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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 역 문


Ⅰ.
경상우도 병마우후(兵馬虞候) 이용순(李容純)이 다음과 같은 장계를 올렸다. “이달(1월) 24일 자시[子時 밤 11시~1시]에 병마절도사(병사로 약칭)가 거처하는 동헌(東軒)에 불이 나서 병사 이인달(李仁達)이 불길 속에서 사망하였습니다. 병사가 차는 밀부(密符)와 병부(兵符)는 옆방에 있던 통인(通引) 김쌍윤(金雙胤)이 챙겨서 갖고 나와 본영의 대솔군관(帶率軍官) 이현모(李顯謨)가 와서 전하므로 잘 받았고, 밀부는 군관 유현(柳眴)에게 주어서 올려보냈습니다. 병사가 사용하던 인신[印信 관인(官印)]과 3개 진(鎭) 영장(營將)의 병부(兵符) 왼짝[左隻]과 소속 31개 고을 병부의 왼짝은 남강(南江)에서 건졌고, 옛날에 쓰던 인신, 유서(諭書), 절월(節鉞), 각 창고의 열쇠는 모두 불에 탔습니다.”

Ⅱ.
좌의정 김재찬(金載瓚)이 아뢰었다. “법조문에 중죄수가 탈옥했는데 법정(法定) 기한 안에 체포하지 못하면 수령을 파직하고 잡아다가 처벌하는 규정이 있습니다. 근래에 지방에서 죄수가 탈옥했다는 보고가 매우 많이 들어오는데, 매양 잘 다스린다는 소문이 있는 고을에서 발생합니다. 듣기로는 고을의 하급 관리들이 수령을 몰아내고 싶으면 반드시 일부러 중죄수를 풀어 주고는 잡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것을 자신들의 계획을 성공시키는 묘책으로 생각하여 별의별 간악한 짓을 저지르는데, 법이 이러한 부작용을 낳은 것입니다. 최근에는 이런 일이 더욱 심하게 일어나는데, 만약 방치했다가 이런 풍조가 확산되면 장차 일어나지 않는 사건이 없을 것입니다. 앞으로는 수령을 먼저 처벌하지 말고 죄수를 감시하는 옥사쟁이[刑鎖]부터 조사해야 합니다. 그래야 간계(奸計)를 근절하고 폐단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원 문


Ⅰ.
右兵虞候 李容純狀啓以爲: “本月二十四日子時, 本營兵使所處東軒失火, 兵使 李仁達竟爲身死於火炎中, 而兵使所佩密符與兵符, 因在傍通引金雙胤收拾出來, 本營帶率軍官李顯謨來傳, 故卽爲祗受後, 密符則本營軍官柳眴齎持上送. 兵使行用印信及三鎭營將兵符左隻與所屬三十一官兵符左隻, 南江拯得, 古印信․諭書․節鉞․各庫開金, 盡入燒燼.” -『일성록(日省錄)』 순조 33년 2월 1일

Ⅱ.
左議政金載瓚啓言: “重囚見失, 限內未捉, 則守令罷拿, 自是法文矣. 近來外邑失囚之報甚多, 而每在於稍有治聲之邑. 聞邑屬謀逐邑倅, 則必故縱重囚, 仍不捕捉, 以爲售奸之竗計云. 奸無不有, 法反爲弊有如是矣. 近則尤有甚焉, 今若一任其滋奸, 則將見弊無所不有矣. 此後則勿爲先罪守令, 必令嚴覈刑鎖, 然後庶爲折奸杜弊之道.” -『일성록(日省錄)』 순조 10년 6월 24일

 

일성록(日省錄)은 1752년(영조 28년)부터 1910년(융희 4년)까지의 국왕의 동정과 국정의 제반사항을 기록한 일기체 연대기이다. 흔히 '왕의 일기'라고 표현한다. 총 2,329책이 모두 전해지며 21개월분이 빠져있다. 원본은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이 보관 중이며 국유물이다. 《일성록》은 기존에 세계기록유산에 이름을 올린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와 더불어 조선왕조 3대 연대기로 꼽힌다. 편년체인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와는 달리 주제 순으로 사안들을 기록한 강목체 형식을 취하고 있다. 1973년 12월 31일 국보 제153호로 지정되었다.

 

 

해 설


『맹자』에 다음과 같은 일화가 나온다.

