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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토렴 / 문경희

부흐고비 2021. 5. 13. 17:24

제4회 경북일보문학대전 금상

한때 오지 중의 오지였다는 함양땅 상림이다. 아직도 이곳은 사람보다 꽃과 나무와 새들로 북적거린다. 그들이 미처 채우지 못한 자리는 이름 모를 풀들이 가녀린 목숨을 빼곡하게 꽂고 있다. 이따금 손 없는 바람에 멱살을 잡히기도 하지만 그들은 의연하게 앉은자리를 지켜낸다. 개개의 그들이 만들어내는 거대한 하나를 우리는 숲이라 부른다.

숲의 구성원들은 경쾌한 팔분음표가 되는가 하면 묵직한 쉼표가 되기도 하며 웅장한 숲의 악장을 이끌고 나간다. 나서면 물러설 줄 알고, 취하면 버릴 줄도 아는 오래된 약속이 살아 있는 곳. 간만에 그들만의 세상에서 청정한 하루를 탁발해 볼 욕심으로 우중불사 달려왔다.

나무는 숲을 이루지만 인간은 결코 숲을 이루지 못하는 족속이라고, 어느 칼럼니스트가 꼬집어 놓은 글을 본 적이 있다. 서로를 물고 뜯는 추악함으로 난삽해진 세상을 들먹이며, 이기로 가득 찬 인간은 태생적으로 ‘함께’를 위해 ‘나’를 희생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이 순간만은 나도 숲의 일원이 될 수 있을 것만 같다. 아니, 숲은 목전의 이익에 눈과 귀가 먼 내게도 차별 없는 호의를 베풀어 줄 거라는 막연한 확신이라고 할까. 숲에 들어 숲이 되기 위해 깊숙한 들숨날숨으로 호흡을 고른다.

숲의 위력인지, 사람들의 표정이 한껏 여유롭다. 그들도 시나브로 푸릇한 숲 한 채를 온몸으로 들앉히고 있는 중인가 보다. 세상이라는 악다구니를 벗어 낸 그들의 머리 위로 오랜 가뭄을 해갈하는 단비, 꿀비가 내린다. 추적추적, 한없이 서글프던 뉘앙스의 부사가 이리 포근한 단어였던가 싶어진다.

축축이 젖었어도, 숲은 제 보따리를 아낌없이 풀어놓는다. 기꺼이 객으로 물러앉은 나는, 오감으로 들이치는 숲의 부산물들을 챙기기에 급급하다. 화한 박하사탕 한 알을 머금은 듯 청량한 기운이 내 안으로 일어선다. 자칭 만물의 영장이라 거들먹거리는 인간도 이곳에서만은 목청을 높일 수 없겠다. 조각보처럼 살뜰하게 터를 나눠 잡은 목숨들이 저렇듯 선수를 치고 나서니 누군들 그들의 주인됨에 토를 달 수 있을 것인가.

빗줄기는 거세지만 마음은 점점 느긋해진다. 태엽을 잔뜩 감아놓은 장난감 기차처럼 허겁지겁 달려온 일상이 아닌가. 내가 주인이 되어 소매를 걷어붙이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이 걸음걸음 나를 가볍게 만든다.

다음 장면을 위해 잠시 무대를 내려온 배우랄까. 숲에서는 세상 속의 배역으로 동분서주 하지 않아도 좋다. 오래전 내가 한 점의 생명체로 자리를 잡던 순간처럼, 지금 나는 세상의 일원도, 숲의 일원도 아니다. 마치 리셋reset 버튼을 누른 듯, 온몸의 촉수들이 다시 처음이라는 출발선상에 서게 될 것만 같다. 이렇듯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의 회귀를 두고 힐링이라 하는 게 아닐는지.

천년의 역사를 가진 상림의 초입에서 거대 연리목 한 그루를 만났다. 느티나무와 서어나무가 몸을 섞은 나무다. 둘이 하나 된 사연은 차치하고라도, 수종이 다른 나무가 연리목이 되어 살아남는 경우는 극히 드물단다.

