 당대 문단에 새로운 길을 열고 많은 문인들에게 영향을 끼쳐 조선 문단을 일신하였다. 추상적인 감정을 자기만의 상징어로 표현하는 그의 방식은 어떤 면에서 현대시의 추상성과도 닮아 있다. 이러한 획기적인 시는 바로 그가 처한 가혹한 내면 상황에서 배태된 것이다.

이런 그의 시이지만 그동안 삼연의 시는 그 난해함으로 인해 전면적인 번역이나 연구에 한계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조선 문단의 다른 어떤 이와도 비교하기 어려운 그의 독특하고 독보적인 시세계, 초사와 악부 등의 처창(悽愴)한 정서 위에 추상적 시어와 감정적 표현으로 자기만의 일가를 이룬 면모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서 조선 문단의 한 축이 제대로 메꾸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오늘 삼연의 호환을 살펴보았다. 그의 시세계와 면모가 다 드러나면 오늘날 또한 그의 시에 마음을 기댈 이가 있으리라.

글쓴이 : 이승현(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권역별거점번역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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