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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함순례 시인

부흐고비 2022. 7. 5. 08:00

함순례 시인
1966년 충청북도 보은군에서 출생했다. 한남대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1992년 계간 《시와사회》로 등단하였다. 시집으로 『뜨거운 발』, 『혹시나』, 『나는 당신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울컥』이 있다. 제9회 한남문인상, 제18회 아름다운 작가상을 수상했다. 작은詩앗 채송화 동인

 



뜨거운 발 / 함순례
어스름 할머니민박 외진 방에 든다// 방파제에서 그물 깁던 오십줄의 사내/ 지금쯤 어느 속정 깊은 여인네와/ 바짓가랑이 갯내 털어내고 있을까/ 저마다 제 등껍질 챙겨가고 난 뒤/ 어항의 물비늘만 혼자 반짝인다/ 이곳까지 따라붙은 그리움의 물살들/ 밤새 창턱에 매달려 아우성친다/ 사랑이 저런 것일까 벼랑 차고 바윗살 핥아/ 제 살 불려가는 시린 슬픔일까/ 몸이 자랄 때마다/ 맨발로 차가운 바다를 헤매야 하는 소라게야/ 울지 말아라 쓸쓸해하지 말아라/ 게잠으로 누워 옆걸음 치며 돌아가야 할/ 누더기 등껍질 촘촘 기워간다/ 물 밀려간 자리 흰 거품 걷어내며/ 기어 나오는,/ 소라게의 발이 뜨겁다//

혹시나 / 함순례
마흔 지나자 내게도 손님이 찾아왔다/ 위아래 사이좋게 나란히/ 그러나 본래 악한 녀석들은 아니라 하니/ 잘 모시고 잘 사귀어 보기로 했다/ 손님들도 때로는 기침 큼큼/ 자신의 존재를 알리며 발자국 소릴 냈다/ 유방 한쪽이 찌르르-/ 예리한 날에 찔린 듯 아파온다거나/ 종종 허리가 시큰 아랫배가 묵직해지곤 했다/ 내 안에 무언가 돋아나 단단해지고 있다는 거/ 미처 소화해내지 못한 내생의 환幻들이다/ 또 다른 세상과 눈 맞출 궁리나 하면서/ 새끼 치고 싶은 욕망에 들끓는 짐승처럼/ 사십여 년 내리 굴려온 몸이/ 이제 나를 부리고 가겠다는 신호/ 혹시나, 우주 너머/ 잃어버린 나에게 건너가는 환지통은 아닐까/ 꾀병과 엄살을 섞어 시시로 날 주저앉힐 때마다/ 갓 태어난 아가 어르듯/ 행동거지 조심해졌다 말투 더욱 겸손해졌다/ 멀리 계신 엄마에게 전화하는 날 많아졌다//

울컥 / 함순례
강물이 흐느끼는 소리/ 파란만장하게 스며드는/ 신성리 갈대밭// 노랑어리연, 나비처럼 날고 있다/ 그 꽃 하도 이뻐/ 그 물웅덩이 하도 가벼워// 세찬 바람도/ 잠시 숨 고르는 사이/ 그 사이//

함순례기 / 함순례
그러니까, 술래라 부른 적 있다 기일게 수울래 부르면 달빛 강변에서 강강수울래 춤추는 듯, 좀 짧게 부르면 술래야술래야 머리카락 보일라 숨은 동무들 찾느라 해거름 길어졌다 해례야 달례야 부르는 벗들도 있다 벗들에게 빛 같은 존재가 되라는 의미겠는데 온몸 붉어지는 호명이다 함수라고도, 수레라고도, 순네라고도, 첩첩산골 가시내가 되었다 미소가 둥글어졌다 글냄새 물씬 나는 필명도 잠깐 생각했지만 지금 나는 태앗적 이름으로 돌아와 있다 들판을 한없이 걸어야 하는 순례에 서 있다 충북 보은군 회북면 용촌리 백삼십육번지 일천구백육십육년 일월 스무여드레 그 하늘에 다시 예를 갖춰야겠다 슬픈 낙타 발굽 소리와 모래바람의 숨통을 열어봐야겠다 순례야 순례야 삼보일배, 다시 돌아와야 하는 그 길엔 철없는 가시나무들이 촘촘했다//

마흔, 잘 오셨다 / 함순례
산허리에 구름이 몰려있다/ 이론적 근거야 알 수 없지만/ 내가 가고 있으니 구름이 오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빗속에서 바라보는 구름은/ 고등어 등처럼 푸릇했으나 파닥거리지 않는다/ 추녀에 매달려 울던 빗방울로/ 낯을 씻으며 묘하게 마음 편안하다/ 오늘 아침 핏발 가시지 않은 눈을 닦다가/ 수채로 흘러든 세숫비누 조각/ 향기 잃고 몸 가벼워진 자화상인 듯/ 울컥, 했다/ 세면유리에 눈물 얼룩진다/ 바싹 다가와 앞가슴 들이미는/ 흰 뼈들, 저 구름 속엔/ 세력 형형한 수많은 손금들이 산다/ 사십 년 내 몸뚱이 숨겨준/ 고마운 골목길이 사신다//

꼴림에 대하여 / 함순례
개구리 울음소리 와글와글 여름밤을 끌고 간다/ 한 번 하고 싶어 저리 야단들인데/ 푸른 기운 쌓이는 들녘에 점점 붉은 등불 켜진다// 내가 꼴린다는 말 할 때마다/ 사내들은 가시내가 참, 혀를 찬다/ 꼴림은 떨림이고 싹이 튼다는 것/ 무언가 하고 싶어진다는 것/ 빈 하늘에 기러기를 날려보내는 일/ 마음속 냉기 당당하게 풀면서/ 한 발 내딛는 것// 개구리 울음소리 저릿저릿 메마른 마음 훑고 간다/ 물오른 아카시아 꽃잎들/ 붉은 달빛 안으로 가득 들어앉는다// 꼴린다, 화르르 풍요로워지는 초여름 밤//

생(生) / 함순례
분주한 일에 쓸리다 보면/ 마음이 뻘처럼 눕는다/ 안으로 목 메어오는 적 있다, 더러는/ 화장실로 달려가/ 왈칵 눈물 쏟곤 하는데/ 야윈 눈발이 다년간 어느 한 날/ 나를 앞지른 이 있었다/ 어금니 꽉 깨물었지만/ 공중화장실 음습한 냄새/ 어둡고 긴 터널 빠져나오는 소리/ 바닥을 차고 올라 내 아랫도리 적시었다/ 겁 없는 생이 어디 있으랴/ 누군가의 눈물로 크는 것이/ 이 땅의 이데올로기임을/ 옆 칸 통곡소리 끌어덮으며/ 말라버린 눈물자국을 보고서야 알았다//