하나가 낯선 하나를 만나 익숙한 하나로 안착을 하기까지 장장 백 년. 바늘 끝조차 파고들 틈을 허락지 않는, 저 끈끈한 합일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사람들은 하나같이 나무의 오늘에 ‘사랑’이라는 핑크빛 꼬리표를 매달지만, 사랑이야말로 오만 감정으로 몸살을 앓아야 하는 혼돈의 블랙홀이 아니던가. 나무라고 어찌 순탄키만 했을까.

첫눈에 운명을 예감했든, 그렇고 그런 만남의 끝에 의기투합을 했든, 하나가 되는 수순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상대를 위해 순정한 이타를 꿈꾸지만, 꿈은 현실 앞에서 무참히 깨어지는 때가 더 많은 까닭이다. 수없이 부딪혀 상처 입으며, 서로를 향해 가시 돋친 언사를 남발했을지도 모른다. 감정의 날을 벼린 채 죽자사자 끄덩이를 잡은 날도 없지 않았을 게다.

나는 늘 내 눈 밖에 있다는 것이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한계가 아닐까. 나는 여전히 나 대로를 고수하면서, 상대의 굳건한 아성만 내내 눈에 거슬린다. 사랑이라는 지고지순으로도 극복하지 못하는 평행선을 바라보며 좌절의 늪에 발목 잡힌 것도 부지수였을 터. 결국 내가 네가 될 수 없는 것처럼, 너 또한 온전히 내가 될 수 없다는 냉정한 논리로 마음에 굳은살을 앉히고서야 피차 조금은 무덤덤해졌을 법하다.

아이 셋을 낳은 나무꾼의 선녀처럼, 희망과 절망으로 자신을 무두질하는 동안 나이테도 버겁도록 불어났을 게다. 그러구러, 뜨거운 연모보다는 따스한 연민이라는 이름으로 작은 평화가 찾아왔지 싶다. 수없이 다가서고 멀어지기를 반복했지만 그것은 결국 다시 뜨겁게 만나기 위한 통과의례였다고 나무는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삶으로 얽히고설키는 모든 관계의 해답이 저 거룩한, 한 몸, 두 그루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모 프로그램에서 토렴을 보았다. 돼지국밥을 소개하면서 노하우가 토렴이라고 했다. 뜨거운 국물을 부었다 따라내기를 거듭하며 밥이나 국수를 데우는 오래된 방식이란다.

주인장의 말에 의하면, 한 그릇의 국밥을 상에 올리기 위해 토렴을 열다섯 번이나 거친다. 국물이 밥알에 속속들이 배어들고, 끝까지 뜨끈함을 유지하게 만드는 그들만의 비결이란다. 밥과 국이 국밥으로 재탄생되는 비화랄까.

토렴은 퇴염退染이라는 염색의 용어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염색을 하기 위해 천이 가진 원래의 색깔을 빼내는 작업이 퇴염이다. 상대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나를 지우는 일이 먼저여야 한다는 뜻일 게다. 그러고 보면 둘이 하나가 되는 방법으로 토렴만한 것이 없겠다. 연리목 또한 토렴을 건너뛰지는 못했을 성 싶다.

사람으로 아프고, 사람으로 뒤척이던 시간들을 하나둘 끄집어내어 본다. 도망치듯 감행한 숲으로의 일탈이 더 깊은 현실 속으로 나를 끌고 들어간다 할까. 나와 타의 경계를 허물고 맵짠 시간을 요리하는 중이라고, 숲은 내 안의 아릿한 통증까지 조근 조근 다독여준다. 내가 숲이 되는 일은 요원하기만한데, 숲은 그새 나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들고 있었던가 보다.

숲이 차려낸 가을의 성찬 위로 관계의 한 수가 고명처럼 얹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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