맹자의 고향인 추(鄒)나라와 노(魯)나라가 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에서 추나라의 유사(有司)가 33명이나 죽었는데 백성은 한 명도 죽지 않았다. 여기서 유사는 일선 지휘관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고민에 싸인 추나라 임금이 맹자에게 물었다. “유사가 죽는 현장에서 달아난 백성을 처벌하려니 너무 많아서 모두 처벌할 수가 없고, 처벌하지 않으려니 상관이 죽는 걸 노려보면서 구원하지 않은 죄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맹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흉년이 들어 기근에 시달릴 때 임금의 백성 중 노약자는 굶어서 시궁창에 쓰러져 죽고, 건장한 자들은 살길을 찾아 살던 곳을 떠나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수천 명이 그런 고초를 겪었지요. 그때 임금의 창고에는 곡식과 재물이 그득그득했으나 임금의 유사 중에 누구 하나 임금에게 창고의 곡식을 풀어서 백성을 먹이자고 건의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는 유사가 직무를 유기하여 백성을 잔혹하게 해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백성은 이제야 그 앙갚음을 한 것이니, 그들을 탓하지 마십시오. 임금께서 선정(善政)을 베풀면 관리들은 평소에 백성을 아끼고 백성은 유사시에 목숨을 걸고 상관을 지킬 것입니다.”

맹자가 살던 때는 수많은 나라가 명멸하며 전쟁이 끊이지 않던 약육강식의 전국(戰國) 시대. 이익에 따라 어제의 적국과 동맹을 맺기도 하고, 하루아침에 약속을 배반하고 동맹국을 침범하기도 하였다. 정의, 질서, 신의 따위는 찾을 수 없는, 오로지 이해(利害)와 힘의 논리만 작동하던 시대였다. 추나라는 그중에서 작고 약한 나라인데 앞의 일화에서 보듯 민심마저 국가와 위정자를 외면하고 있었으니, 안에서부터 스스로 무너져 가고 있었던 셈이다.

19세기 조선의 상황이 그와 크게 다를 것 없어 보인다. 첫째 인용문의 사건,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의 죽음은 역사의 기록이 어떻든 하급자들의 고의성이 다분해 보인다. 병마절도사라면 지금의 사단장쯤 될까, 신변 보호가 결코 허술할 수 없는 지위이다. 그런데 한밤중에 그의 침소에서 불이 났다. 방화(放火)를 의심하는 건 지나친 비약이겠으나, 관인을 챙겨 나올 여유가 있는데 잠든 병사를 깨워서 피신시키지 못했다는 건 납득하기 어렵다. 조정에서도 그 점에 의문을 품고 조사했으나 하급자들의 고의성을 입증하지는 못했다. 그런데도 부하들에게, 절도사가 죽을 줄 알면서도 손을 쓰지 않은, 소극적 혹은 간접적 살인 의도가 있었을지 모른다는 상상을 떨치지 못하는 건 당시 관에 대한 백성들의 혐오가 어느 정도였는지 보여주는 기록들 때문이다.

둘째 인용문, 경상 우병사의 죽음보다 약 22년 전에 있었던 차대(次對) 즉 한 달에 여섯 번 정부의 최고위직이 참석하는 정기 국정(國政) 회의에 상정(上程)된 안건은 관에 대한 백성의 혐오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지방 관아의 감옥에서 죄수가 탈옥하면 수령을 파직하는 것이 조선의 법이다. 이 법을 이용해서 수령을 쫓아내려고 간수가 일부러 죄수를 탈옥시킨다는 것이다. 그래서 탈옥 사건이 생기면 수령을 바로 파직시키지 말고 먼저 조사부터 하도록 규정을 바꾸었지만, 그런 사건은 병사 사망 시점인 순조 33년(1833)까지 계속 일어났다. 행위의 배경에 무엇이 있는지, 백성의 소리를 정확히 듣고 원인을 진단하여 적절한 처방을 내렸다면 아마 그런 일은 되풀이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조정에서는 해이한 기강, 퇴폐한 풍속, 타락한 민심이라는 진부한 진단을 내리고, 고작 내린 처방은 한가하게도 ‘더욱 엄하게 단속’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맹자 시대 추나라의 백성은 이웃 나라와의 전쟁에서 지휘관이 죽는 걸 보면서도 구하지 않았다. 19세기 조선에서는 참모들이 불길 속에서 병사를 구하는 대신 관인 같은 물건이나 챙기고, 아전들이 수령을 쫓아내기 위해 죄수를 탈옥시킨다. 추나라의 유사들은 흉년에 백성을 살리는 데 마음을 쓰지 않았다. 암행어사의 보고를 보면 19세기 조선에서는 수령들이 흉년에 조정에서 내려준 진휼곡(賑恤穀)을 빼돌릴 뿐 아니라 진휼을 빌미로 백성의 재산을 강탈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다.

이러고서야 백성의 삶이 유지되기 어렵다. 삶의 기초가 흔들리는 백성은 수령을 미워하고, 국가를 불신할 수밖에 없다. 사람은 스스로 업신여긴 뒤에 남이 그를 업신여기고, 나라는 내부의 공격이 일어난 뒤에 외부의 공격이 이른다고 했다. 차곡차곡 쌓여온 백성의 불안과 불신은 머지않아 민란으로 폭발하고, 조선은 이 내부의 공격에 외세의 개입이 합해져 결국 망국에 이르렀다. 인용문의 사건들은 그 전조가 아니었을까.

글쓴이 : 김성재(한국고전번역원 번역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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