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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허물어진 꽃 담장 / 심정임

부흐고비 2021. 5. 15. 10:23

동네 들어오는 골목어귀에 정원이 넓은 큰집이 있다. 이웃과 별로 친교도 없고 육중한 철대문은 언제나 굳게 닫혀 있어 성체처럼 보였다.

그 집 담장에는 이른 봄 개나리꽃부터 시작해서 갖가지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아름다운 꽃집을 만들었다. 라일락이 풍성하게 피어 있을 때는 골목 안이 향기로 가득하다.

그 중에 넝쿨장미가 온 담을 덮고 있을 때가 가장 아름다웠다. 5월의 햇살이 무르익기 시작하면 꽃이 하나 둘씩 피기 시작한다.

후두둑 단비라도 지나가면 꽃망울이 일제히 잠에서 깨어나 담장을 온통 빨갛게 물들이며 꽃의 향연이 절정을 이룬다.

새빨갛게 갓 피어난 싱그런 꽃에 지나가는 사람들은 저절로 눈길이 모아지고 아무리 바쁜 사람이라도 그 곳에서는 한 번쯤 발길이 머루르곤 한다.

나도 우울하거나 짜증이 나는 일이 있을 때에 그 담장 밑을 거닐면 마음은 어느새 꽃을 닮아 가곤 했다. 굳게 닫혀 진 대문과는 대조적으로 활짝 핀 장미는 마음껏 개방되어 온 동네 누구에게나 아름다움과 향기를 나누어주었다.

어느 날 앞서가는 두 젊은 남녀가 무엇에 토라졌는지 여자는 쌔쿵둥 화낸 모습이고 남자는 열심히 달래고 있다. 한참을 무어라고 해도 여자는 고개만 살래살래 흔들 뿐 마음이 풀어지지 않는 모양이다. 장미 담장쯤 갔을 때 남자는 주저거리더니 그 중 예쁘게 핀 꽃 한 송이를 살그머니 꺾어 여자에게 준다. 샐쭉거리던 여자는 망설이더니 빙긋이 웃으며 꽃을 받아 향내를 맡는다. 언제 다퉜냐는 듯, 환하게 웃는다.

꽃이 어떤 힘이 있기에 미움도 사랑으로 바꿔 놓을까?

뒤따라가며 관망하던 나도 맥없이 웃음이 나왔다.

가을 어느 날부터인가 그 집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가끔 짐차가 와서 세간을 실어가고 하더니 오늘은 자질구레한 살림살이가 나와 있다.

새 집주인이 수리를 하려는 걸까. 예쁘게 고쳤으면 좋겠다고 혼자 즐거운 상상을 하며 이른 외출을 했다.

시숙님의 병문안으로 귀가가 늦었던 나는 골목에서 발길이 뚝 멈춰졌다. 커다란 포크레인이 그 집을 헐어내어 트럭에 싣고 있는 중이다.

집은 이미 형체는 없어지고 부서진 벽돌과 시멘트 조각만이 떠나간 주인을 원망이라도 하는 듯 나뒹굴고 있다. 뽑혀져 나간 꽃나무들이 뿌연 분진을 뒤집어 쓴 채 구석에 처박혀 있다.

"쿵" 포크레인이 내 가슴을 치고 간다. 상실감과 허탈감이 급류를 타고 전신에 퍼졌다.

"와르르" 꽃담이 무너지는 소리.

그 집터엔 지하 1층 지상 3층의 콘크리트 빌라가 지어졌다. 집 주위는 모두 시멘트로 포장하고 나무 한 그루 한 뼘의 흙 마당이 없다.

한 가구가 살던 곳에 열 한 가구가 들어앉았으니 어디에 마당이 있겠는가. 저녁이면 이 골목은 복잡한 주차장이 돼 버린다.

회색의 도심 속 골목을 작게나마 나의 위안이 되어 주었던 그 꽃 담장은 이제 볼 수가 없다.

사랑 다툼하던 젊은이는 어디에서 화해를 할까?

가슴 안에 마른 바람소리가 인다.

요즈음은 아직도 멀쩡한 아파트를 헐어 높은 바벨탑을 쌓아놓고 안락의 휴식처라고 손짓하며 콘크리트 속으로 우리를 끌고 산다.

꽃밭에 물을 주고 새싹이 움트기를 기다렸던 꼬마들은 이제는 동화 속의 소녀가 되고 아이들이 화단에 피는 꽃 이름을 모른다는 것이 당연한 이야기가 돼 버렸다.

정원의 꽃나무가 절묘하게 축소된 자태로 거실을 장식하고 섬돌로 밟고 다니던 돌들이 잘 닦여진 좌대 위에서 고고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세련되고 우아한 인공미가 자연의 감성을 포장하고 있다.

물질의 풍요가 가슴의 빈자리를 얼마만큼은 채워 주겠지만 그것이 결코 삶의 질을 높이진 않을 것이다.

아침부터 봄을 재촉하는 비가 종일 내리고 있다. 봄기운은 골목을 맴돌고 있지만 담뿍 담아줄 대지는 어디에 있을까?

이제 골목 안의 꽃향기는 다시는 맡을 수 없지만 한 가정의 몫이었던 곳이 여러 가정의 보금자리가 되었다면 그것 또한 꽃향기 못지않은 생활의 향기가 아닐는지.

이 골목 안을 아름다운 꽃과 향기로 즐거움을 주었듯이 아무쪼록 좋은 이웃으로 꽃향기처럼 인정의 향기가 골목 안에 가득히 퍼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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