달 / 함순례
어쩌다 깜박 졸았나봐요/ 어둠 뚫고 지켜보는 시선 있어 눈 떠 보니/ 그대가 빤히 훔쳐보고 있네요/ 들고 갈 것 없으니/ 잠시 쉬어가려던 참인가요/ 그대 편히 머물다 가세요/ 한밤중 슬며시 제게 찾아와/ 짓무른 몸 정갈히 씻어주시는군요/ 대접할 수 있는 건/ 마시다 남은 떫은 차 한 잔뿐/ 더러 맑은 술이나 입맛 돋우는 음식으로/ 당신을 맞을 때도 있겠지요/ 오늘은 딱 한번만 눈 감아 주세요/ 한 시절 지나면/ 당신도 그만 기울고 말거잖아요//

님 / 함순례
일곱 살에 겨우 한글을 깨친 아이는 ‘선생님’을 통글자로 알고 있었죠 어느 날 만화영화를 보다가 선생! 하는 소리에 귀가 번쩍 띄었다는데요 다음날 어린이집에 도착하자마자 선생! 하고 크게 불렀다가 호된 꾸중을 듣고는 어안이 벙벙했어요 아이는 선생님을 열번 복창하며 눈물 흘렸습니다 그때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주는 손길…, 참으로 무서운 님이 통째 물길을 내는 순간이었습니다//

뺨 / 함순례
내 친구 윤태자, 언젠가 그녀의 뺨을 갈겼다 내 궁색한 자취방에서 한 일 년 식객노릇을 했는데 새벽별만 바라보아도 배터지게 슬펐던 그 시절, 우리는 불어터진 라면발처럼 톡톡 끊어지기도 하고 가지런히 단추를 채우기도 하면서 세상에 대한 서슬 푸른 적의를 키우기도 했다// 내가 직장으로 야간대학으로 돌아치는 동안에도 밤고양이처럼 웅크려 있기 일쑤였던 태자가 경찰시험에 붙은 날, 그날 밤 나는 태자의 뺨을 철썩, 올려붙였다 "가시나! 민중의 지팡이 노릇 똑바로 햇!" 그때는 임수경이 평양축전에 참가한 즈음이었는데, 그녀와 외양이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나조차 아예 짬새 똥파리쯤으로나 여긴 경찰이 아니꼬와 괜한 화풀이 한 것이다 그 밤의 손꽃.// 결혼하고 하나 둘 새끼 낳고 이제 헐렁한 나이, 모처럼 한 방에 눕는다 태자가 말한다. 수많은 민원인 속에서 지금도 여전히 그 뺨 얼얼하다고....... 내 친구 윤태자! 누가 뭐래도 늠름한 민중의 지팡이다// 어느새 고단히 잠든 태자의 뺨을 쓸어본다 내 뺨, 온통 얼얼하다//

인(印) / 함순례
달맞이 고개 넘어 바다로 가는 길/ 도로변에서 ‘한국시’를 보았다/ 간판이다/ 그 끝엔 ‘한국시인’ 좀 작으나/ 핏빛 노을 같은 붉은 낙관까지 찍어 놓았다/ 나른하게 고여 있던 자동차 안 일순 술렁거린다/ 위대한 한국시인이 살고 있는 집?/ 봄 들판이 휙휙 지나간다/ ‘시’자만 봐도 ‘시인’ 소리만 들어도/ 속엣 것 수만 길이 꿈틀거리는/ 아무도 모르게 품에 넣고 다니다가/ 무덤 속에 누워서도 야금야금 꺼내먹을 수 있는/ 문장 하나/ 잘 익은 시 한 편/ 울컥, 뜨거워지는데/ 누군가 에잇 국숫집이잖아, 찬물을 끼얹는다/ 아뿔싸! 되돌아갈 수 없는/ 제 살 파먹는 눈물바다/ 푸릇한 이 길도 도장이다//

축(軸) / 함순례
두 개의 바늘이 있다/ 벽시계는 3시 20분을 앉은뱅이 탁상시계는 4시 25분을/ 가리킨다// 5시 약속까지/ 1시간 40분의 淸明, 꽃 진 자리 돋은 연초록 눈빛에/ 잔뜩 꼴린, 녀석의 아랫도리 짐짓/ 눈감아 주는데/ 그예 30분의 그늘로 달려가는 초침// 나란히 걸을 때/ 잘 들리는 왼쪽에 상대방을 세우거나/ 슬며시 제 위치 옮기는 사내// 시간도 섭취하기 나름이다/ 사내의 충혈된 눈을 보면서/ 오차의 이명 귓바퀴를 핥다가 일순 가볍다/ 떼 지어 하교하는 울타리 꽃에 기대어/ 비로소 나사를 조인 하루의 늑골이 말랑해진다//

숲 / 함순례
오래된 편지를 읽습니다 당신에게로 갔다가 우리 속에 놓여진 편지 당신을 만나 즐겁다, 쓰여있군요 행복해요, 라고도요/ 가까이 있으면 자랄 수 없다는 듯 간격을 두고 발끝 세운 나무들처럼 큰 바람이 일렁일 때나 사르락 손 내미는 이파리처럼 멀어졌다가 가까워졌다가/ 곁눈질로 골똘했지요 이따금 새들에게 눈 맞추는건 헛김나는 일이어서 나는 그만 아득해져 혼자 말갛게 익어가는 산감이 되었더랬지요/ 그런데 묘목을 심은 첫 자리 뱀처럼 얽혀 있는 우리의 뿌리를 만납니다 나의 밑둥 썩은 감꼭지 핥고 있는 이가 바람이려니 했더니 당신이었군요/ 벌거숭이 산길에 가위눌리는 일도 끝이지 싶네, 내게로 온, 오늘 문득 층층이 허물 벗은 골짜기 따라 우거진 숲을 읽습니다//

사랑방 / 함순례
울 아부지 서른, 울 엄니 스물 셋 꽃아씨, 아부지 투덕한 살집만/ 믿고 신접살림 차렸다는디, 기둥 세우고, 짚과 흙 찰박찰박/ 벽 다져, 오로지 두 양반 손으로 집칸 올렸다는디, 부쳐먹을/ 땅뙈기가 없는 기라// 내사 남아도는 게 힘이여 붉은 동빛 박지르며 집을 나서면, 이윽이윽/ 해가 지고, 어둠별 묻히고야 삽작을 밀고 들어섰다는디, 한 해 두 해/ 불어나는 전답, 울 엄니 아부지 얼굴만 봐도 배가 불렀다는디......// 늘어나는 것이 어디 그뿐이랴 울 엄니 이태가 멀다 실제 배가 불렀다는디,/ 갈이질에, 새끼들 가동질에, 하루 해가 지는지 가는지 하 정신 없었다는디,/ 울 아부지 저녁밥 안치는 엄니 그대로 부엌바닥에 자빠뜨린 거라// 그 징헌 꽃이 셋째 딸년 나였더란다 첫국밥 수저질이 느슨할밖에....../ 임자 암 걱정 말어 울 아부지 구렛나룻 쓰윽 훑었다는디,/ 스무날을 넘기자 사랑방 올린다고 밤새 불을 써 놓고 퉁탕퉁탕 엄니 잠을/ 깨웠드란다 모름지기 사내 자슥 셋은 되야혀 그때 되믄 계집애들이랑/ 분별하여 방을 줘야 않겄어!// 그렇게 맨몸으로 생을 일궜던 울 아부지, 성 안 차는 아들 두 놈 부려놓고/ 이젠 여기 없네.//

