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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유종인 시인

by 부흐고비 2022. 7. 4.

유종인 시인
1968년 경기도 인천시에서 태어나 시립인천전문대학(현 인천대학교 제물포캠퍼스) 문헌정보학과를 졸업했다. 1996년 《문예중앙》에 시 〈화문석〉 외 9편이 당선되면서 문단에 나왔다. 2002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조부문, 200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부문, 201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부문에 당선되었다. 시집으로 『아껴 먹는 슬픔』, 『교우록』, 『수수밭 전별기』, 『사랑이라는 재촉들』, 『양철지붕을 사야겠다』가 있다. 지훈문학상, 송순문학상, 지리산문학상, 백교문학상 대상 등을 수상하였다.

 



궁합 / 유종인
세상에 나와 맞는 게 정말 있을까/ 때 아닌 걱정을 하게 됐을 때/ 전통 정원 뒤편의 대숲이 눈에 들어찬다/ 바람에 비스듬히 누웠다/ 다시 일어서는 푸르른 마디들/ 뿌리에서부터 마디의 간격은 넓어진다/ 그 중에 내 손 한 뼘에 딱, 맞는/ 대나무 마디도 있으리라/ 나의 한 뼘과 대나무 한 마디의 그 맞춤을/ 수평선이라 부를까/ 지평선이라 부를까/ 하늘과 땅, 하늘과 바다/ 서로 마음이 몸을 포개오는 마중을/ 기다려온 그대여/ 내 말 한 마디에 온 마음이 열리는 속도여/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아무 섭섭할 거 없는 세월의 눈총이여//

정신 병원으로부터 온 편지 / 유종인
가상이 내 몸에 알을 스는 밤, 이다/ 먼 기억엔 따뜻한 정신 병원에 쓸쓸함으로 갇혔던/ 누이가 있다. 그때 그녀는 정신 분열증이었으나/ 나는 정신 미분열증으로 고생하던 청춘, 이었다/ 그래서 지금 생각, 한다 모든/ 病名이 있는 입원은 행복하다 갇혀서/ 따뜻할 수 있는 자들의 夢幻이/ 구름처럼 떠다니다 낮잠에 빠지는 사람들 속에/ 어린 꽃잎 같은 소녀가 남몰래 내 몸에 편지를 숨겼다/ 문득 내 몸은 붉은 우체통이 되었다, 집에/ 전화 연락 한번 해달라 부탁한 그 쪽지엔/ 탈출보다 극심한 폐쇄의 속살이 얼비쳤다// 오래 가지 않을 것이다/ 여기는 온갖 것들의 세상, 그곳으로부터/ 아무런 편지 없을 때, 나는/ 오지랖 좁은 詩들을 쓰며 그대 병동의 밤을/ 가끔 떠올린다. 이곳은 아직 수용되지 않았을 뿐/ 증세를 다 호명할 수 없어 그냥 놔둔 露天병원!/ 따뜻한 간호사가 필요하다, 아직/ 꽃나무들, 먼 새들과 함께 어떤 증세로든 살아있어/ 무릇 야릇한 소음과 정적으로 희망적이다// 누이가 앓고 있는 만큼 소녀가 꿈꾸는 세상만큼/ 세상의 얼굴은 더 늙어 보이고, 늙어서 고치는 것은/ 목숨을 다치는 일뿐, 누군가 아직도 식물의 맘으로/ 동물의 상처를 앓고 있다//

팝콘 / 유종인
손으로 집어먹을 수 있는 꽃,/ 꽃은 열매 속에도 있다// 단단한 씨앗들/ 뜨거움을 벗어버리려고/ 속을 밖으로/ 뒤집어쓰고 있다// 내 마음 진창이라 캄캄했을 때/ 창문 깨고 투신하듯/ 내 맘을 네 속으로 까뒤집어 보인 때/ 꽃이다// 뜨거움을 감출 수 없는 곳에서/ 나는 속을 뒤집었다, 밖이/ 안으로 들어왔다, 안은/ 밖으로 쏟아져나왔다 꽃은/ 견딜수 없는 嘔吐다// 나는 꽃을 집어먹었다//

눈과 개 / 유종인
눈이 오는데/ 나에겐 개가 없다// 함박눈이 오는데 풀어줄 개가 없는 건/ 세상에/ 눈물이 비치는 外道가 없다는 거다// 풀어준 쇠사슬은 시멘트바닥에 쩍쩍 얼어붙어도/ 소나무가 이리저리 허리를 뒤트는/ 지구 저편 언덕까지 돌다오라// 눈밭에 가면/ 개야, 개야, 개야, 개 아닌 게 없는 개야/ 오종종 오종종 개발자국 꽃밭이 한창이다// 개 하나로 성스러운 개야/ 함박눈 허공에 앞발을 높이 쳐드는/ 神命 하나만은 혁명級인 개야/ 네 몸 속의 심장사상충마저 기뻐 날뛰는 개야// 함박눈이 오는데/ 개를 풀어주는 건/ 사랑의 들판이 어디까지인가 꼬리쳐 헤매라는 것// 눈 온 날 천지가 新婚인 개야/ 모든 인간의 악담을 대신 받아 모신/ 눈이 오면 인간의 굴레가 풀리고/ 오직 너 하나만 살린, 오로지 개 하나뿐인 개야//

유하백마도(柳下白馬圖)*를 보다 / 유종인
버드나무는 우듬지가 보이지 않는다./ 치렁치렁한 줄기 가지로 옅은 바람을 탄다/ 흰 말이 곁에 있었지만/ 수양인지 능수인지 모를 버들은 말을 건드리지 않는다// 말은 예민한 짐승, 잘못 건드리면/ 주인도 태우지 않고 먼 들판으로 달아난다/ 거기서 말의 고삐와 안장은/ 들꽃들의 우스갯거리에 불과하다/ 이 흰말에 죽은 말벗을 태우려 했나니 이 흰/ 말의 잔등에 앉아 영원을 달리려 했더니// 버드나무는 고삐도 없이 수백 년 한자리에 묶이고/ 잠시 매인 흰 말은 무료한 투레질로/ 오월 허공에 뜬 버들잎에 허연 침버캐를 묻힌다/ 가만히 버들가지가 말의 허리를 쓸어준다/ 흰 말은 치뜬 눈동자가 고요해지며 제 눈의 호수에/ 버들잎 몇 개를 띄어준다 눈이 없는/ 버드나무는 말의 항문을 잎 끝으로 간질이자, 말은/ 색(色)이 안 든 허공에 뒷발질을 먹인다 허공은 죄가 없으므로/ 멍이 들지 않는다 뼈가 부러지지도 않는다// 주인이 오지 않는 흰 말과 버드나무/ 사이에 능수(能手)와 능란(能爛)의 연리지(連理枝) 고삐 끈이 늘어진다/ 버드나무는 오히려 짐승처럼 징그럽고/ 흰 말은 꽃 핀 오두막처럼 고요하다/ 친연(親緣)의 한나절이 주인을 빼먹은 일로 갸륵하다//
* 유하백마도(柳下白馬圖): 공재 윤두서의 그림. 보물.

촉지도(觸地圖)를 읽다 / 유종인
휠체어 리프트가 선반처럼 올라간 뒤/ 역 계단 손잡이를 가만히 잡아본다/ 사마귀 그점자들이 철판 위에 돋아있다// 사라진 시신경을 손 끝에 모은 사람들,/ 입동(立冬) 근처 허공 중엔 첫눈마저 들끓어서/ 사라진 하늘의 깊이를 맨얼굴로 읽고 있다// 귀청이 찢어지듯 하행선 열차소리,/ 가슴 저 밑바닥에 깔려있는 기억의 레일/ 누군가 밟고 오려고 귓볼이 자꾸 붉어진다// 나무는 죽을 때까지 땅 속을 더듬어가고/ 쉼없이 꺾이는 길을 허방처럼 담은 세상,/ 죄 앞에 눈 못 뜬 날을 철필(鐵筆)로나 적어 볼까// 내안에 읽지 못한 요철(凹凸)덩어리 하나 있어/ 눈귀가 밝던 나도 소스라치게 놀라는 몸,/ 어머니 무덤마저도 통점(痛點)의 지도(地圖)였다//

수묵(水墨) / 유종인
어떤 먹[墨]을 굳게 놔두다가/ 낙타처럼/ 옅게 혹은 짙게 끌어서/ 뚜벅뚜벅 물가에 데려갔지요// 사납고 완고한 칠흑 속에서/ 담묵의 새벽이/ 잠결의 미소로서 나오더군요/ 가려졌던 경물이/ 모서리를 이끌고 번져 나와요// 나의 무지(無知)에도 농담(濃淡)을 드리우죠/ 내가 나를 당신이 당신을/ 그리고 서로의 뺨을/ 오래된 처음처럼 더듬어 번지듯/ 물이 먼저 이끌다 짙은 눈썹 먹[墨]이/ 어깨 겯듯 한 산천을 그려 거닐자 하죠// 방금 나온 꽃들이 옛 생각의 뺨을 물들고 섰어요/ 날랜 새들이 되돌리고 싶은 총알처럼 허공에 박혀 있어요/ 먼 산과 팥알만 한 사람들, 허공에 번진 물소리/ 자유가 옹색해질 때도/ 자유의 물이 좋아요// 칠흑에서 초록의 여름이 갈려 나오죠/ 내줄 수 있을 때까지 내주자고/ 가둘 수 없이 번져보자고/ 다솜은 언제나 연애의 먹을 갈아대지요//

창경(鶬鶊) / 유종인
봄볕이 좋아/ 영혼의 내장까지 환히 비춰질 거 같네/ 거기 전생을 밟고 온/ 징검돌에 이끼가 파르라니 돋아서/ 이젠 머리를 괴고/ 낮잠을 다독이는 석침(石枕)으로 쓰려는데/ 봄볕이 좋아/ 꾀꼬리 소리가 맴도네/ 슬픔까지는 너무 처지고/ 웃음까지는 너무 날래서/ 그냥 한 꾸러미 명랑이 날개를 달았다 싶네/ 그것도 샛노란 판본(板本)을 하고/ 나온 저 허공의 생색(生色)이려니/ 겨우내/ 군동내 나는 허공이 엉덩이로 지긋이 뭉개고/ 주니가 든 앙가슴으로 얼러 내놓은/ 샛노란 명랑이려니 싶네/ 봄볕이 좋아//

