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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문과 원문


열네 번째
오늘날 보건대 염치는
삽사리 배속에나 있네.
늘 제 밥그릇이나 긁을 뿐
부엌을 향해서는 앉지도 않네.

其十四
今日看廉恥금일간염치
靑狵肚裏存청방두리존
尋常櫟釜際심상력부제
不欲向廚蹲불욕향주준

- 김창흡(金昌翕, 1653~1722), 『삼연집(三淵集)』 권15 「갈역에서 이것저것 읊다(葛驛雜詠)」

 

조선후기 학자 김창흡의 시·서(書)·제문·일록 등을 수록한 시문집으로 36권 18책. 목판본. 1753년 문인 유척기(兪拓基)가 간행하였다. 습유(拾遺) 32권이 따로 있다.

 

 

해 설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1653~1722)은 자가 자익(子益), 호가 삼연(三淵), 시호는 문강(文康)입니다. 서릿발 같은 기상으로 청에의 굴복을 반대했던 김상헌(金尙憲)의 증손이고, 영의정을 지낸 김수항의 셋째 아들이며, 노론 4대신의 한 사람이었던 김창집(金昌集)과 조선후기 낙론(洛論)을 이끌었던 김창협(金昌協)의 동생입니다. 부친과 큰형이 사화로 죽은 뒤로 일체의 출사를 포기하고 시문 창작과 성리학 연구에 일생을 보낸 분입니다. 백악시단을 이끌며 조선후기 시풍의 쇄신을 창도하였고, 문장은 물론 성리학으로도 조선후기 문인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친 문인입니다.

삼연은 59세 되던 1711년에 강원도 인제 설악산 자락에 갈역정사를 완성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갈역정사에 머물면서 자연과 인생에 대한 사유과 상념을 많은 시편에 담아냈습니다. 「갈역잡영」은 삼연이 67세, 68세에 지은 것입니다. 시체를 달리하며 같은 제목으로 모두 392수의 연작시를 지었는데 노년의 삼연이 도달한 시적 경지를 잘 보여줍니다. 노시인은 「갈역잡영」에서 시적 소재를 비시적인 것까지 확대시킨 것은 물론, 성리학의 심오한 이치, 자연과 인생에 대한 깊은 사유, 사회에 대한 환멸과 불평 등 도저한 생각들을 일체의 꾸밈없이 간결하게 드러내었습니다.

시의 전반부에서 시인은 매우 파격적인 메시지를 던집니다. 오늘날 염치는 삽사리 뱃속에나 있다고 합니다. 염치가 무엇입니까? 염치(廉恥)란 부끄러움을 살핀다는 말로, 인간과 금수를 구분 짓게 하는 덕목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오늘날엔 그 염치가 사람에게 없고 금수인 삽사리 뱃속에 있다고 합니다. 거칠게 말하자면 오늘날 사람은 개만도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인은 왜 이런 과격한 말을 하는 걸까요?

3구와 4구에 그 이유가 있습니다. 시인은 삽사리를 오랫동안 관찰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삽사리를 보고 있자니, 밥그릇이 비었을 때도 제 밥그릇만 발로 긁을 뿐이지 음식이 있는 부엌을 향해서는 앉지도 않습니다. 곧, 삽사리는 저한테 주어진 것만 먹을 뿐, 아무리 배가 고파도 제 것 아닌 것에는 욕심을 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런 삽사리의 행태를 대비적으로 그리면서 오늘날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 즉 염치지심은 사람이 아닌 저 삽사리 뱃속에나 남아있다고 한 것입니다.

칠순을 바라보는 노시인이 이렇듯 매섭게 일갈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시인은 부조리한 현실을 마주하면서 부조리한 현실이 공명하고 정당한 사회로 변하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개와 인간을 대비적으로 둔 채, 제 것 외에는 욕심을 내지 않는 개를 통해, 제 것은 당연하고 남의 것도 내 것이어야 하는 인간의 탐욕을 부각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나아가 인간이 탐욕을 버리려면 염치가 있어야 하는데.... 하면서 인간이면 마땅히 지녀야 할 염치의 회복을 말한 것입니다.

노시인은 이렇듯 자신이 발 딛고 있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마주합니다. 남 보기 우아하게 꾸미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남 보기 불편하지만, 불편한 그대로의 현실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는 잘못되었다면 그 잘못을 바로 잡아야함을 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이 이 짧은 시가 지닌 깊이이자 힘입니다. 노시인의 카랑카랑한 음성이 귓전에 울리는 이 작품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당신이 마주한, 혹은 마주할 부조리 앞에서 공정함을 회복하기 위해서 당당하게 마주하라 권하고 있습니다.

글쓴이 : 김형술(전주대학교 한문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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