돌밭에 절하다 / 함순례
아버지를 묻은 이곳은 돌밭이었다 오이 딸기 주렁주렁 열리던 감자꽃 쇠뜨기 바랭이 돌날에 찔려 징징거리는 날 이끌고 심으신 감나무 일천만사 아버지의 속울음 같은 구름 뭉실뭉실 흘러간다// 아셨을까/ 아버지, 알아채신 걸까/ 안아 올려 감나무 아래 세워 놓으신다/ 붉은 홍시 떨구어 주신다// 살아 생전 척박하기만 했던 아버지의 한 바닥 밭 고스란히 내게로 넘어왔을 때 뼈아프게 주워드는, 고랑 속! 돌소리 자글자글하다//

기일 / 함순례
간밤 아버지가 오셨다, 나들이할 때 입으시던 한복 차림으로 묵묵히 소반 앞에 앉으신다 무릎 꿇고 막걸리 한사발 그득하게 따라드린다 아버지 말씀이 없으시다 잔 비우신 아버지 황망히 일어서신다 끝내 한 마디 말없이 돌아 나가신다 아버지 앞에 이렇게나마 나를 올리는 데 꼬박 십 년이 걸렸다//

유언 / 함순례
어머니의 장롱은 퀴퀴하다/ 솜 뒤틀린 목단 이불/ 누런 사진 뭉치들과 자잘한 옷가지에 기대어/ 어린 날 내 상장까지 가지런히 쌓여 있다/ 거기, 장롱 가운데쯤 커다란 하얀 보자기/ 굳은 매듭 풀어본다// 목련공원묘지에 묻어다오, 믿는다// 오래전 마련하신 수의 위에/ 눈물로 적어놓은 쪽지 한 장/ 젊은 아버지 목숨줄 놓은/ 고향에 나란히 묻히고 싶지 않은 거다/ 당신 가신 뒤 아버지 이장 이루어지길 바라며/ 굵은 글씨 콱, 콱 박아 놓은 거다// 요즘 들어 자주 세상 길 덮쳐오는 것 같아/ 집 나서기 무섭다는 어머니/ 새로운 길 찾아 나선 것일까/ 내 가슴에 얼룩얼룩 박혀오는 못,// 믿 · 는 · 다//

숨어있는 동굴 / 함순례
엄마의 입안에 누구도 드나들 수 없는 동굴이 있다// 어느 날 수저질 느슨한 엄마/ 고기를 씹지 못하신다/ 고름 뿌리로 남은 이, 하나 둘 셋,// 빛도 바람도 없이 습기만 눅눅한/ 십수 년 불 들이지 않은 검은 아궁이/ 그 깊은 자궁을 들여다 본다// 청상 시절 중심이 흔들릴 때 있었다/ 털어놓으시던 엄마/ 차암 의젓한 이였는데, 차마 니들을 두고 갈 수 없어서...// 풀이 자랄 수 없는 동굴/ 허나 칠남매는 엄마의 살을 뜯어먹고 자란/ 육식동물이었으니// 내일 당장 죽더라도 오늘 맛나게 드시고 가시요!/ 나의 완력에 뿌리 뽑아낸 엄마/ 비로소 곤한 잠에 드신다// 내가 발견한 동굴은 고작 세 개뿐/ 몸 어딘가 숨겨놓은 동굴이 있는지 나는 모른다//

노안 / 함순례
마흔 갓 넘은 나이였다/ 내 몸에 장착한 최초의 무기/ 돋보기로 읽는 세상은/ 맑지도 가볍지도 않았다/ 하지만 가까운 것 먼 것/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화두(話頭) / 함순례
삶의 문학상 시상식 축사 중에/ 나태주 시인은/ 그것에 대해 쓰지 말고/ 그것을 쓰자고,/ 더 좋은 건 그것이 되자고 했다// 그 말씀 가슴에 그려놓고/ 몇 날 며칠 생각에 잠기는데// 알 듯 모를 듯/ 그것은, 한순간에/ 입안으로 굴러들어오는 홍시는 아니었다//

칩거 / 함순례
봄이라고, 알을 까고 나온 미물들이/ 19층 아파트까지/ 높이 높이 날아오른다// 외롭지 않으냐,/ 다닥다닥 여린 날개를 떨어/ 내 집 창을 두드린다// 가까이 맞대어 웃던 때가 언제인가/ 나를 방문한 친구들과/ 며칠째 이야기를 나눈다//

안부 / 함순례
아랫집은 아니고 옆집일까 윗집일까/ 코 고는 소리/ 아파트 벽을 뚫고 들려온다/ 느릿느릿, 거칠게// 틈이란 틈 죄 코고는 소리로 메우는/ 저 집 남자는 하는 일이 뭘까/ 여자와 한방을 쓸까 각방을 쓸까/ 쓸 데 없는 호기심에 신경이 곧추선다// 늦은 시간 승강기 작동음/ 비음 섞인 흥얼거림/ 현관문 여닫히는 소리// 소요란 살아 있다는 징표다,/ 그대 안녕하신가, 그래 나도 안녕하다/ 뒤척이는 밤의 언저리를 향해 새벽 미명이 전하는 안부다/ 저만치, 아침이 오고 있다//

배낭 / 함순례
검은 배낭을 메고 출근을 한다// 일촉즉발, 빠르게 걸어야 하는 골목은/ 미끄러워서/ 매번 지나왔으면서도 오래 낯설다// 날마다 밑바닥을 떠도는 여행자/ 아프리카코끼리를 업고 간다 제 무게가 삶이라는 것, 등짐은 때로 집이 된다는 것, 하여 이 슬픈 정글에 작달막한 날 부려놓은 어머니와 어머니, 그 초식의 진동, 몸속을 울린다// 출판원고와 약속과 밥,/ 등으로 걸어야 할 저 눈시린 허공들// 다 말할 수는 없는 일이어서/ 배낭을 멘다//