솔방울이 거미줄에 걸리듯 / 유종인
솔방울 하나가 거미줄에 걸리듯/ 덩치보다 가벼운 행보,/ 허공에 한 번 맺혀 볼 만한/ 또 다른 미련이/ 또한 열매라서// 자신을 버리러 가다가/ 도리어 자신을 얻는/ 아, 저 호젓한 얽매임// 무당거미는 저 솔방울이 또한 큰 난제라서/ 배고픔 속에 막막한 관망,/ 저 골칫거리를 땅으로 내리면/ 거기 솔방울만한 허방,/ 구멍 숭숭한 비탄을 이끌고 가는 거지// 이 가을에 솔방울만한 얽매임으로/ 가을 거미도 솔방울도 입이 없는 식구,/ 가을이 물려주는 단식의 바람을 쐬다/ 툭, 하고/ 솔가리와 갈잎 위로 몸을 던지면/ 거미와 솔방울이 한통속이다// 솔방울이 거미줄에 걸리듯/ 못 먹을 것들이 던져 주는 한 생각,/ 이제 생을 갈아타야 할 우주의 가을,/ 쓸쓸하니 달달한 생각의 침 고여 오듯//

시와 시레기 / 유종인
초겨울 바람벽에 십자가의 예수보다 자주 시래기가 걸린다. 아랫도리를 칼에 베여 내주고 시퍼런 윗몸만 담벼락에 거니 반그늘에 내걸린 그 쓸쓸한 유명세가 좋다// 욕망이 마르는 게 좋다 몸이 말라 다른 생각이 끼쳐 드는 그 넉넉한 품이 좋다 호주머니가 비는 게 좋다 호주머니에 내 손의 가난한 궁리가 좋다// 설핏한 저녁 햇살에 낡은 벽에 드리운 허깨비 같은 그림자의 흔들림이 좋다/ 무얼 썻다고 시인입네 하는 나보다 한마디 말도 없이 푹 삶아지는 네 적멸이 좋다// 시는 무어라 잘 안 돼도 시래기는 겨울로 마른다 싸락눈 치는 새벽에 혼자 깨어서 벽에다 몸을 비비며 뭐라 적바림하듯 끄적일 때 아침이 물으면, 바스라지는 입마저 꾹 다물고 마르는 네가 좋다//

시비(詩碑)를 멀리하다 / 유종인
공원 잔디밭 안에 커다란 빚돌이 서 있어/ 거기 뭐라뭐라 새긴 시구(詩句)들인데/ 마음에 들어 차지 않고 자꾸 흘러만 진다./ 죽은 시인은 이 말들에 얼마나 피가 말랐기에/ 이 덩치 큰 바윗덩이에 치도곤을 놓듯/ 영원히 기억하라고 새겨놓은 눈치다/ 각인(角印)의 눈치가 역력하다 보니/ 나는, 저 빛돌에 팬 시구에서 자꾸 물러난다/ 얼마를 그렇게 물러나 바라보니/ 눈에 아물거리던 시구마저 사라지고/ 온전히, 한 덩어리의 미현하고 착해빠진/ 흉터 하나 없는 바위가 곰처럼 앞발을 들고 서 있다/ 이리 와, 다시 내 등에 업히라는 듯//

교우록 / 유종인
눈이 내렸다/ 어둠 속에서/ 말 못할 것들이 흩날렸다// 내리는 눈은/ 친구가 아니라서/ 바닥에 쌓이거나/ 행인의 발길에 밟힐 것이다// 내리는 눈 속에서/ 눈을 치우는 사람들이/ 문밖에 나와 있다// 호랑이 한 마리 나타나 울부짖으면/ 내린 눈들이 화들짝 놀라/ 하늘 속으로 눈 내리러/ 다시 올라갈 것만 같았다// 친구는, 내려오는 친구는/ 저렇게 하얗고 속절없이 많아도/ 다 내가 더럽혀야 할 눈이었다// 내리지 않는 눈이/ 가장 순수한, 착한 눈이었다/ 친구는/ 죽은 친구가, 아직 만나지 않은 친구가/ 제일 좋은 친구다// 이미 치워진 눈과/ 치워진 눈 위에 밤을 세워 내리는 눈과/ 이미 눈 녹은 물로 내 신발을 적시는 눈과/ 눈을 뭉치며 달아나는 친구의 뒤통수에 정확히 박히는 눈과/ 말없이 뒤란 그늘 속으로 숨어드는 눈과 함께/ 친구는, 죽은 친구가 제일 착한 친구였다//

저수지에 빠진 의자 / 유종인
낡고 다리가 부러진 나무의자가/ 저수지 푸른 물 속에 빠져 있었다/ 평생 누군가의 뒷모습만 보아온 날들을/ 살얼음 끼는 물 속에 헹궈버리고 싶었다// 다리를 부러뜨려서/ 온몸을 물 속에 던졌던 것이다/ 물 속에라도 누워 뒷모습을 챙기고 싶었다// 의자가 물 속에 든 날부터/ 물들도 제 가만한 흐름으로/ 등을 기대며 앉기 시작했다/ 물은 누워서 흐르는 게 아니라/ 제 깊이만큼의 침묵으로 출렁이며/ 서서 흐르고 있었다// 허리 아픈 물줄기가 등받이에 기대자/ 물수제비를 뜨던 하늘이/ 슬몃 건너편 산을 데려와 앉히기 시작했다// 제 울음에 기댈 수밖에 없는/ 다리가 부러진 의자에/ 둥지인 양 물고기들이 서서히 모여들었다//


됫박 / 유종인
어느 날 화단에 버려진 낡은 됫박 하날 주웠지요/ 모서리가 깨지고 옆구리가 터진 걸/ 겨우 철사로 옭아매 썼던 날도 한참인 듯했지요/ 나는 눈에 익은 이 옹색한 애물을 가만 주워들었지요/ 사월의 화단은/ 야단을 맞고 쫓겨나온 꽃들의 주둥이가 댓발인데/ 허술한 됫박은 아직도 뱃구레가 홀쭉했지요/ 도둑고양이도 거들떠보지 않는 이 가난을/ 나무는 제 몸을 내줄 때 얼마나 마뜩치 않았을까요/ 그러나 사월의 됫박을 들고 오월의 꽃밭에 들어섰을 때/ 나는 이 낡은 오지랖도/ 볼우물이 터지도록 인심을 옮겨 담던 선량(善良)인 걸 떠올렸지요/ 허술하고 미욱한 대로/ 계절을 놓친 봄꽃들은 아직 이마가 뜨거웠기에/ 그 화사한 절명(絶命)을 고봉으로 주워 담아 반그늘에 부려주고요/ 어느 날은, 느닷없는 천뢰(天?)의 말씀인 우박을 퍼 담아/ 겨울을 모르는 꽃밭 귀퉁이에 구메밥처럼 넣어주고요/ 연못의 금붕어들에게 천천히 녹여먹으라 생색을 냈지요/ 허술한 대로 이 몸 한 됫박한테도/ 여독이 생기는 뿌듯한 하루였지요//

봄의 강가 / 유종인
언젯적 곡두라는 말 새로 들으니/ 귀신이란 말 군동내가 나/ 샛강 가 바위 밑에/ 숨어 살라 했지, 이즈음// 영구치가 치받아 가만히 유치(幼齒)가 흔들리는/ 딸애가 둘, 그 두 딸에/ 눈독이 지긋한/ 아내가/ 하나,/ 한나절 춘란(春蘭)의 고백 같은 꽃대의 가만한 졸음 곁에/ 슬픔의 데릴사위 같은 내가/ 서넛,// 봄이 거위영장처럼 다니러 오는/ 강가에 서면/ 혁명이나 팔자거나 숙명이나 간에/ 모두/ 눈이 흐려오는 앞 강물을 뒷강물이 지긋이 밀어내듯이// 맹목(盲目)도 사랑의 쪽매이었지/ 그걸 깨우칠 듯 봄이 와선/ 귀류(鬼柳)라 불리던 저 수양버들 치렁한 가지에/ 슬쩍살짝 뺨을 맞고 선/ 뇟보 같은 나도 있다니// 그러면, 딴청 피우듯/ 딴청을 따돌리고/ 다시 흘러오는 물살의 눈매와/ 늙으나 고운 사랑의 아득한 눈매도/ 뺨에 스치는 버들잎처럼 갈마들어 오겠지//

봄날 / 유종인
봄이 왔다, 실성한 눈빛에 새잎이 돋았다/ 누이는 새롭게 미칠 각오인 듯 마음만 달떴다/ 한낮이었다, 대낮에 어머니가 촛불을 켜면/ 봄 낯은 조금 초라해져 구석에 가 박혔다/ 꽃들은 사생아처럼 시드는 척 입술을 비틀었다// 어제는 어느 무덤이 다 가라앉아 꽃들이 활짝/ 하늘을 상속받았다 애비 에미 없는 꽃들이/ 무성한 혀처럼 잎들을 뒤에 감추고 먼저/ 잎을 내민 나무는 꽃이 안 피면 어쩌나/ 어머니처럼 잔바람에도 잔가지 흔들며 성호(聖號)부터 그었다// 겨울 나면 여름이 오지 않고 봄이 왔다고/ 아버지는 환난(患難)의 총채를 들어/ 먼지의 자식들을 탁탁 소리내어 털었다/ 뿔뿔이 흩어지거라 흩어져 꽃피는 죽음을/ 잎새로 오래 감추며 살아라// 누이는, 당신과 내가 만난 하느님,/ 수녀원에서 쫓겨난 정신분열증의 하느님이었다!/ 하느님을 미워하다 그 활짝 핀 누이의 하느님이/ 발광(發狂)의 그 말없는 봄이 전부였다. 개들은/ 지친 겨울을 털갈이했다 죽을 놈들은 여름까지 가지를 뻗치고/ 살 놈은 왠지 서둘러 봄을 넘기지 않았다/ 노란 장다리꽃들이 내 성욕의 아랫도리에서 흔들릴 때/ 비명처럼 새들이 날아왔으나, 뽑힌 깃털보다 고요한 것은/ 이 세상에 없었다// 살아가면, 봄날은 누이의 발광(發狂)처럼 흔했다/ 함부로 사랑해도, 겨울이 오면 봄은 더 멀었다/ 봄이 와서야 길들도 질척이며 아랫도리를 열었다/ 또 밤새 발자국들이 얼었다 사라졌다//

