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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당선과 당첨 사이 / 이성화

부흐고비 2021. 8. 10. 08:47

“H가 JTBC 드라마 공모에 당선됐대.”

드라마작가교육원을 함께 다녔던 친구가 몇 년 만에 연락을 했다. H의 당선 소식에 자극받아 다시 스터디를 시작하자는 제안을 가지고. “나도 그 공모전에 대본 보냈었는데.”라는 말은 왠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어쨌든 그 일을 계기로 오랫동안 흩어져있던 우리 스터디 멤버는 다시 뭉치기로 했다.

“나는 작가가 될 거야.”라고 말했을 때, 엄마의 반응은 간호사가 될 거야, 선생님이 될 거야라고 할 때와 사뭇 달랐다. 대뜸 “배곯고 힘든 일을 뭣하러하려고?”라고 했다. 어린 마음에 배고픈 게 싫었던 나는 ‘돈을 벌어서 배곯지 않을 만큼 쌓아놓고 글을 써야지.’ 하는 결심을 했다. 돈 벌어 쌓아놓는 건 작가가 되는 것이나 배고픔을 참는 것보다 힘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왜 못했을까. 그 단순한 사실을 깨달은 건 스물여덟 살 겨울이었다. 첫 직장에서 1년, 그다음 직장에서 2년, 또 다른 곳에서 2년. 적응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돌다 생각했다.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글’이라는 것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래도 하고 싶었다. 하겠다고 결심하는 순간부터 행복했다. 잠깐 일을 쉬면서 이런저런 고민으로 복잡한 머리를 TV 드라마로 식히다 한창 인기 많았던 드라마 <보고 또 보고> 재방송에 푹 빠졌다. 그러다 자막으로 나오는 광고를 보고 방송작가교육원이라는 곳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6개월이 한 학기였는데 다섯 학기를 다녔다. 쉽게 될 줄 알았다.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는 스스로 판단할 수 없었지만, 열정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이름 난 드라마 작가는 어지간한 직장인과 비교도 안 될 만큼 잘 번다니 ‘배곯지 않는다.’는 것도 큰 매력이었다.

결혼을 전제로 만나자는 남자와 진지한 관계가 되던 순간에도 ‘나는 결혼해도 작가가 될 때까지 공부를 계속할 거다’라는 얘기를 제일 먼저 했다. 첫딸이 돌이 지나 어린이집에 다닐 수 있게 됐을 때부터 직장, 육아, 교육원 수업을 병행했다. 주 4일 초등학생 보습학원에서 일하고 나머지 하루는 교육원을 나갔다. 아이가 잠들면 일어나 대본을 썼다. 둘째를 가지고 배가 불러오기 전까지 그렇게 했다. 힘들었지만 단막극 한편, A4지 30장의 마지막 씬 아래 ‘end.’라고 쓰고 난 후, 가슴이 뻐근해지도록 차오르는 만족감은 포기할 수 없는 원동력이 되었다.

드라마 대본을 쓰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실력이 빨리 늘지도 않았다. 더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매 학기 강사들이 하라는 건 닥치는 대로 했다. 인문학책을 읽으라면 읽었고, 필사를 하라면 했다. 구성 노트, 캐릭터 표, 인물 구성도, 만들어 보라는 건 다 만들었다. 그리고 매년 각 방송사에 단막공모전이 있을 때마다 대본을 써서 보냈다.

여의도 작가교육원에서 공부할 때 옆 강의실에서 노래 연습하는 소리가 들렸다. 가수가 되려고 보컬 수업을 받는 아이들 소리라고 했다. 그때 강사가 저 아이들이나 너희들이나 다를 바가 없다고 했다. 가수지망생이 얼마나 많은가, 그중 연습생으로 긴 시간을 보내다 소리소문없이 사라지는 아이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우리도 그와 같다니 내가 가고자 했던 곳이 얼마나 먼 곳에 있는지 확 와 닿았다.

남편이 운영을 시작한 공장에서 함께 일하게 되면서 글 쓸 시간이 거의 없었다. 아침에 나가서 오밤중까지 해도 일은 끝이 없었다. 공장 운영이 어렵기도 했지만, 드라마를 쓰고 싶은데 볼 시간도 없다는 것이 더 견디기 힘들었다. 이런 상황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좌절감에 하루하루 시들어갔다. 아이 셋도 잘 키워야 했고, 나이는 먹어 가는데 결과물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인생에 자꾸 강풍이 불어닥치니, 열정만으로 뚫고 나아가기에는 현실이 너무 무거웠다. 그대로 포기할 수는 없어 디지털대학교 문예창작과에 입학원서를 냈다. 공장에서 늘 한쪽 귀에 이어폰을 꽂고 일을 했다. 교재를 보면서 수업을 들어야 하는데 일을 하면서 수업을 들어야 하니 교재를 볼 수는 없었다. 대신 몇 번씩 반복해서 들었다.

첫 학기 수업에서 수필 수업을 들은 것은 나중에 생각해 보니 인생에 세 번 주어진다는 기회 중 한 번인 것 같았다. 소설이나 시 보다는 수필이 조금 쉬울 것 같아 첫 학기 수업으로 선택했는데 너무 재미있어 푹 빠져들었다. 과제로 낸 수필은 좋은 점수를 받았다. 용기를 내서 수필동아리에 나갔다. 처음 들고 간 글로 교수님의 칭찬을 받았다. 드라마를 쓰면서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칭찬이었다. 그리고 2년이 채 못 되어 등단하게 되었다. 내 나이 마흔셋이 되던 1월이었다. 실감 나지 않았고, 실감이 나지 않으니 기쁘지도 않았다. 그저 얼떨떨했다. 그토록 원하던 작가라는 타이틀을 가지게 되었는데도 삶은 변하지 않았다.

등단한 지 3년이 지났다. 3년 동안 꾸준히 수필을 썼다. 등단소감에 썼던 것처럼 너덜거리는 내면을 꺼내 두들겨 빨아 널어놓는 부끄럽고 어려운 작업이었다. 그런데 그 3년 동안 나는 많이 변했다. 주업인지 부업인지 구분 가지 않을 정도로 생업은 들쑥날쑥해서 벌이도 들쑥날쑥했지만, 오히려 나는 안정되어가고 있다. 나를 꺼내 보이고 털어내며 비워갔다. 내 안에 있던 아픔과 상처도 바로 보고 치유할 수 있었다. 회피하고 돌아가던 갈등과 당당히 마주보기도 해 보았다. 일상을 힘들게 하던 감정 기복도 덜해지니 한결 편안해졌다. 내게 필요했던 것은 배곯지 않을 직업이 아니라 이런 문학의 힘이었다.

<미술관 옆 동물원>이란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시나리오 작가를 꿈꾸던 여주인공이 “내 시나리오가 당선되면…”이라고 하자 남자주인공이 “당선? 네가 되면 그건 당첨이지.”라고 한다. 당선은 실력이고 당첨은 운인데, 어쩌면 내가 수필등단을 하게 된 것은 당선과 당첨 사이 어디쯤이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수필 문학이 흔들리던 내 삶을 편안하게 만들어주었으니 등단은 내 인생의 두 번째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수필공부와 병행했던 드라마 스터디는 꾸준하지 못했고, 단막으로 당선되었던 H는 시리즈물을 내지 못하고 다시 라디오 단막드라마 공모 당선 소식을 보내왔다. 다시 드라마를 쓴다면, 당선되든 당첨이 되든 아예 되지 않든, 그 길에 서서 흔들리고 힘들어하진 않을 것 같다. 한데, 세 번째 기회가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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