노을 / 함순례
쉿!/ 물고기들이 뛰놀잖아 저 낮은 수면을 연신 밀어 올리잖아/ 수초들도 춤을 추기 시작했어 굽이치며 내려앉는 저녁의 냄새들/ 돌고 돌며 심연을 깨우는 흰여울, 장막 같은 수면을 차올리는/ 물고기들 알몸으로 반짝이잖아 목소리 높여 도망치지 마/ 제발,/ 강물 위로 캄캄하게 빛나는/ 저 순정한 몸짓들을 좀 봐//

담양(潭陽) / 함순례
길을 냈네// 나는 왜 누가 내놓은 길만 따라왔는지/ 내가 이 겨울 산골에 들어온 건/ 사랑을 놓치고 사랑에 서러워서였네/ 무덤이나 농지에서 끝나버리는 길/ 능선 너머로 잇대어 보고도 싶었네/ 죽어서 가는 곳은 무덤뿐 아니니/ 사람이 밥심만으로 살아지는 것 더욱 아니니// 나의 무기는 일심 깡다구였네/ 거친 나무 걷어내고 덤불가지 쳐내며/ 적막강산에 구부러진 두 손 내밀 때마다/ 바람이 붉게 붉게 울었네/ 몸집 큰 산꿩은 팽팽한 봉인을 풀고는/ 늑골에 고여있던 그늘을 베어물고 사라졌네// 햇살 한 평/ 햇살 두 평/ 숨 가운데 오솔길이 구불구불한 등뼈 드러내며 삼삼했네/ 누구와 이 길을 걸을까/ 따순 볕이 가슴까지 차올랐네// 하, 담양이었네//

옥천 / 함순례
한 편의 시가 집을 열고 밥상을 차리고/ 한 편의 시가 마당에 울타리에 꽃을 피우고/ 한 편의 시가 돌 틈 호수 풀숲까지 먹여 살리는/ 그곳에 갈 때마다 오소소 몸살이 돋았다/ 시는 이렇게 미치는 것이라고/ 스며들고 번지는 것이라고/ 어디선가 중얼거리는 소리 들렸다//

군북에 가다 / 함순례
돌담도 묻고 돌담 뒤 숨어 엿보던 눈썹도 묻고 눈다래끼 사간 진이와 멱 감던 개울도 묻고 버들치처럼 여간만 손에 잡히지 않던 고놈, 시뻘건 첫사랑마저 묻은, 물의 살속, 병풍바위 얼굴에 떨어진 햇살이 붉다 물길 따라 시루떡처럼 포개진 바위너설 오르자니 자꾸만 헛발질이다 벼랑을 타고 앉은 굴참나무 짓궂은 발길질로 낙엽들 물 속으로 밀어 넣는다 미끄러진 발바닥이 쿡쿡 쑤셔온다// 갈면 갈수록 몸 패이는 숫돌 같은 고향/ 그만 이 길 접어야 하리 가거라, 그래 깊이 깊이 잠기거라, 물 속 마을의 두 쪽 불알, 병풍바위여//

신도여인숙 / 함순례
남들 다 내 같지 않제 걱실걱실한 뱃사람들 상대하기가 좀 에려운 기라 고만 둬뿔라 몇 번을 맘 묵어도 쪼매 두고 보제 했던기 이날이라카이 지금사 일 놔뿔기도 궁시럽고마 뱃사람들 월 세방으로 나 돌리뿐 기라 그라도 한 밤만 재와주소, 및칠 굶었는데 밥 좀 주소, 하믄 맴이 아퍼가 재 와주고 믹인 사람, 빛도 없는 밤에 디리닥쳐가 날마새마 홀랑 도망간 넘들 쌨다 우째다가 방세 줄라꼬 다시 온 넘은 한 분도 못 봐가 속이도 속아주고 함시로 사람이 독해지제 아 이것? 예전 꽁치잡이배 그물에 쓰던 기라 열쇠가 하 쪼매니께 안경집만한 여어 다 잡아매놓으이 십상 좋다 주무이 뿔룩해징께 아참 하고 놓고 가는 기라, 여는 낯 씻는 데고 저 끝짝이 볼일 보는 데라 영화배우도 여그 많이 들 왔제 요샌 시인이라는 작자들도 더러 찾아오더만,// 근디 시인이 대체 뭐하는 사람잉가? 시악시는 알어?//

육박자 / 함순례
왜 그리 살가운 정만 소복하다냐/ 눈물 흘린 적 많은디/ 구들장 지고 누워 있을 수 없었어야/ 어정뜬 할배가 찝적거려도 까짓거 눈 내리깔고/ 그냥 땅을 돌고 돌았어야// 검정 물들인 뽀글뽀글 파마머리들이/ 요강 같은 궁둥이를 돌리고 있어요// 이른 봄 영감 앞세우고 천지가 허공인 김 할머니/ 늦춤바람으로 울음 받아낸 사연/ 또래 과부 서넛 피차 불편한 몸/ 지루지루 말라붙은 물줄기 잡아 보는데요/ 난 데 없는 밀착으로 몸을 씻는 땅은/ 목축이며 올려다본 하늘은/ 폐경의 구름 열어젖히고 꽃바람/ 꽃바람 불러 들이는데요// 육박자 쿵짝으로 번져오는 아침/ 약수터 긴 물병 저만치/ 잔주름 모으고 엇박자 스텝을 헤아려보는/ 발, 발들이 물봉선 터뜨리고 있어요//

소금수레 / 함순례
물이 참 많기도 하지// 저 손수레/ 거대한 물비린내 빨아들이며 굴러다녔으리/ 선착장에서 민박집으로 민박집에서/ 선착장으로 돌고 돈 세월// 올여름 새로 공들여 쓴 흰색 문패 반짝이며/ 바다는 굽이치고/ 그 절절한 기다림이고 싶어/ 스쳐간 발자국 건져 올리는 걸까// 어젯밤 옆방에 들었던 뱃사내/ 흠집 난 한쪽 귀퉁이 보여주곤 떠났어/ 어딘가 벗겨져 있거나 접혀져 있는 사람들/ 섬에서 하룻잠 지내고 나면 더 잘 보이지/ 섣불리 아는 체 할 순 없지만/ 파도민박 손수레/ 덜컹거리는 두 바퀴로 굴러가고도 싶을 거야// 자동차 한 대 없는 섬 쪽으로/ 갈매기떼 빗금 그으며 몰려오는 저녁 무렵// 곧 배 닿겠다//