가을은 / 유종인
전생(前生)의 빚쟁이들이 소낙비로 다녀간 뒤/ 내 빚이 무엇인가/ 두꺼비에 물어보면/ 이놈은 소름만 키워서/ 잠든 돌에/ 비게질이다// 단풍은 매일 조금씩 구간(舊刊)에서 신간(新刊)으로/ 한 몸을 여러 몸으로 물불을 갈마드는데/ 이 몸은/ 어느 춤에 홀려/ 병든 피를/ 씻기려나// 추녀 밑에 바래 놔둔 춘란 잎을 어루나니/ 서늘타, 그 잎 촉(燭)들!/ 샛강 물도 서늘했겠다/ 막걸리 몇 말을 풀어서/ 적막 강심(江心)을/ 달래야겠다//

산 먹이 / 유종인
알바 문제로 아내와 딸의 언성이 높아지자 아내가 뜨던 밥을 개수대에 쓸어 버리고/ 방으로 들어가니 딸마저 몇 술 먹던 밥을 덩달아 개수대에 버리고 제 방으로 들어갔다/ 아내와 딸애의 밥이 개수대에서 만나는 뜨악한 일요일 아침이다// 한낮이 되고 나는 개수대에 버려진 모녀의 밥을 비닐에 담아 집을 나섰다/ 터질까 봐 흰 비닐의 밥을 검은 비닐로 한 번 더 싸서 산자락에 갔다/ 질퍽해진 산길을 벗어나 가방의 비닐을 풀어 놓는다/ 늦겨울 햇살이 비치는 산그늘에 마파두부 덮밥을 내려놓는다/ 이 산의 누군지는 몰라도/ 내 딸과 아내가 다투고 남은 문제로 누군지 모르는 너희가/ 마파두부 덮밥을 먹게 되니 축하한다/ 마음이 상해 입맛이 놓아 버린 그 붉은 마파두부 덮밥으로/ 산중에 뱃구레가 훌쭉해진 너희가 다시/ 침샘이 돌고 입맛이 돌아오니 축하한다/ 축하한다 나는 잠시 입맛이 떨어진 식구들 때문에/ 이 궁색한 산 먹이를 너희에게 돌리니/ 미안하지만 축하한다//

나비물 / 유종인
박수소리를 듣는다 그 수도가 박힌 마당은/ 수도꼭지를 틀 때마다 콸콸콸 물의 박수를 쳐준다/ 꾸지람을 듣고 온 날에도 그늘이 없는 박수소리에/ 손을 담그고 저녁별을 바라는 일은 늡늡했다/ 그런 천연의 박수가 담긴 대얏물에 아버지가 세수를 하면/ 살비듬이 뜬 그 물에 할머니가 발을 닦으셨다/ 발등의 저승꽃에도 물을 줘야지/ 그런 발 닦은 물조차 그냥 버려지지 않는다/ 한 번 박수를 부은 물의 기운을/ 채송화 봉선화 사루비아 눈치 보는 바랭이풀 잡초까지 물너울을 씌워주고도/ 박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반쯤을 남긴/ 세숫대야 물을 내게 들려 손님을 맞듯 대문을 여신다/ 뿌리거라, 길이 팍팍해서야 되겠냐/ 흙꽃*에게도 물을 줘야지/ 최대한 물의 보자기를 펼치듯 헹가래를 치는 물/ 마지막 박수는 이렇게 들뜬 흙먼지를 넓게 가라앉히는 일,/ 수도꼭지가 박수쳐서 보낸 물의 여행은/ 아직도 할머니 발등을 적시고 유전(流轉)하는 박수소리로/ 길을 떠나 사루비아 달콤한 핏빛에도 스며뒀으니/ 실수하고도 박수를 받으면/ 언젠가 갸륵한 일들로 재장구쳐오는 날도 있으리라/ 끝없이 마음의 꿀을 물어오는 저 물의 호접(蝴蝶)은/ 어느 근심의 그늘 밑에 두어도 내내 환하다//
* 흙꽃: 흙먼지의 방언
* 제9회 천강문학상 대상 수상작

아직 태어나지 않은 시인을 위한 파반느 / 유종인
백발의 저 노인은 백 년 전도 백발 같아/ 앞서 가 뒤돌아보니 자작나무 풍채인 게/ 거뭇한 옹이 마디에/ 웅숭깊은 눈을 떴네// 공중의 어느 좌표에 화장실을 세워놓고/ 새들은 꼭 그 자리서 뒷일을 보는갑다/ 흰 새똥 뒤집어쓴 바위가/ 천년 가는 혼수(婚需)같네// 잎새가 죽은 난과 새 촉이 돋는 난(蘭)은/ 한 바람에 다른 결로 햇빛 속을 갈마들며/ 터 잡은 고요의 심지에/ 수결(手決)하듯 꽃을 버네// 남녘의 섬 한 귀퉁이 나를 번질 터가 있어/ 독필(禿筆)의 그 날까지 번민을 받자 하니/ 툇마루 볕 바른 자리에/ 선지(宣紙) 펴는 댓잎 소리// 야자수와 소나무가 쪽동백을 아우 삼듯/ 까마귀와 갈매기가 청보리밭 답청하듯/ 숨탄것 지상의 한 걸음씩/ 몸을 내는 얼이 있네//

월척 / 유종인
올봄에는 무엇이나 이 눈물겨움이 월척일세/ 어미 몸을 먹고 자란 거미 새끼도 월척이고/ 우주의 모래알 같은/ 외사랑도 월척일세//

안경을 바라보며 / 유종인
벗어놓은 안경은 골똘함이 직업 같다/ 거실에 놓였어도 광야를 내다보듯/ 은애(恩愛)의 훤칠한 시력을/ 불러보는 침묵 같네// 인간을 벗었으니 누가 쓰면 마뜩한가/ 섬잣나무 등걸이나 고물이 된 자전거에/ 아니면 외눈박이 고양이/ 그대 한번 써볼 텐가// 스러지는 향기한테 콧등 높여 씌워보면/ 주니가 든 시문(詩文)한테 훈김처럼 씌운다면/ 백리향 만리향이 번질까/ 송뢰(松籟) 품은 애체(靉靆)여//

답청(踏靑) / 유종인
1// 맨발로 밟고 가자/ 바람을 밟고 가자// 피를 좀 흘려보자 초록을 좀 눌러보자// 헌혈차/ 문을 밀고서/ 겨울 피를// 봄에/ 주자//
2// 들판은 연둣빛 들판/ 돌아올 땐 초록 들판// 외딴 것들/ 빈손에는/ 연애담이 풀물 들어// 지구에/ 또 사랑이 걸린다/ 짙어가자/ 마음이여//
3// 비천한 듯 고고한 듯 가난한 듯 소슬한 듯// 그러나 품고 넘자/ 거리의 소산일랑,// 맨발로 달려가 맞자/ 천둥 치는/ 천기(天機)의 들//

 

마음 / 유종인
하루는 눈물 글썽한 상거지가 다녀갔다/ 또 하루는 꽃도 없이 바위가 그늘졌다/ 오늘은 술이나 받게/ 죽통(竹桶)처럼/ 비었다//

 

별서(別墅)를 찾아서 / 유종인
지병을 애첩 삼아도/ 독필(禿筆) 하나 쥘 힘 있어/ 산닭의 피를 찍어 대숲 소리를 베껴쓰다/ 댓돌에 고인 빗물이/ 필세(筆洗)인양/ 오랜 문밖/ 들국화를 따다 말려/ 차향으로 피워내고/ 겨울엔 봄을 믿고/ 봄에는 환생을 믿어/ 기왓골/ 와송을 따서 병든 몸에게 부친다//

 

겨울 당나귀에서 봄 당나귀에게로 / 유종인
건초가 허밍이면 생초는 육성일 게다 샛강의 너테들이 얼금덜금 풀려갈 때 해묵은 봇짐이 쏠리던 너덜겅이 떠오르네/ 금이 간 김장독을 파내어 깨쳐서는 햇빛 속에 사금파리 마방진을 펼쳐놓고 군동내 나던 말들은 햇것으로 맞춰보네/ 방울도 다시 차고 시샘도 다시 고르고 술독에 용수 박고 새로 뜬 됫병 술을 새 주인 봄의 안장에 곁두리로 매달리네/ 솟구치는 목청들과 꺼져가는 탄식들. 근심이 사는 마을과 꽃들의 들판 지나 해거름 발목이 접질려 시의 마을에 들겠네//


흘림체 / 유종인
눈꺼풀 내리면/ 깜박 저녁이 밤으로 머릴 디밀 것 같은 때/ 아까워라/ 도로 아까워서 저녁 하늘을 보느니// 저 눈썹이 짙어진 하늘 가에/ 기러기 떼인가 청둥오리 떼인가/ 멀고 어둑해서 어느 것이어도 틀리지 않는 새 떼들/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채찍처럼/ 제 무리를 휘갈겨 간다// 어디 한 번 내 허리에 아주 헐렁하게 감아 보고도 싶은/ 흘림체의 허리띠가/ 조였다 풀었다/ 내둘렀다 감았다/ 으늑한 운필(運筆)이 낙락한데// 저 반가운 울음이 섞인/ 흘림체가 번지듯 내려앉은 곳,// 거기 들판이나 샛강 가에 가며는/ 등 따신 햇빛을 쬐며 부리로 땅에 점자(點字)할 새 떼들,/ 그 흘림체가 모이 쪼는 곁에/ 나는 바람의 먹〔墨〕을 가는 나무로나 서 있을까/ 무엇을 쓰든 사랑의/ 허기를 면하는 길로/ 발길이 번지는 흘림체들//

