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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우리 잘 늙고 있다 / 허창옥

부흐고비 2021. 6. 21. 14:39

밀면 먹으러 간다. 시원하다, 맛이 괜찮다, 로 의견일치를 본 점심메뉴다. 골목을 걷기 시작하자마자 그와 나 사이에 10m쯤의 간격이 벌어진다. 워낙 키 차이가 난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가는 마음이 편안하다. 젊었을 땐 서로 보폭을 맞추어서 걷고, 자주 손을 잡고 걸었다. 그때 오늘처럼 그가 앞서 걸었다면 아마 다투었을 것이다. 그는 대체로 자상하며 나를 잘 살피는 사람이었다.

우린 늙어가고 있다. 문득 그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는 예사롭게 혼자 걸어가고 나는 또 그런 그가 전혀 고깝지가 않다. 잠깐 돌아보고 섰다가 그가 식당으로 들어간다. 자연스럽다. 우리 이렇게 편하게 늙어가고 있다. 물론 지금보다 더 늙어서 그와 나 둘 중 하나가, 아니면 둘 다 걸음걸이가 불안하거나 아주 불편해지면 다시 젊었을 때처럼 손을 꼭 잡고 걷게 될 터이다. 늙은 아내, 늙은 남편은 서로에게 진득한 연민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서로를 지켜야 한다는 마음이 나이가 들수록 커지는 것 같다. 이 손을 영 놓게 되면 어쩌나하는 불안함 때문이 아닐까.

걺은 날 손을 잡고 걸었던 것은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열정에 가까웠던 까닭이다. 지금은 그저 덤덤하다. 감정의 자잘한 구석까지 들추다보면 한때의 사랑은 아스라이 사라져버렸고 미운 마음이 더께로 앉아있을 것이다. 아~ 내 사랑아, 어디를 갔느냐? 허망하고 또 허망할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살았던 세월이 사랑이었든 미움이었든 이제 그런 게 상관이 없다. 이런 마음의 상태가 나는 편안하다. 사랑이 더 컸으면 어떻고 마음이 더 컸으면 또 어떠랴. 따지거나 저울질할 필요가 없다. 그와 나는 여기까지 서른 해 남짓 잘 넘어왔다.

밀면이 나오길 기다리며 텔레비전을 본다. LA다저스와 뉴욕양키즈의 야구경기를 중계하고 있다. 먼 나라의 경기를 류현진이라는 투수 때문에 중계하고 사람들은 밀면을 먹으면서도 공 하나하나에 신경을 쓴다. 밀면 한 그릇을 다 먹을 동안 말 한 미디 하지 않아도 불편하지가 않다. 아니 말 한 마디는 했네. “오늘 투수가 류현진이 아니네. 8회 초인데 0대0이야.” 남편이 말했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이 없어도 그뿐이다.

다시 골목길을 걸어서 일터로 돌아온다. 그가 계산을 하고 자판기커피를 뽑는 동안 나는 걷기 시작한다. 거의 다 와서 문득 돌아보니 바로 뒤에 그가 와 있다. 거기 있겠거니, 그러는 것이겠더니, 만사가 그렇다.

‘만사가 그렇다’란 그저 무덤덤하거나 지나치게 건조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가 함께 있다는, 거의 완전한 신뢰의 상태라고 해야 맞다. 이대로가 좋다. 더 이루지 않아도 된다. 부자는 아니지만 배가 고프지 않다. 둘 다 나이에 걸맞게 성인병 두어 가기를 지니고 산다. 때가 되면 병원에 가고 처방된 약을 시간에 맞춰 착실하게 먹는다. 병이 없으면 좋겠지만 있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마음도 몸도 세월 따라 흐르는 것 아니던가.

이리 말하고 보니 마치 만사에 달관한 것 같은 민망한 느낌이 없지 않다. 결코 그런 게 아니다. 무언가를 잔뜩 벼르고, 좀 더 이루고자 했고, 두 손 가득 움켜쥐고자 했던 지난날을 겪었기 때문에 얻은 여유이고, 이제는 애써보았자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란 걸 깨달았기에 체념했을 뿐이다.

남은 날들을 평화로이 사는 것이 소망이다. 더하여 너그러운 어른이 되는 것이 간절한 바람이다. 이 두 가지야말로 우리 깜냥을 훨씬 넘어서는 욕심이란 걸안다. 그래도 그리 되려고 마음은 먹는다. 우선은 오늘을 잘 보내야지, 그런 마음으로 나는 그를 바라본다. 그의 마음도 그러리라 믿는다.

바로 뒤에 와 있는 그의 손을 내가 먼저 잡아본다. 부드럽진 않지만 따뜻하다. 우리 잘 늙고 있는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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