술병 무덤 / 함순례
남김없이 증발했네/ 좋을 때 마시자, 차 트렁크에 남몰래 찔러주던/ 처음 손길도 지워졌네/ 반백년 흐르도록 지울 수 없는 육탈의 혈흔을 생각하자면/ 함부로 뚜껑을 열지 못한 것/ 병목에 인쇄되어 비뚤어진 태극기/ 대한의 아들딸로 태어나 길이 보전하지 못한/ 대한(大恨)의 목숨들에게 고수레,/ 차 트렁크 어둠 속에서/ 구겨진 신문과 우산과 슬리퍼 속에서/ 무던히도 흔들리며 애달펐을/ 오래된 병(病)을 묻었네/ 일년 가까이 지그시 제 속을 비워낸/ 한라산, 그 뜨거운 바람도 울컥하여/ 마당가에 쭈그려 앉아 가만/ 가만히 술병을 묻었네//

일곱 살, 우주(宇宙) / 함순례
바람이 들썩이는 호숫가/ 비닐돗자리 손에 든 아이가/ 풀밭으로 걸어간다/ 신발 벗어 한 귀퉁이 두 귀퉁이/ 메고 온 가방 벗어 세 귀퉁이/ 마지막 귀퉁이에 제 몸 내려놓는다// 삼라만상을/ 돗자리에 전부 모셨다//

처서, 저물녘 / 함순례
과일가게 앞 쌍둥이 유모차가 당도했다// 기저귀바람 사내아기는 유모차 손잡이에 닿을까 말까한/ 다리 꼼지락거리며 손가락을 빨다가 사방 휘 둘러보다가/ 웃는 듯 찡그리는 듯// 아래칸 누이는 고갤 접고 곤히 잠들어 있다/ 가들의 젖내에 맥을 못 춘다/ 찬거리 사러 나온 잠자리 꽁지 붉히며 날아든다/ 붓기 채 가시지 않은 새댁은 잇몸을 드러내며 웃는다/ 아가들의 눈빛 하나에,// 수런거리는 골목길 다디달게 불어오는 바람!//

사랑해 / 함순례
이 둥근 말을 이 다정한 말을 왜 누르고 살아야 하지? 말없이도 알아듣고 말없이도 통하면 얼마나 좋아. 모르겠는 걸, 도통 모르겠는 걸 어떡하냔 말이지. 쑥스럽다거나 헤퍼 보인다는 것도 다 꼰대들의 철벽이지. 사랑해사랑해사랑해 호접란에 물을 줄 때마다 속삭였더니 윤기가 도는 이파리 좀 봐. 피어나는 꽃잎을 봐. 그냥 미소가 번지잖아. 웃음이 툭툭 터지잖아. 온몸에 향기가 돌잖아. 사랑해, 라고 말하는 순간 아무것도 아닌 말이 아무것이 되어 마술을 부리게 되지. 역병의 그늘도 뒤집을 수 있는 이 말랑말랑한 말을 이 뜨거운 말을 왜 아끼고 살지? 우연히도 인간이라 불리며 이곳에 있는 너는 나는.//

고양이 집사 / 함순례
저녁이면 마당으로 들어서는 길고양이가 있다/ 하루 일 마치고 퇴근한 가장처럼/ 대추나무 밑에 앉아 느긋한 얼굴로 식구들을 쳐다본다/ 호랑이무늬 연한 갈빛이 곱기도 한 고양이/ 표정도 유순하고 귀여운 녀석// 누군가는 먹이를 주면 절대로 안 된다고 하고/ 누군가는 먹이를 주면 친구도 될 수 있으리라 말한다// 고기 냄새 풍기며 저녁을 차려 먹는 날이면/ 고양이가 야외 테이블 가까이 다가와 우리의 입 쳐다보기도 한다/ 기대하는 눈빛과 망설이는 눈빛이 마주치면/ 고양이는 몇 번씩이나 눈을 감았다가 뜬다// 빈집일 때가 많은 하마실 하얀 집/ 내가 항상 이 집을 지키고 있어//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한 간절한 눈빛/ 어쩌면 이 집은 오래도록 제 집이었는지도 모른다/ 밤마다 길거리 생활에 지친 몸 누이며/ 적막한 집안에 온기를 들이는 고양이// 큰 소리로 쫓아도 고양이는 쉬이 물러서지 않는다/ 녀석의 이름을 당글당글 여문, 대추라고 불러주어야겠다//

기와불사 / 함순례
나의 기도가 저 높은/ 지붕 위나 담장에 올려져/ 고요히 피어오를 줄 알았더니/ 산사 뒤란 샘가에서/ 물받이로 쓰이고 있네./ 세상에나, 조랑조랑/ 맑은 물소리에 씻기며/ 계곡으로, 마을로 낮게/ 흘러가고 있네//

폭포 / 함순례
여기부터 시작이라는 것인가/ 내리꽂히는 황홀함에 길들여져 왔으나/ 물이 뛰어내린 자리에 발 담그며 환호했으나/ 폭포는/ 물의 계단// 폭발하는 바닥의 빛!//

저녁강 / 함순례
살이 그리워// 네 말을 들은 듯 살구가 떨어졌다/ 살구나무가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을까/ 툭 떨어지는 향기// 살고 싶어 싸웠는데 죽지 못해 갈라섰는데/ 문득 그런 때가 있다고/ 전화기 너머/ 가라앉는 목소리가 강물을 적신다/ 너의 강가에 앉은 나도 억새 물결이다// 지금 여기에 없는 당신이/ 뚜벅뚜벅 눈부시게 되살아오는 것/ 사랑과 증오를 넘어선 몸이 몸을 부르는/ 적막이// 시큼했다/ 저녁 강물에 살내가 흘러다녔다//

​고비 7 ㅡ수컷을 다루는 법 / 함순례
검은 개에게/ 곰같이 덩치 큰 짐승에게/ 백허그를 받아 봤습니까/ 난데없이 엉겨붙어 뒷발로는 허벅지를 감싸고/ 앞발로는 온몸 더듬는/ 불끈거리는 발정을 겪어 봤습니까/ 누구는 심장이 쫄아 붙어 미동도 못했는데요/ 누구는 엄마야 기겁하며 소리소리 질렀는데요/ 그 싱싱하고도 험한 발동이/ 게르의 아침을 후끈 달궜는데요/ 내가 좋아? 아, 그래 좋다구?/ 그녀는 담담 태연 녀석의 뒷덜미는 어루만져 주지 멉니까/ 한때 소동이 가라앉고서야/ 우리는 뒤늦게 알아차렸습니다/ 날라리 수컷을 다루는 법을//​

고비 8 ㅡ푸른 늑대 / 함순례
내 애인은 늑대라면 좋겠어/ 암컷과 새끼의 입에 먼저 먹이를 물려주는/ 일생 사랑하는 암컷 한 마리를 위해/ 목숨걸고 싸우는, 그러나 내가 탐하는 건/ 흔들림 없는 그 눈속에 담긴 시푸른 달빛// 그의 암사슴이 되면 어여쁜 새끼도 낳을라나/ 망망한 하늘 망망한 들판/ 맑고 부드럽게 퍼지는/ 어머니의 노래 부르고 싶어// 가죽으로 남아/ 무심한 듯 고비 들판을 지키고 있어도/ 언제든 이빨이 살아나 달려갈 것만 같아/ 야생의 쉼표를 찍는 순간에도/ 표표하게 흐르는 저 근육을 봐/ 온몸이 간지러워// 내 애인이 늑대라면 참 좋겠어/ 세상 무서울 것 없이 짱짱한 고요에 들어/ 드넓은 대지를 품을 수 있을 것 같아//