점심엔 국수 ㅡ김충규 시인 / 유종인
풋것의 연애 같은 걸/ 가슴에 삶고 싶은 날,// 저 들판에 남은 숫눈을 한 냄비/ 가스 불 위에 얹고는// 유리창 밖을 자주 내다본다/ 먼저 간 친구/ 한 그릇 말아 줄 거네// 나는 가만히 손이 크다/ 가난만큼 손이 큰 내가/ 삶는 흰 국수사리, 불지 않게/ 찬물에 손이 발개지도록 헹궈둔/ 사리 한 그릇// 그대가 와야 부어줄 육수(肉水)를/ 전적으로 네 몫의 허기를/ 내가 달랜다// 못 먹는 술도 한 잔/ 큰 사기잔에/ 부어주리// 큰길 버리고 들길로 나가듯/ 사소한 연애마저 뿌리친 그대,/ 숨 트여 다시 오라, 어여 먹게/ 후루룩거리는 네 입소리에/ 내 귀가 젖고픈/ 한낮의 어스름이네//

탑 / 유종인
새벽에 상가 골목을 걸었다/ 하얀 플라스틱 의자 열댓 개가/ 층층이 포개진 채/ 굵은 쇠사들에 묶여 있었다// 의자 위에 의자가 앉아 있고/ 의자 위에 앉은 의자 위에 또 다른 의자가/ 앉아 있는 꼴이 계속 높아진다// 의자가 제 안에 의자를 앉히는 것보다/ 사람이 제 안에 사람을 품는 것이 아득해서/ 새벽에 몰래 잠든 딸애를 안아본다/ 오래도록 빈 둥지였구나// 마음을 비우는 것보다/ 마음을 채우는 것이 더 어려워/ 빈 의자나 상수리나무 빈 둥지를 볼 때면/ 하나같이 껍질처럼 포개버리기 일쑤였다/ 그래/ 비어 있는 것을 비어 있는 다른 것으로/ 끝없이 포개버리면 그 끝에/ 제일 처음 이슬 맞으며 마지막 포개지는/ 플라스틱 의자 위에 너무 많이/ 사람들을 포기해온 하느님의/ 하늘이 엉덩이를 내릴지 모른다//

돌베개 / 유종인
중국산 큰 낙관석(落款石)엔 해태가 종뉴(鐘뉴)처럼 솟았어도/ 나는 이걸 바라보는 도장으로나 곁에 두었다// 너무 큰 도장이라서 마냥 쓸모를 모르겠어도 좋겠거니/ 얼룩이 박힌 옥돌이라 가만히 모로 눕혀볼 때도 재밌다// 세로로 긴 이 놈을 가로로 눕혀놓자 짐짓 베개 같았다/ 때는 바야흐로 모기 눈에 핏발이 서는 여름이었다// 그때 내 머리는 벌써 이 석물을 가만히 베고는/ 묵묵하고 소슬한 이 고답(高踏)을 내 뒷배로 삼았다// 가끔 이 돌덩이를 베고 꾀꼬리 노란 울음이 날래구나/ 혼자 낮 잠꼬대를 하고 싶은 날도 있었다// 겨울에는 물렀다가 여름에 찬 베개를 뒷목에 받치니/ 서늘해지는 기꺼움에 돌에게 고향이 어디냐 묻는 거였다// 아득함이 고향이고 먹먹함이 그 고향 동구(洞口)라오/ 돌베개는 어쩌면 내 뒷통수 와 뒷목에 찍는 낙관(落款) 같았다// 이 신선한 단단한 낙관석이 돌베개로 오지랖을 넓히듯/ 그대 졸은이 사랑홉다 싶을 때 내 왼팔이 팔베개로 번지는 것이다//

신발 베개 / 유종인
1// 다리가 아팠다/ 숲길에는/ 버력돌이 닳고 닳은 이마를 보여주어도,/ 나는 한 숨 고요의 丹靑 같은/ 낮잠을 얻기로,// 걸어온, 신발 밑창을 서로 대면하듯 맞붙여 베고는/ 귀에 걸리는/ 냄새의 野史를 열 개의 발가락보다 더/ 많이 귓바퀴에 걸어보는 것인데//
2// 멀리/ 당신이,/ 아주 머얼리 가신다 했을 때/ 그 신발들을/ 나는 蛇足인냥 그러모아 태웠으니// 어머니발가락 냄새/ 아버지발꼬락 냄새/ 당신, 발바닥에 어린 내 발바닥 맞춰보며 웃던 일/ 있었는가 몰라도// 풀밭 지나 너덜 지나/ 신발을 베고 누우면/ 뒷목에 차오르는/ 먼저 간 신발들의/ 낮은 말소리//

부추전 / 유종인
삼월 삼일날 부추전을 부친 건/ 어느 혁명의 소사(小史)에도 없는 일,/ 그럼에도 당신은/ 오후 4시와 5시 사이에/ 이 심심한 거사를 부쳐내서는/ 희고 큰 한 접시 우주에 담아 내놓는구려// 야생의 풋것들을 대신하듯/ 아마 비늘의 궁전에서 모든 아랫도리가 칼을 받아 나온 것들이/ 이렇게 호주산 밀가루에 버무려/ 거뭇거뭇 탄 데도 훈장처럼 갖추고 나온 것이/ 오늘 하루/ 글이 없는 나를 은근한 사람으로 부추기는구려// 당신과 마주 앉아 침묵이 더 자주/ 젓가락질로 전(煎)을 찢어내는 사이,/ 세상은 그만큼이나 갈라졌던 국경을 붙여/ 조금씩 너른 나라로 나아갈 일은 없는가/ 나는 부추전을 찢어 먹으며 홀로 생각하는구려// 더 시들기 전에 어떻게든 구워낸 부추전,/ 더 파장(罷場)에 들기 전에/ 마음은 선뜻 어떤 연애의 초록을 뜨겁게 굽자고/ 방금 옆자리에서 내 영혼과 뺨에/ 불의 입술을 맞추고 간 전생이/ 혹 마주앉은 당신인가 하고/ 당신의 이마에 눈총을 줘보는구려//

불탄 집 / 유종인
사람은 빠져나왔어도/ 아직 거기/ 치솟는 불길에 놀란 혼(魂) 같은/ 제 소름에 겨워 헐떡이는 숨결,/ 광야로 달음박질치는 가슴을/ 시커먼 기둥 뒤에 등짝을 기대고 가누고 있나// 한 집안의 내력을/ 활활 불태워 자서전을 써내고서야/ 사라지는 불안증들이 저 안에 있겠다/ 불꽃이 이리저리 옮겨 붙는 내력들/ 무너지는 기억의 서까래와 헛말처럼 내려앉는 천장,/ 화려한 치장의 사연을 그을려버린 벽체여// 들고나는 발걸음을 일시에 뚝 끊고/ 터져버린 유리창 너머로/ 새벽이슬이 기웃거린 뒤 우주의/ 낭인(浪人) 하나가 꽃베개를 들고 들어가/ 한숨 잘 주무시고 가는 뒤꽁무니는 다디달다/ 자물쇠를 물리친 시커먼 동굴 한 마리한테/ 수양벚나무 하나가/ 겨울인데도 화사한 슬픔으로 꽃가지 넣는다// 뭘 모르는 바람은/ 거기 새삼 불 냄새를 맡겠다고 들어가/ 코밑이 새카매져 나온다/ 그을음으로/ 콧수염을 그리고 나온 바람은/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농담하는 버릇이 생겼다/ 바람 잡는다는 말이 그 농담의 시초처럼 분다//

수박 / 유종인
삼천 원짜리 작은 수박덩이를 들고 땀을 닦기 전 거짓말처럼 몇 번 수박을 두드렸지만, 난 아무것도 모른다 어떤 대답도 거부하는 수박의 울림, 속을 보지 않는 말, 말을 드러내지 않는 빛깔, 자르면 붉은 잇몸 같은 속이 검은 來生의 씨앗들 어서 가져가라, 어서 가져가라, 촘촘히 박혀 있을 게다. 자랄 수 없는 바닥에 퉤 퉤 뱉어지는, 숨막히게 더운 여름 날, 까만 수박 씨앗들 검은 파리떼만도 못하리라, 한 끝 유쾌한 단맛이 끝난 뒤에 저렇듯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아도 되는 生을 수박씨들은 감추고, 먼 곳에서 우레가 돋는 먹장구름의 뒤꼍에서 나는 물찌똥을 누고 푸른 죄의 싹을 틔우러 예까지 흘러왔다 지루한 낮꿈의 장마를 건너리라// 아내의 배가 자꾸 불러온다. 老産의 배에 검푸른 줄을 긋듯 내 은밀한 손길이 뱀처럼 쓰다듬는 한낮, 아내는 거꾸로 들어선 아이 걱정에 시퍼런 메스같은 부엌칼을 자꾸 내게 내미는지 모른다 수박은 몇 개월 째에서 배를 가르려고 이승에 나온 것일까//

사마귀와 놀다 / 유종인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마당엔/ 당신이 붙들고 섰던 오랜 목련나무마저 잘렸다/ 햇빛이 푸짐해졌던 걸까 잘린 둥치 근처에/ 이듬해 비비추 잎사귀가 무성해지고/ 여름 허공에 꽃대를 밀어올리는 비비추/ 여린 속잎에 가만히 사마귀 새끼가 기어오른다/ 악수를 건네듯 새끼손가락을 내밀어 나는/ 놈에게 벌써 秋波를 던지는 것이다 자기를 죽이고/ 숨을 죽이자 눈길은 이내 그윽해졌다 누구나/ 제 어미를 잡아먹고 크지 않은 새끼가 어딨겠는가/ 肉食의 탁월한 몸짓은/ 오늘도 내일도 그 너머 기일게 구불거리는/ 시간의 창자를 지구 몇 바퀴라도 감고 있으니,/ 내 어미 내가 잡아먹었고 그 어미 힘겨워 손 짚던/ 키 큰 목련나무 그늘이/ 오늘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애써/ 그 자리로 쏟아지는 햇살의 등골을 이고 나는/ 어린 사마귀와 수작을 부리며 마음을 어루나니/ 내 몫의 먹성도 누굴 또 먹여 살리는 自害의 아름다움!/ 그 그늘에 향기를 파는 꽃대를 부여잡고/ 사마귀 벌써부터 앞다리를 펼쳐 당랑권螳螂拳의/ 풀빛 사냥을 내게 드리우나니, 배고픈 놈들은/ 배고픈 놈들과 함께 제 어미를 불렀으나/ 그 어미 제 영혼의 뱃속에 들어찬 뼈와 살로/ 힘차게 죽어져 되살아나고 있으니, 사마귀야/ 대체 어미란 어미들은/ 이 땅에 잡아먹히려 울다 웃다 가는/ 눈물겨운 等身들이 아니었더냐, 갸웃 외고개를 틀며/ 어떤 향기로 죽음을 부를까 즐거이/ 고민하는 너와 나에게,//

잉어 / 유종인
잉어 보러 가야지/ 가만히 혼잣말을 하면/ 허공에 지느러미가 돋고 바람의 입꼬리에 잉어수염을 다는 말,/ 잉어,/ 잉어 만나러 가자// 늦잠에 어질러진 이불을 개키고/ 지난밤 듣그럽던 소리들마저 개키고/ 잉어한테 가자/ 잉어 수염 당기러 가자// 막내딸/ 여드름이 이쁜 막내딸 사춘기와 손잡고/ 서늘바람에/ 건빵바지에 진짜 건빵 한 봉지씩 차고/ 잉어한테/ 물면의 고요한 서커스를 보러 가자/ 수염은 언제 그렇게 길렀느냐고/ 농담도 진담도 반쯤 풀린 물빛,/ 시장기는 그 절반쯤 풀고// 잉어 보러 가자/ 여름내 가물었던 물빛을 보러/ 오늘은 신발에 쇠징이라도 박은 듯/ 절그럭절그럭 시멘트길 걸어가는 생색이 좋고,/ 잉어는 물밖에 수염 내고/ 허공에 입을 맞추는데/ 딸아, 너도 수염 날 때까지 그리운 것을 살아서/ 어느 날 나처럼 네 딸아들에게/ 물가로 잉어 할아버지 보러 가자해라/ 나더러 언제 하늘 돌아 호수에 들었냐/ 배고픈 눈물 그렁할 때 번데기 던지며 물어보라 해라//

바람을 마시다 / 유종인
한 나무는 붉었고 한 나무는 노랗다/ 소나무 그늘의 바위는 서늘해지며/ 돌아갈 곳 없는 곳으로 돌아가느니/ 어쩌면 다시 꽁꽁 여밀 내면을 가져보느냐// 한 자락, 영혼을 한 자락 허공에서 끌어내려/ 나는 바람으로 마신다// 바람 속의 광야와 바다와 무한의 눈빛을/ 사창골목의 한낮 적막과 봉쇄수도원의 뒤뜰 햇살을/ 그대의 겨드랑이와 나의 사타구니를/ 천민 가을의 눈물과 귀족 겨울의 웃음을/ 죽은 고양이의 수염과 뛰노는 개들의 꽁무니를/ 아무래도 오늘은 긴 한숨으로 사랑의 등을 떠밀어 보느니// 어제는 술이 깊었으니 오늘은 바람을 한 잔 해야겠다/ 내가 산자락에서 흉곽 깊이 받아 마신 바람을/ 그대는 어느 날에 받들고 다시 내게 돌린 잔이었는가/ 양명하고 쓸쓸한 놀음이여/ 천지에 가득한 숨결을 가득 비우고 또 마시는/ 이 몸으로 걸어가는 잔(盞)에/ 또 한 잔 받으라고 직박구리가 날고 느티 나뭇잎이 내 어깨를 친다// 햇빛 속에 총총한 파밭이여/ 파밭 너머 강이 바다에 마악 가슴을 들이밀 때의/ 그 가만한 소용돌이를 그 떨리는 바람의 입술을/ 나는 마신다//

기침소리 / 유종인
쓸쓸한 낮거리 얘기란다/ 그가, 한낮의 사창가를 거닐다가, 잡혀 들어가듯/ 한낮에도 밤인 그녀의 방, 배 위에 배를 얹고/ 아랫도리를 놀리던 순간, 신음소리 뒤에/ 억눌린 잔기침 소리가 간간이 올라오더란다/ 섹스가 집중이 아니 되더란다 아랫사람의/ 잔기침 소리가 자꾸만 귀청을 밟아와/ 무슨 꾸지람처럼 사내의 몸으로 전해오더란다/ 그녀의 배는 어느 순간 사라지고 저 혼자/ 지구라는 땅별하고 훌레붙고 있는 것 같아/ 말없이 땀 흘리며 외로워지더란다/ 잔기침 소리를 지우려 더욱더 거짓 신음소리가/ 애쓰듯 기침 사이사이에 피어나더란다/ 일 마치고 환환 대명천지에 드러나 보이는/ 유곽이, 폐가된 꽃 대궐 같더란다 기침소리/ 온몸으로 전해 듣고 나오니/ 花代가 아니라 약값을 주고 나온 것 같더란다/ 어느새 봄꽃들 다 범하듯 덮어버린 초록 잎새들만/ 바람에 가랑이 벌렸다 오므리는 그 사이로/ 밭은기침을 내보내던 앙상한 그녀의 아랫도리 같은/ 묵은 줄기가지가 못 볼 것처럼 자꾸 눈에 밟히더란다//

방석집 / 유종인
아득하지만 그때 방석집은/ 젓가락 장단과 가짜 과부와 싸구려 한복과 슬쩍 드러낸 허리살과/ 하룻밤 신파가 노닐었네/ 하룻밤 둥지 같던 붉은 자수刺繡 방석들/ 그 깨방정의 징검돌을 밟고/ 내 신파新派는 저 우주 변두리로 더 나아간 줄 알았네// 그런데 말이네/ 가을 들어 파주 계곡의 한낮 절간에 갔더니/ 대웅전에 말이네/ 그때 그 방석들이 곱절은 품을 키워서 쌓여 있는 게 아닌가/ 이름만 바꿔서 그걸 좌복이라 하더군/ 좌정한 부처와 보살들은/ 그때 그 마담과 과부들이 개과천선한 듯/ 저 수미단須彌壇에 앉아 그때 육덕 좋던 미소를 던지는 게 아닌가/ 이미 범접할 수 없는 자리에 오르셨기에/ 어느 슬픔이 몸에 박힌 여인은/ 연신 방석 위에서 절을 퍼올리고 있었네// 니나노 가락과 염불소리가 갈마드는/ 그때 그 음담패설과 담배연기 자욱한 술집은/ 풍경소리 맑게 번지는 이 대웅전으로/ 뭔가 훌쩍 건너뛴 게 많은 방석집이네/ 허리가 끊어지도록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거리도록/ 절해고도의 손짓 같은 절을 하는 사람들/ 저마다 불립문자가 되어가는/ 좌복이 쌓여 있는 절간을 말이네/ 나는 다시 풍경소리 은은한 방석집이라 부르네//

풍선이라는 말 / 유종인
없던 마음이 생긴다/ 마당 한 평 없는 집 뒤란에 초록의 동산이 부푼다/ 동산 위에 초승달 한 편/ 날래게 쓰고 가는 밤// 느티나무 가지에 악을 쓰며/ 전생을 불어넣는 매미들,/ 암컷이 수컷을 부풀린다 저 구름들/ 글래머로 부푸는 이유를 높이 쳐다볼 때/ 바람도 느릅나무 그늘에서 볼우물이 팬다/ 윙크 한 번이면/ 옛적 말라비틀어진 사상의 뿌리에 근육이 돋을까// 세상이라는 나무 줄기가지 흔들리는 나날의 정세/ 이파리를 뒤집고 흔들고 고요히/ 처졌다 다시 쳐들리게 하는/ 깊은 호흡의 눈썹을/ 그대 닫히는 눈 위에 그려주듯// 이마가 뜨거운 한낮의 돌멩이들/ 불볕의 심장 위에/ 어슬한 숲 그늘이 심해의 울음을 불어넣는 저녁,/ 똬리를 틀던 두 마리 뱀이/ 폭식했던 햇빛을 밤의 사타구니로 스며들 듯이// 사랑의 얼룩이 번진 죄의 쇠구슬에/ 늙은 농담의 입김을 불어넣다니./ 어느 날 녹이 슨 붉은 말들이/ 쇠구슬을 부풀리고 부풀려 허공으로/ 땅바닥을 뒹굴던 누추의 영혼을 풀어주려나//

수련 물들다 / 유종인
연못에/ 수련이 뜬 지도 백일이 지나고 지났는데/ 그게 다/ 물로 불을 안치는 뜸,/ 물에 익힌 수련잎 서늘한 불// 손이 식어가는 내가/ 그대의 손등을 스칠 때/ 아 물의 구들장 아랫목에/ 시커멓게 떠오른 수련잎 한 장!/ 떠올렸네// 물불이 갈마드는 마음도/ 거기 가만히/ 등 지지러 가리//

수련 농담 1 / 유종인
여름 끝물이다/ 그년 참 무더웠다/ 그곳 한번 더듬자니 속옷이 백여덟 벌이나 될 줄이야/ 초록 속곳치마만 늪물 위에 띄워놓고/ 매미 소리로 귀싸대기를 맞는다/ 속살 한번 더듬지도 못하고/ 늦여름은 나보고 청춘에서 손 떼란다/ 어중이떠중이 풋사랑도 진품이던 청춘이 물러가면/ 꽃 피는 것도 기술이어야 한단다//