봄인데 말이야 ㅡ복희 / 함순례
아파서/ 많이 아픈 몸으로 너는 누워 있고/ 간단 없는 통증에 글썽이는 눈 파르르 떨고 있지// 나는 걷고 있지// 성내천변은 거대한 반란지대/ 희고 노란 봄년들이 발칙하게 손을 흔들고/ 재개발아파트 허물어진 얼굴로 그런 봄년들을 멀거니 내려다보는데// 저 무장한 발랄함도 긴 겨울을 건너온 통증이니까/ 아프다는 건 열망이 남아 있다는 거니까// 나는 찬란하게 걷고 있지// 이 도도한 무늬들 온몸에 빨아들이는 거지// 오랜 시간 천천히 낡아간 집이 더디게 새 둥지를 틀 듯/ 거머리가 꿈틀꿈틀 나쁜 피 핥듯// 지금 밖은 온통 새살, 새살 돋아나는 봄인데 말이야/ 병든 살을 도려낸 네 발에 고스란히 이식할 거야/ 너 살아오면//

잠자리 / 함순례
매미 소리 물고 잠자리 날아든다// 장맛비에 물러터진 복숭아처럼 꼭지 잃은 말들이/ 썩어가는 동안 3억 년 이상 아름다운 비행 멈추지 않은/ 널 기다려 왔는지도 모른다// 교정지와 출판사와 제본소 오가는 사이 뜨거운 햇살과/ 내통한 듯 비틀거리던 기억이 난다 짧은 그늘 비껴/ 걸으며 눈빛 붉어지고 입안엔 단내 풍겨나왔다// 여름 물가에서 차례차례 껍질 벗고 오늘 아침 창가에/ 투명한 그물 펼치는 잠자리떼, 내 발목에도 말랑한/ 피가 도는 것이다// 지금 난 겹눈 훔쳐 달고 검붉은 자루 속 빠져나오는/ 중이다​//

장수풍뎅이 / 함순례
그는 갔다/ 장수,라는 이름을 걸었던 생애/ 짧다 하지 말자/ 좁쌀만 한 점으로 나와 애벌애벌 나무 삼키며 견뎠다/ 가까스로 껍질을 벗었다/ 그제야 늠름한 뿔로 암컷에 닻을 내릴 수 있었다/ 그 밤들이 참으로 깊고 후끈했다는 거/ 차마 다 전하지 못하겠다// 그는 돌아, 갔다/ 일찍이 우렁우렁한 목청으로 비바람을 경작했던 아버지처럼/ 수컷의 신화를 남긴 채/ 눈물 한 자락 훔칠 여백조차 지우고 갔다// 잘 가시라/ 잘 사시라// 뿔을 낮춘 그의 뒤란/ 맵고 독하게 홀로 걷는 숲의 어디쯤/ 몸과 영혼이 엎드려 있다//

등신고래들 / 함순례
그래도 당신만은(그들이 당신에게 그러했듯), 사랑해야 하는, 용서해야 하는, 아, 아무렴, 위로해야 하는, 지지리도 못난, 한 때 굵고 검은 지느러미도 휘어진, 저, 등신같은//

아직도 고백중 / 함순례
은희를 사랑했어요 은희 좀 불러줘 술에 취하면 아직도/ 사랑의 역주행 중인 광덕 씨, 밤나무 민박에 들어 불 피우고/ 일각이 지나기 전 대취했다 실제 고속도로에서 역주행하다/ 경찰에 인계된 일도 있었다는데 그날도 십 년 만에 고향/ 친구들 만나고 대취하여 돌아오던 길이라 했다// 웃을 때는 천상 하회탈 형상이나 까무잡잡한 이마에 굵게/ 파인 일자 주름 모으면 한 성깔 다부져 보이는 사내, 그가/ 강력반 형사라고는 차마 말 못하겠다 악착같이 도망가는/ 놈을 잡으려면 내가 그놈보다 더 악착같으면 되거든요/ 그런데 은희는 내겐 좀체 떨리지 않는다는 은희는...../ 난 누굴 떨리게 할 수 있을까요...// 사랑에 유배당한 쓸쓸한 짐승이 컹컹 짖으며 제 살 물어/ 뜯는 밤이면 이십 년 지나도록 고백 중인 사랑이 도진다/ 누구도 못 말리는 깡 촌놈의 사랑//

서해 바다 노을 저편 / 함순례
어린 아이가 바닷물에 흥건히 젖은 채 울고 있다/ 높은 파도에 휩쓸렸는지 두 눈 꼭 감고 다만 공포를 쥐어짜며 울어 젖히는데// 운다는 건/ 울음 밖으로 이끌어 줄 어떤 손길을 기다리는 것/ 그래, 울 때는 저리 악착같이 울어야 한다/ 그러나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할 때 많은 건 눈물을 감출 줄 알아야 어른이라고 배운 때문// 어느 새벽 아무리 해도 멈추지 않는 코피가 서러워 천지가 외로웠을 때처럼 이미 나를 지나간 사랑에 떨며 쏟아놓은 통곡처럼// 이제는 최선을 다해 울고 싶다/ 그 붉은 귀를 열고 들어가면 기쁨이나 슬픔 같은 것, 맹감처럼 떫어져서 둥글어져서 고슬고슬 맑은 뿌리 내릴 것만 같아서//

자정의 작용 / 함순례
웃는 별이 있다/ 우는 별이 있다// 오래 걸어온 자들은 안다/ 광장에 주저앉아 신발을 벗고 부르튼 발 주무르며/ 언제까지 걸어야 하나 혼잣말은 앞으로도/ 첫 마음으로 걸어야 한다는 것/ 거대한 파도에 밀려 헤진 옷/ 훌훌 벗어놓고 등을 말고 잠든/ 순간에도 심장은 뛰고 있어서/ 그것이 슬퍼 웃고/ 그것이 아파 울지 못하는/ 별들이 참 뜨겁고도 서늘하게 반짝인다/ 도시의 우듬지가 별들의 박동을 들으며 출렁이는 시간/ 도시의 파도는 거세고 무거우니/ 어두운 손 뻗어 입을 틀어막는 짐승들아/ 개 같은 날들을 치워라// 우리는 슬프고 아픈 기미 찾아/ 온 마음으로 꿈을 꾼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내일이면 또 별들이 나와/ 생의 스크럼을 짤 것이다//