산벚나무꽃 / 유종인
이루지 못한 것들을 향해/ 나는 돌을 던지며 왔다/ 그것이 너덜길이 되려는데// 저기 저만치/ 드물고 드문 꽃 몇 송이 벌어서/ 산그늘보담도/ 산그늘보다 오랜 하늘보담도/ 한 사랑의 쓸쓸함을 품는 산벚나무,/ 꽃이 드물어/ 새들이 앉기 한갓져라// 드문 꽃/ 한 점만 피어도 모두 꽃가지,/ 마음의 돌 하나만 내려놔도 천상 꽃가지,/ 무심(無心) 가운데 그대가 오는 것도/ 천만다행의 꽃가지//

이끼 2 / 유종인
그대가 오는 것도 한 그늘이라고 했다/ 그늘 속에/ 꽃도 열매도 늦춘 걸음은/ 그늘의 한 축이라 했다// 늦춘 걸음은 그늘을 맛보며 오래 번지는 중이라 했다// 번진다는 말이 가슴에 슬었다/ 번지는 다솜,/ 다솜은 옛말이지만 옛날이 아직도 머뭇거리며 번지고 있는// 아직 사랑을 모르는 사랑의 옛말,/ 여직도 청맹과니의 손처럼 그늘을 더듬어/ 번지고 있다// 한끝 걸음을 얻으면 그늘이/ 없는 사랑이라는 재촉들,/ 너무 멀리/ 키를 세울까 두려운 그늘의 다솜,// 다솜은 옛말이지만/ 사랑이라는 옷을 아직 입어보지 않은/ 축축한 옛말이지만//

모과 1 / 유종인
불뚱이처럼 서서 그가 주워섬기는 말을/ 침묵은 허공에게 건넨다// 왕년에 한주먹 했다는 사람들을 보면/ 주먹보다 술에 더 길들어 있다// 왕년의 주먹은 이제/ 술병을 아니 술잔을 드는데도 쉽게 떨린다// 왕년이 다시 온다면/ 그 당찼던 돌주먹을 잠시만 가을볕에 매달아놓고,/ 보기만 해도 가난한 사람들/ 창가에 골똘히 굄질해놓아라// 상심한 당신 속내를 아무도 씹지 않으니/ 왕년은 갔다고 슬픈 주먹다짐은 마라// 제자리서 천 년을 바위 묵어도/ 향기는 물러터지는 자의 순애보인 것,/ 그 색이 보이지 않아도 왕년은 살아 있는 것// 주먹을 쥐고도/ 주먹을 펴 주위를 보듬는 향기여//

들국화 / 유종인
골목길을 막 돌아서던 참이었다/ 단풍잎이 책갈피가 아닌 車갈피에 꽂히는/ 싸늘한 아침나절이었는데 모든/ 꽃들이 땅에 첫발을 딛은 지 여러 날이 지났는데// 옷 주워 입고 일어서는 들병이마냥/ 버려진 화단 한쪽에서/ 땅을 치고 일어나는 노란 꽃빛이 들렸다/ 헌것도 아닌 새것만 피워들고/ 꽃 진 허공에 제 모가지 꿰 맞추려/ 늘어진 허리 들어올리는// 직장 가는 길 돌려/ 西三陵 옆구리에 같이 누워 뒹굴면/ 샛노란 나의 정사는/ 새로운 왕조의 가을 아침에 닿았겠구나//

맨드라미 / 유종인
돈 가뭄이 몇 달째이던 어느 가을날,/ 엘리베이터의 거울에 내 얼굴이 붉었다/ 정수리에 붉은 종기가 만져지곤 했다/ 그래도 씨익 웃어 보았다 돈을 잘 끌진 못해도/ 돈으로부터 담담해지고 싶은 그런 저녁/ 아파트 욕실의 변기에다가 말고/ 변두리 공터에 스며 그냥 노란 오줌발만 날린다/ 그럴 때 맨드라미들은/ 온몸으로 피 묻은 돈을 챙긴 듯, 그러나 돈을 몰랐다/ 흰 모래흙에 선지피를 휘젓던 주걱처럼 자라도/ 뒷돈 챙기는 깜냥과 비상금 챙기는 버릇도 없이/ 가뭄과 폭우와 가을볕을 그 붉은 얼굴로 받자 하다/ 오래 핀 꽃주름이 좀 질져졌을 뿐 딴 주머니는 안 찼다/ 검고 반짝이는 씨앗마저 흙바닥에 내줬다/ 그래도 닭벼슬처럼 검붉은 파노라마를 달고/ 맨드라미는 변두리가 좋아라/ 무릇 통속의 꽃밭 뛰쳐나와, 한 꽃밭으로 섰다/ 벼슬 떨어진 자리가/ 가장 좋은 벼슬자리라고 시인은/ 벼슬 떨어진 자리를 가장 큰 벼슬로 주워다는 것/ 누가 일러 줬던가 하루도 제 시의 볏에/ 새 피를 대지 않으면/ 쪼글쪼글 허공마저 놓지 못할 마음의 발기를,/ 임비곰비, 마음의 진창을 세워/ 저리 검붉은 금자탑을 세웠으니/ 오줌 주며 바짓단에 오줌발 묻히며 주춤주춤 맴도네//

파초(芭蕉) 숲으로 가다 / 유종인
1.// 파초 숲에 가니/ 지난밤 비바람에 꺾인 파초 잎이 배를 깔았다// 나는 먹물을 대령하고/ 쥐수염붓을 바랑에서 꺼냈다// 어머니 당신 이름을 써 보니/ 빗방울이 모여 파초 잎맥을 따라 눈물처럼 구른다/ 파초에 새로 오신 당신,/ 오늘 생신이라고 나는 축 자를 밥상처럼 납작하게 쓴다// 어머니 앞에서 고민은 장난 같다/ 초록 옷에 검게 머리를 물들이고 오신 어머니,/ 그 말씀 그 눈빛이 슬프고 수려하니/ 이게 살아 있는 신령인가//
2.// 나보다 앞서간 숨탄것들 이름을 써 보듯/ 아, 이 붓을 남기려 수염을 보탠 쥐들의 이름도/ 생쥐부터 시궁쥐까지 바람 냄새 가득한 들쥐도 함께/ 떡잎 같은 쥐의 귀까지 그리듯 써 본다// 그대를 떠올릴 때는/ 그 눈을 바로 그릴 수 없어 눈썹을/ 버들눈썹의 고요한 그늘을 가만히 흘려 본다/ 그러면 그대 눈이 고요히 나를 눈부처로 담으리// 곁을 따라온 개가 내 파초 잎 낙서를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어령칙한 전생을 떠올리듯 심각하게 또 물끄러미 바라보니/ 나는 오동잎 지는 소리에 개가 짖는다, 라고 쓰고/ 개의 왼발을 먹물에 담가 낙관(落款)하니/ 개는 어리둥절한다// 가끔 물초가 된 가마우지 소리를 흘려 쓰면/ 파초 잎에 물비린내가 번진다// 어느 날 산기슭에서 데려온 돌의 이마를 쓰니/ 파초에 그늘이 드리우는 듯/ 그러나 먼 우레 소리로 돌의 등짝을 밀어내니 가붓하다/ 그래도 뭔가 섭섭한가/ 사랑을 다 짓지 못한 저 섬 같은 돌은/ 부처님 머리 육계(肉髻) 같아서 이를 어쩐다//
3.// 다시 물어보고 싶은 사람들/ 다시 캐 보고 싶은 비밀들/ 마음은 다 살고도 남고 다 지나오고도 남는 파도 소리 같은 거/ 파초 잎에 아직 들키지 않은 소낙비 소리가 잔귀 먹어 남은 거/ 그런 미련 같은 거 가만히 받자하는 파초 잎/ 쥐수염붓이 망설이는 것/ 그건 종지부를 찍을 수 없는 설렘 같은 것// 전생으로부터 흘러온 당신이란 끌림 같은 거/ 포개듯 파초 잎에 쓰고 써 보니 까만 점이 되는 것/ 그것이 당신 눈동자라는 걸 아는 것// 그러나 파초 잎에 듣는 비꽃들/ 나보다 먼저 물초가 되는 글자들/ 검은 눈물로 파초 잎을 떠나는 이여/ 파초 잎은 아마도 샛강에 가려는가/ 옴두꺼비 두 마리 싣고 신행길 보내 주러 가고 싶은가/ 여우비보다 먼저 쥐수염붓을 걷고/ 나는 파초 우산을 쓰고 강으로 왼 어깨가 젖어 가고 싶은가//

수수밭 전별기 / 유종인
호수 너머 철조망 너머로 수수밭 행렬이 지나간다/ 맨발에, 맨종아리들이다/ 제자리서 오래 흔들린 저들,/ 흔들려, 가둘 수 없는 수수 머리다// 머리에 붉은 양파 망(網)을 씌운 가을,/ 수수 머리에 든 게 많을수록/ 시장한 새들의 눈초리, 참극이 모여든다// 홍건적처럼 붉은 양파망 뒤집어 쓴 수수행렬을 나는 방관하였다/ 나는 나를 수수 방관하여/ 홑겹의 세상에 묵은 곁을 두었다// 아, 허공의 단두대까지 자라 올라간/ 수수 머리 홍건적들이여,/ 흙먼지 이는 그 허망까지 말 달려갈 황야라도 좋았다/ 말을 놓치고야 말이 매였던 자리가/ 침묵의 그루터기다// 말을 매야할 자리에 발이 묵여/ 내륙 저편은 아득하고 수수머리만 자꾸 주억거린다/ 말을 다하지 못한 피가/ 수수 발목에 한 모금씩 젖어 있다//

가시엉겅퀴 뿌리를 생각함 / 유종인
발이 차구나, 이 한겨울에/ 그 한여름 도서관 뒤편 산자락에서 뽑다 놓친 가시엉겅퀴 뿌리를 생각한다/ 손에는 몇 개의 가시들/ 살짝 박혔다 계곡물에 씻겨내려 갔지만/ 여름내 가시몽둥이 같은 보랏빛 꽃대를 밀어올린 엉겅퀴 뿌리는/ 이 겨울에 눈밭 땅속 살림을 어떻게 견디는지 생각한다/ 한해살이 두해살이를 넘어/ 만년 죽음 곁에 우뚝할 청춘을 여투고 쟁이는지 생각한다/ 사랑이 오면 그것이 꽃만 말고/ 가시도 내고 시퍼런 가시잎도 내어/ 나를 찌르고 할퀴며 달려들어 뒹구는 짐승처럼/ 아직 달달하고 뜨거운 사랑의 피가 몇 종지나 남았느냐고 내게 되묻는 통에/ 손등과 팔에 흘리며 흘리다 만 피를 입술로 닦아 마시는 날을/ 가시엉겅퀴 뿌리는 무척이나 훔치고 싶어 언 땅속에서도 갑갑증이 이는가 생각한다/ 마음을 궁글리니 줄기며 가지 그보다 먼저 솟는 가시를/ 이 봄에도 제일 먼저 낼 것인지 생각한다//

버섯 / 유종인
교회는 여러 해 전에 망했다/ 뒤꼍에 버려진 십자가는/ 그게 나무인지라// 후일담처럼/ 십자가에 느타리가 피었다/ 교회 예배에 한 번도 참석한 적이 없는/ 저 여자의 남편은 발김쟁이고/ 자식들만 여럿인데// 오늘에야 십자가를 새로 봤네/ 망한 십자가라면 무얼 더 매달랴마는/ 제 속에서 끌어낸 알심인 양/ 오동통한 느타리버섯들// 잘 씻어 삶아 무쳐 먹자 얘들아/ 아빠는 늦을 것이다/ 오늘부터 십자가는 한결 가벼워질 테다//

가시 / 유종인
손바닥만한 선인장엔/ 골고다의 예수보다 훨씬 많은/ 바늘못들이 박혀 있다// 떨어져버리는 잎새들의 환난을/ 저처럼 작고 뾰족하게 벼려 놓았다/ 잎새가 드리우던 흔적 없는 그늘 대신/ 겨우 손바닥 위에/ 촘촘한 바늘 그림자를 떠 놓았다// 바늘로 햇살을 떠먹는 가시 숟가락들,/ 사막의 식사는, 햇빛에 인색해야 한다/ 바늘 몇 쌈을 뒤집어쓴 손바닥 안에/ 바늘 허리는 뿌리처럼 숨겨두었다// 햇살마저 그림자 바늘을 토하는 한낮,/ 어떤 손길도 잘 닿지 않아/ 스치는 그림자마저 손잡아 주지 않는구나/ 스스로 감옥에 갇힌 저 늙은 초록들,/ 바늘을 한 움큼 삼킨 사내의 목소리나/ 들어보고 싶구나// 아니, 무수한 바늘을 품고도/ 선인(仙人)의 장(掌)은 스스로/ 손끝 하나 긁히거나 찔리는 법이 없다/ 그림자조차 남기지 않는 궁금한 바람이/ 푸르게 손뼉치는 소리나 듣자고/ 신선의 손목을 건듯 흔들며 지나간다//

가시와 놀다 / 유종인
봄 장미가 내민 연녹색 가시는 혀와 같아/ 손가락 끝이 저절로 간다/ 가만히 손끝이 닿자/ 그윽이 휠 줄 아는 가시의 봄// 끝이 뾰족해진 가시 혀는/ 찌르는 연습과 핥는 연습을 번갈아 한다// 봄날은/ 가시에 젤리의 입맛이 감도는 때,/ 부드러운 촉燭으로 피를 내지 않고 살짝 애무해 주는 때,/ 하나의 생각이 이데올로기로 굳기 전에/ 이리저리 곰살맞게 연애를 탐문하는 때,// 멀리 홀로 가는 아픈 이여/ 그 굽어가는 등을 연녹색 가시 막대로 긁어주면 어떤가/ 말보다 앞서 나오는 미소는/ 참 보기 좋은 균열// 푸른 피가 돌고/ 연한 놋색의 맘이 말랑말랑할 때/ 그 가시 그림자마저/ 숱하게 다쳐 넝마로 부는 바람을 핥느라/ 그 가시의 혀끝이/ 다시, 휜다//

나무 / 유종인
숲가의 저 나무들/ 고요를 격동시키는 잎잎의 수런거림들/ 하나의 흔들림 속에/ 천수(千手)가 넘나든다/ 나무는/ 유심함을 다 알아버린 무심결이다//

미루나무 / 유종인
바람 불어 길게 휘어지는 미루나무,/ 허리 아래까지 흔들리며/ 허공의 화선지 깊이 눌러 써대는 저 필력筆力// 아무리 휘갈겨 써본들/ 아무리 파지를 낸들/ 하늘엔 기러기떼 지나간 흔적도 남지 않는다// 태풍이 와 허리가 꺾이고/ 사철 붓을 쥔 흙의 손아귀 힘이 빠질 때/ 초록에 단풍을 묻힌 것도 한 필법인가// 죽은 미루나무 붓을 씻는 늦가을 저녁비,/ 초록의 붓털에서/ 쓰르라미 소리 쏟아지는 여름날이/ 삭정이 붓털로 빠져 근심하던/ 까치는 다시 제 집에 곶아 쓰고자 물어 올리고// 마른 우듬지 위에 흰 눈이 묻어온다/ 허공에선 죽은 나무의 운필이 너무 고요하다/ 모지라진 미루나무 독필禿筆은 불쏘시개로 쪼개진 뒤/ 아궁이 속 불길로 휘갈겨지는 초서체草書體들// 지붕에 꽂힌 굴뚝 필봉筆鋒에 연기의 필체가 흐리다//

죽은 나무들이 말하길 / 유종인
죽은 나무들이 말하길/ 잎은 다시 돋지 않아도/ 꽃은 다시 피지 않아도/ 허공이 졸아들 듯/ 공중(空中)이 메워지는 것은 아니다// 죽은 나무들이 이르길/ 죽은 뒤에도 서 있는 것은/ 죽어도 길들여지지 않은 고집이 있다는 걸/ 삭정이를 떨어뜨리며 마지막까지/ 기다리는 자세는 죽음이 간섭할 수 없음이다// 죽은 나무들이 보여주길/ 죽은 뒤에도 여전히 죽는 연습이 남았다는 걸/ 껍질을 떨구고 벌레들에게 사방으로 먹히고/ 그러고도 남는 몸이란/ 보굿을 떨어뜨리며 나뭇가지들 곡선을 풀 때까지/ 곤줄박이 동고비 진박새의 횃대로 서보는 것이다// 죽은 나무들이 바라길/ 죽어서도 무덤을 짓지 않는 건 그래도/ 나머지로 더 쓰일 데가 없나/ 노출을 즐기지 않을 수 없음이며,/ 죽어서도 더 깊이 한 번 더 죽을 순간이 남지 않았나/ 끝까지 이용당하고 버려지길 바라는 바이다// 죽은 나무들이 말하길/ 죽은 나무들은 꽃과 잎들과 열매의 수사(修辭)를 챙기지 않는 문장의 여행이며/ 죽은 나무들이 먼 여행에서 돌아온 날/ 꼭 죽은 나무라고만 부를 수 있나/ 죽음을 달게 마신 몸으로 키워낸 층층의 나무 버섯을 후계자처럼 내미는 것이다//

양철지붕을 사야겠다 / 유종인
다시 양철지붕을 올려야겠다/ 내게 저 들판 끝에 단독의, 아니 독단으로라도/ 새로 지붕을 얹을 폐가가 있다면// 빗방울이/ 얼어오는 몸을 부풀려/ 눈송이로 맘을 띄우는 겨울이 오기 전에// 모든 소리에 성감대를 가진/ 양철지붕을 올려야겠다/ 상수리나무 갈참나무 신갈나무 너도밤나무 나무란 나무들/ 갈잎과 솔가리에 얹히는 된서리와 별빛 달빛마저/ 여줄가리 소리들로 쟁쟁하게 되비추는/ 거울을 눌러 입힌 양철지붕을 그믐밤 고양이가 거닐 때/ 그 발자국에서/ 꽃들이 눌러 퍼지는 소리에 소스라치는 고양이여/ 겨울에도 한뎃잠을 자다 깬 꽃들이/ 양철지붕에 꿈속의 비명을 던져 올려도 좋겠네// 한 무덤 방에 누워/ 부부가 동짓달 궁금한 입 군것질거리를 구시렁거릴 때/ 그 소리마저 눈보라에 실려/ 양철지붕에 내려앉으면 그 말 서슬에 깬 아들이/ 그날로 때 아닌 제사상을 보는 저녁도 있어/ 운감하시라/ 운감하시라/ 서로 마음 출출한 날이 가장 좋은 제삿날이니// 키 높은 옆집 처마의 눈석임물이/ 양철북을 두드리듯/ 양철지붕을 두드려 먼가래 한 꽃들의 귀를 부르네//

엎질러진 물 ㅡ원효 스님에게 / 유종인
저 투명한 骸骨, 유리컵을/ 내 목마름은/ 발로 걷어차버렸다// 어디까지나, 어느 때에도/ 찾을 수 없는 것을/ 곁에 흘려버리고 있다면/ 눈감고 만진/ 그대의 젖가슴이/ 내 마음의 살결이었다면// 사방으로 흩어진 물,/ 방바닥을 어루만지고 있다/ 더 큰 해골인 방 안에 담겨져 버렸다// 제가 사막이었다면/ 내 목마름이 한없는 그릇이란 걸/ 끝없이 스며들 욕망들,/ 나를 엎지르고 있다// 갈증은 엎질러버리자, 내 안에서/ 유리 부딪는 소리가 나는 해골, 보이잖는/ 컵 하나가/ 목마름에 일어서고 있다// 내 안에서 썩고 있는 부처들, 어서어서/ 비워내느라, 똥이/ 마렵다// 부처를 엎질러야, 내가/ 편하다 엎질어진 물처럼!//