밥 한번 먹자 / 함순례
네가 차려준 밥상이 아직도 기억에 있어/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너희 집 앞을 지나다 받았던,/ 첫 애기 입덧 내내 네가 비벼준 열무비빔밥 간절했어/ 네 자취방의 아침밥도 잊을 수 없어/ 내가 차렸다는 어린 날의 밥상들이/ 이십 년 만에 나간 동창회 자리에 그들먹하니 차려진다// 외로우니까 밥을 먹었다/ 분노와 절망이 바닥을 칠 때도 배가 고팠다/ 눈물밥을 삼킬 때조차/ 혀끝을 돌려 맛을 기억했다// 밥을 위해 땀을 흘리고/ 밥을 위해 비겁해지고/ 밥을 위해 피 흘리며 싸우고/ 밥을 위해 평화를 기도한 날들/ 오래된 청동거울 같다// 땀을 흘릴 때 누군가 밥을 주었다/ 비겁해질 때 누군가 고봉밥을 퍼주었다/ 피 흘리며 싸우고 온 날/ 휘청거리는 내 손에 쥐어주던 숟가락 있었다/ 먹어도 물리지 않는 사람의 말/ 먹고살 만했졌다지만/ 밥 한번 먹자,는 인사 습성을 버리지 못했다//

무릎을 꿇고 / 함순례
집에서 일하는 도시, 상점도 빗장을 닫아 건 도시/ 사슴 염소 양 얼룩말 캥거루 떼가 거리를 활보한다는 소식/ 전쟁이 그치고 분쟁의 화염이 걷힌다는 소식/ 인간이 일을 멈추자 맑고 푸른 하늘이 열린다는 소식/ 오늘밤도 나는 무릎을 꿇고 하늘의 별을 세어야겠다//

성냥 한 개비 ㅡ코로나19 / 함순례
내 삶의 동선(動線)은 소통과 악수와 정/ 강의와 대화가 일시에 사라졌다/ 눈짓으로 주고받는 모르스 부호의 봄//

오메기떡 / 함순례
꽃바람 타고/ 제주에서 날아온/ 흑임자 오메기떡/ 정겨운 안부// 오래 뵙지 못한/ 엄마 생각에/ 먼 데로 내려앉는/ 시큰한 눈시울//

투명한 고요 / 함순례
카약을 탄 사내가 투명한 고요의 중심부로 노를 저어 가는 동안/ 호숫가 비탈에서는 머위들이 쌉싸름한 향기를 밀어 올렸다/ 살아가는 거야, 푸르고 따듯한 손바닥을 열어 그늘을 감싸고 있었다/ 물결도 덩달아 잎잎들 추어올리며 쟁쟁쟁 피어났다//

강력반 형사에게 시집을 주다 / 함순례
형사는 도둑놈보다 항상 느려유 근데 워떠케 잡냐! 놈이 넘어질 때가 있슈 그런때가 꼭 와유 그 찰나를 낚아채는 거쥬 아, 나도 매일 창작해유 도독놈들의 사연이 좀 구구하고 절절해야 말이쥬 괴발개발 성성하기 짝이 없슈 육하원칙 들이밀고 모나고 찌그러진 것들 어르고 달래고 아주 골치 아파유 조서 쓰다 진이 다 빠지구 머린 허옇게 세쥬 즐거운 고통이라구유? 헛참 어찌 이리 똑같을까 그놈들이 날 먹여 살리니 나도 즐거워유 잡아도 잡아도 도독놈들이 자꾸 생겨나서 일 없어 짤릴 염려도 없지유 어라 형사의 품위가 점점 요상해지네유 시인 말발에 걸려 옴팡 넘어질 뻔했슈 헌데 말이유 그렇게 마주앉아 힘을 쓰다보면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려는 놈들 뒤통수를 탁 치고 싶을 때가 부지기수지만 몇 놈은 참 애잔혀유 발 한번 삐끗하면 주저 앉는게 사람인디 손 잡아줄 만한 내력들이 어찌나 허름한지 눈물이 핑 돌 때도 있슈 나라도 잡아줘야 하나 나도 몰래 손가락이 꼼지락 꼼지락 헌다니께유/ 이건 참말이여유//

거룩한 악수 / 함순례
주차할 곳을 찾아 헤매는 옆집 손님에게/ 집 앞 빈자리 흔쾌히 내어주시는 예수/ 향방이 서툰 뭍것들의 손목 잡으시고/ 마음까지 낚아채시는/ 제주 탑동마을에서 만난 예수/ 저마다 빗장 치느라 바쁠 때/ 홀로 병든 지구를 업고 가는 주름진 예수//

봄날, 라 보떼가 델 아르떼 / 함순례
꽃을 품고 다니는 사람을 만났어 그러니까 봄비 부슬거리는 오후, 봄이 다가오는 소식에 들른 찻집에서였지 오래된 축음기와 전축이 찻집 구석구석을 날름거리는 그래 봄이 오는 노랠 듣고 또 듣고 있는데 아직은 먼 봄빛 거느리고 그가 들어왔어 양귀비꽃 한 아름 싸안고....... 글쎄 신문지에 둘둘 만 꽃을 본 게 얼마 만이더라 말로만 듣던 꽃을 보는 경이로움일까 유리병에 꽂아놓고 이리 보고 저리 보고 있는데 그이 다시 차에 갔다 온 모양 신문지에 둘둘 만 꽃을 내게 안기네 아네모네! 오늘 참 운수 좋은 날이야 그림을 그린다더니 정작 사람을 품고 다니는 사람이었어 당신도 기대해도 좋을 거야 노은 은구비공원 근처 찻집에 가면 전생에 꽃씨 종족이었을 종자 퍼뜨리는 일에 살짝 이쁘게도 미친 그 여자, 혹 만나실지도//

가을 우화 / 함순례
근대영화 세트장 같은 방앗간 문간에 고춧가루 참깨 들깨 다라이가 줄을 선다. 아는 사람이나 찾는 골목 안쪽, 늙은 기계들이 일제히 깨어나 돌기 시작하고 뽀글파마 마스크 부족들은 긴 장마와 태풍을 견디며 살아남은 작물들처럼 옹기종기 모여앉아 왁자하다. 베트남에서 시집 온 안주인이 능숙하게 고추 빻고 기름 짜는 사이 방앗간집 세 남매 웃음. 소리 뛰어다닌다. 그 맑은 소요 가운데서 옆집 안노인도 우두커니 껍질을 벗고 며칠째, 젖은 날개를 말리고 있다.//

저쪽 사원 / 함순례
산길은 무덤을 향하고 있다/ 산책길을 찾아/ 이 길 저 길 더듬어보니 그렇다/ 가격家格에 따라 무덤의 위용과 무덤으로 가는 길도 달랐다/ 사람은 죽어서도 평등하지 않았다/ 나의 후생은 사람 두엇 걸어 들어갈 수 있는/ 숲길 하나 얻는 것일까/ 혼자는 외로우니 두런두런 말 섞으며 걸어가면/ 어떤 슬픔도 측백나무 향처럼 부드러워지겠다/ 잘 죽기 위해 오늘을 사는 것/ 허나 저쪽 세상을 나는 모른다/ 발을 딛지 못하는 허방일까 황홀한 꽃밭일까/ 나는 저쪽 세상의 색깔을 모른다/ 양지바를까 짙푸른 미명일까 암흑천지일까/ 저쪽을 들여다보기에 이쪽은 너무 캄캄하다/ 그러니 저쪽은 가보지 않은 사원이다/ 은은한 경배의 자리다. 다만 때가 되면/ 울지 않고 돌아가는 것/ 그 길은 만날 수도/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걸 어렴풋이 알 뿐이다.//

맛의 처소 / 함순례
물메기가 제철이라 했다/ 촌놈횟집 밥상에 올라온/ 별다른 양념 없이 구들구들하게 쪄낸 물메기찜/ 무르고 연한 살성이/ 처처 맛을 들인 곳간이라는데/ 너무 착해서 바보 같은 당신/ 너무 차가운 당신/ 너무 슬픈 당신/ 사람의 맛도 무수한 '너무'를 넘어서는 일/ 알 수 없는 곳으로 흘러가는 황금의 나라에서/ 때때로 아무 것도 아닌 당신과 내가/ 모자라거나 넘치지 않는/ 부드럽고 찰진 사람의 낯을 간직하기란/ 얼마나 힘든지/ 내 이름에 달라붙은 순할 順/ 이 무구한 업을 시시하다 여기며/ 독하게 몸을 달궈온 날들이 차마 쓸쓸해졌다//

소낙비 / 함순례
빗속에, 빠졌습니다// 짙푸른 틀녘을 걷는 중이었습니다/ 바짓가랑이 치고 들어오는 빗줄기/ 밤송이에서 벗잎에서 땅콩밭에서/ 마구 펄떡거리는 초록을 탐하며 걸었습니다/ 우산이 뒤집히거나 우산을 버린/ 61세의 여자/ 52세의 여자/ 49세의 여자가// 사람의 마을 깊숙이 정자에 들어 두 다릴 뻗고 주저앉거나/ 젖은 치마 걷어 올려 물을 짜내거나/ 빗물 들이치는 난간에 기대어 쏟아지는 흙탕물에/ 넋을 놓을 즈음// 이럴 땐 말이야/ 늠름한 민소매 시골 총각이 물꼬를 보러 나와야 하는데/ 그러면 야 이리 와봐 이뻐해 줄게 해볼 텐데..../ 무서운 여자들입니다/ 무서운 여자들이 무서워 길은 적막하고/ 허름하니 웅크린 지붕들은 갇혀 있고// 찌질한 놈들아 가라, 우산을 접은 여자들이/ 세차게 덤벼들고 싶은 놈을 기다리며/,/ 야담의 촉수를 높이는 동안/ 우리의 몰락은 볼락이 아닙니다/ 소낙비에 기울어진 몸에서도 심장이 파닥거립니다/ 연락 주세요 단, 된 놈 될 놈만 받습니다.//

걸인의 식사 / 함순례
계단참에 하염없이/ 앉아 있는 저 사내/ 했살 따가운 한낮 겹겹 옷을 껴입고 왜 맨발일까/ 커다랗고 거칠고 퉁퉁 부어오른 코끼리 발등/ 시끄러운 소음과 매연 그리고/ 표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저 사내/ 빵집 앞에서 주유소 앞에서 늘/ 어느 모퉁이 길바닥에서/ 거구를 이끌고 느릿느릿/ 걸어가거나 우멍하게 앉아 있는/ 그를 만날 때마다/ 나는 코끼리 한 마리가 도심에 출몰했다고 생각했다/ 아프리카 원시림을 떠났거나 동물원 울타리 부수고 탈출했거나/ 슬며시 이 도시에 나타난/ 그가 뭘 먹는 걸 보지 못했다/ 말하는 걸 듣지 못했다/ 눕거나 조는 것도/ 보지 못했다// 도시는 그의 몸집보다 거대했고/ 그는 이 도시의 완벽한 그림자였다/ 누구에게도 그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그를 포획하러 오지 않았다/ 점점 불어나는 그의 몸이 언젠가는/ 이 도시를 꽉 채우는 집이 될 것이다//

시인의 세금을 면세하라 / 함순례
편집장과 시인 사이에 삼천 원이 오락가락한다 ​시 한 편에/ ​​삼만 원 씩 두 편이면 육만 원인데 왜 오만칠천 ​원이냐/ ​​가난한 시인은 원고료 삼천 원의 행방이 순전히 ​궁금했던/ ​​것이고 미안한 편집장은 원천징수 세금을 메워주고 싶었던/ ​​것인데, 그 실랑이가 가엾기도 하고 어여쁘기도 했는데,/ ​​생각하니 시인에게 세금 물리는 게 가당키나 하냔 말이야/ ​​시인만큼 ​맹목적이고 갸륵한 신앙인이 어디 있겠냐 말이야/ ​제 살 파먹고 피를 말리는 첩첩한 수행자들 낮밤 지독한/ ​슬픔과 연민으로 통성기도 써내려가고 구원 방언 터지며/ ​점점 뜨거워지는 지구별 온몸으로 밀고 가는 종족들,/ 종교계가 면세라면 시인 원고료도 면세다! 면세하라!/ 1인 시위라도 벌이고 싶어졌다.//

6월이 왔다 / 함순례
차고 메마른 먼지바람을 뚫고 왔다/ 천지에 초록이 진동하듯/ 격렬하게 왔다// 그낭 온 거 아니다/ 무심코 온 거 아니다// 진창에 무릎 꿇리고 무참히 짓밟는 어둠의 무리들/ 절망의 벽, 아득한 벼랑 끝에서/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눈물로/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는 분노로/ 일어섰다, 도도한 물길로/ 걷고 또 걸으며/ 억눌린 설움을 토해냈다// 그냥 온 거 아니다/ 피맺힌 함성으로 왔다// 다시 유월,/ 저 푸르른 평화의 바람을 보아라/ 지금 이대로 남북이 가슴을 열고 어제오늘처럼 만나자/ 동강난 세월과 아픔을 넘어서/ 어깨동무 하나 되어/ 온 누리에 우뚝 서자/ 소통과 번영의 힘으로 세계평화의 주인이 되자/ 삼천리 금수강산 우주만방에/ 새로운 역사를 써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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