신문 / 유종인
활자들만 모른 체하면/ 신문은 이리저리 접히는 보자기,/ 나는 신문이 언론일 때보다/ 쓸쓸한 마른 보자기일 때가 좋다// 그 신문지를 펼쳐놓고 일요일 오후가/ 제 누에발톱을 툭툭 깎아 내놓을 때가 좋다// 어느 날 삼천 원 주고 산 춘란 몇 촉을/ 그 활자의 만조백관들 위에 펼쳐놓고/ 썩은 뿌리를 가다듬을 때의 초록이 좋다// 예전에 파놓고 쓰지 않는 낙관 돌들/ 이마에 붉은 인주를 묻혀/ 흉흉한 사회면 기사에 붉은 장미꽃을/ 가만히 눌러 피울 때가 좋다/ 아무래도 굴풋한 날 당신이/ 푸줏간에서 끊어온 소고기 두어 근/ 핏물이 밴 활자들 신문지째로 건넬 때의 그 시장기가 좋다// 이젠 신문 위에 당신 손 좀 올려보게/ 손목부터 다섯 손가락 가만히 초록 사인펜으로 본떠 놓고/ 혼자일 때/ 내 손을 가만히 대보는 오후의 적막이 좋다//

껍질의 길 / 유종인
어제 벗겨 먹은 귤껍질이/ 방바닥에 뒹굴고 있다 쪼글쪼글/ 점점 더 말라가고 있다// 틀니를 들어내면 합죽이가 되는 어머니를/ 오랜만에 꿈속에서 만났다 온갖 가재도구며/ 잡동사니를 내다 마당에서 태우신다/ 모두 껍질인 거라 살다보면 껍질에 둘러싸여/ 알맹이 하나 찾는데 껍질이 태산 같구나/ 이 놈의 태산을 또 태우는데 불의/ 껍질이 얼마나 기일게 연기를 피우는지/ 전생(前生)의 눈알까지 맵고 눈물의 껍질이 또 한 겹 벗겨진다// 어머니가 열매로 맺은 껍질, 나는/ 또 한 겹의 꿈에 싸여 어머니의 꿈을/ 까먹었지만, 되돌아보면 늘 껍질로 기일게/ 늘어나 있는 길들이 어떤 열매의 속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그 마지막 씨눈을 파먹고 날아오르는 하늘의/ 껍질인 새떼들// 귤껍질 속의 바다가 쪼글쪼글하게 마른/ 방바닥에 앉아 보면, 태산이/ 상수리 열매 하나를 감싸는 껍질로/ 날로 푸르러지고 있다는 것도//

도마 / 유종인
해 쨍쨍한 복날,/ 박달나무가 전생인 도마가/ 오래 입어 빛 바랜 사각 팬티처럼/ 죽은 대추나무 가지 사이/ 그 사타구니에 걸쳐져 있다// 무수한 칼집에/ 접시만큼 뭘 담을 곳이 생긴/ 도마 속곳에/ 태양의 정액이 환하게 묻어 있다// 대추나무야, 어서/ 이 햇살 쬐러 나온 무른 도마/ 속속을 주워 입고 부리를 움쭉거려보아라/ 머리에 피가 마르기 전에/ 네 가시로 속곳 도마를 찔러보아라// 시퍼런 채소와 붉은 고기들 자르고/ 다져 넣어도 입 한 번 벌리지 않던 도마는/ 식물도 짐승도 아닌 그 경계에서/ 칼을 맞았다// 곰팡이꽃 필까 봐/ 사람들은 네가 변할까 봐/ 칼을 주다 땡볕을 주다/ 죽은 대추나무 가시에 마지막 성욕처럼/ 도마, 마지막 죄 짓고 도망갈 속곳을 주었다//

아호(雅號) / 유종인
길바닥에 흙먼지 뒤집어쓴 채/ 두부 한 판 버려져 있다/ 콩물 속에 엉기듯 굳어가던 이름은/ 새벽에 도드라져 나온 몸이다// 몸이 그대로 이름을 받은 두부 한 판,/ 누군가 아귀아귀 씹어 먹을/ 부드럽고 고소한 이름 한 모!// 초당이여,/ 유명을 달리한다는 게 별것 아니구나// 다시 못 부를 이름이 된다는 거/ 다시 못 먹을 이름이 된다는 거,/ 먹는다는 말의/ 그 오랜 저작(詛嚼)이여//

어부바 / 유종인
바닷가 소나무숲에 들어갔다/ 수평선은/ 가늘게 눈을 뜨고 날 바라봤다/ 혹여 당신이 가 계신 곳 아느냐 물으면/ 어부바, 어부바/ 발끝에 닿는 파도소리에 업혀온 말/ 당신이 날 업으려 온몸으로 건넸던 말들/ 솔숲에 파도소리로 부려놓았다// 세월은 당신안테 가벼워진 몸,/ 더 깊어진 속종을 미소로 갈무리한 채/ 당신은 여전히 내게/ 늡늡한 영혼의 등을 내보이며 어부바,/ 실패와 좌절조차 꽃처럼 받아 안듯이/ 넉넉히 등을 내미는 말, 어부바는/ 수평선이 영원의 선반처럼 해와 달을 업어주는 말// 바닷가 소나무숲에 서 있었다/ 소나무는 하나같이 허리가 굽었다/ 당신이 그러하였다/ 굽은 소나무 허리를 쓰다듬을 때/ 어부바 어부바 당신 목소리가 나무에서도 흘러 나왔다/ 이젠 내 차례에요 해와 달이 모셔간 어머니/ 나는 눈부신 수평선처럼 등을 내밀어/ 당신 이제 파도처럼 철썩 제게 업히세요/ 어부바//

달님이 / 유종인
오늘은 사월 끝물 당신이 연희문학창작촌 퇴소하는 날,/ 비도 오는데 오라 한다/ 오라 하면 다 가느냐/ 우산도 가져다주고 짐 배낭도 대신 매야 하니/ 연희동 골복 명랑 핫도그 하나/ 내 입에 물리고 나는 그예 비오는/ 사월의 짐꾼 노릇을 꾸덕꾸덕 한다/ 비 오는 연희, 그러니까 전문대 다닐 때 여동창 이름 같기도 한데/ 그 하루 반나절 창작촌 문 나서기 전에/ 처음 본 달님이가/ 으르렁거리지 않고 나를 반겨주길래/ 나도 덩달아 반겨주었다 내 무릎에/ 내 가슴에 앞발을 들어 손처럼 얹으려는 거는/ 비오니까 조금 피하면서 모처럼/ 참으로 인류 최초인 것처럼/ 사람과 개가 서로 화통하여 마지않았다/ 첫 만남이 헤어짐의 선곡일 줄이야/ 비 오는 신파인데 달님이는/ 비 오는 속내 그대로 서문한 눈빛이다/ 사람보다 더 연기를 잘 한다 진짜가/ 아니라고 해도 진짜인 달님을 두고/ 당신은, 암놈이냐 수놈이냐 묻길래/ 나는 아랫도리를 까보지 않아서 진짜 모른다고/ 말하려다가 그냥 모른다고만 한다/ 달님아. 오늘은/ 밤까지 새벽까지 줄창 비가 오니 달님은/ 이 세상천지에 너 하나뿐이다//

염주와 묵주 / 유종인
기도를 굴리며 걷는 사람들,/ 어느 염주와 어느 묵주가 스치듯 만날 때는/ 참깻단 들깻단 말리는 환한 가를날이 대세다/ 산책 나온 암환자를 여윈 어깨를 불들이는 목젖이 푸른 갈바람이 대세다/ 갓 핀 붉은 억새꽃 술렁이는 들길에/ 생각이 굵은 염주와 침묵이 달큰해진 묵주가 만날 때에는/ 샛강 모래톱에 외발로 선 왜가리의 쫄음 같은 평화가 대세다// 고통이 쉬는 나라는 아름다운 나라가 아니니/ 아픔은 속사정 여사여사한 유족들처럼/ 슬며시 기운 들풀처럼/ 어울려도 오고 기대어도 오니/ 고통이 가물었던 이들은 다시 햇곡식처럼 고통을 받자하니/ 여름내 곰팡이 핀 염주알 묵주알 다시 돌린다/ 윤기 도는 기도의 이마여// 염주를 쥔 그대가 묵주를 든 날 스칠 때는/ 들판 끝 송장메뚜기 뛰는 가을 서덜길이 대세다/ 이 민낯의 마음은/ 어딘가 깊은 슬픔이 내통하더라도/ 염주알 묵주알 다 풀어 가져가는 들판의 바람./ 지금 이 간구하는 손목을 비틀어 어디다 둬야 하나// 산길 모롱이나 찬비 모는 육교에서/ 염주와 묵주가 마주칠 때는/ 묵은 모랫자루가 터져 두꺼비 걸음으로 저녁이 모는 것이 대세다/ 토란잎이 시들고 토란대가 바람에 꺾이고/ 비라고 바라는 바도 잊고/ 어디서 족발 삶는 냄새 자자하고, 적막도 깨우치는가/ 들기름 병 깨져 가난이 횡재를 맞은 듯/ 저녁의 입가에 고소한 미소가 번지는 것도 대세다/ 묵주를 쥔 손과 염주를 찬 손이 가만히 악수할 때/ 새삼 노을에 비쳐 글썽이는 먼지들/ 영원의 눈썹이 일렁거리는 것도 순간의 대세다//

잔설(殘雪) / 유종인
고집불통의 새 한 마리/ 몇 번의 겨울을 쪼다 돌아간 뒤/ 내 마음의 그늘마다/ 하얀 털들이 섬처럼 남겨졌다// 눈을 떠야지/ 어서 눈을 떠야지/ 눈감을 수 없는 세월이 찾아온다./ 하얗게 백태 낀 말들,/ 맑은 눈물을 만들려고 햇살을 기다려도/ 그늘은 옮길 수 없다는 말,/ 버릴 수 없는 혈통 같았다// 심심한 오후의 개들, 오줌을 지리고 간 뒤/ 그 하얀 털에도 탈모脫毛가 시작됐다/ 스밀 줄 모르던 하얀 울음들/ 오래 때 타고 나서야/ 저 진 땅 소맷자락에 훔쳐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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