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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황인숙 시인

부흐고비 2022. 7. 8. 08:00

황인숙 시인
1958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였다. 198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데뷔했다. 시집으로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슬픔이 나를 깨운다』, 『우리는 철새처럼 만났다』,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자명한 산책』, 『꽃사과 꽃이 피었다』, 『리스본行 야간열차』, 『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가 있으며 『해방촌 고양이』 등 산문집과 소설 『도둑괭이 공주』가 있다. 동서문학상(1999), 현대문학상(2018), 김수영문학상(2004)을 수상했다.

 



강 / 황인숙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찬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江)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江)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응시 / 황인숙
내 귀는 네 마음속에 있다./ 그러니 어찌 네가 편할 것인가./ 그리고 내게/ 네 마음밖에 그 무엇이 들리겠는가.//

자명한 산책 / 황인숙
아무도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는/ 금빛 넘치는 금빛 낙엽들/ 햇살 속에서 그 거죽이/ 살랑거리며 말라가는/ 금빛 낙엽들을 거침없이/ 즈려도 밟고 차며 걷는다// 만약 숲 속이라면/ 독충이나 웅덩이라도 숨어 있지 않을까 조심할 텐데// 여기는 내게 자명한 세계/ 낙엽 더미 아래는 단단한, 보도블록// 보도블록과 나 사이에서/ 자명하고도 자명할 뿐인 금빛 낙엽들// 나는 자명함을/ 퍽! 퍽! 걷어차며 걷는다// 내 발바닥 아래/ 누군가가 발바닥을/ 맞대고 걷는 듯하다//

자유로 / 황인숙
나는 아무의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구절초처럼 빛나는 혈통에 대한/ 간도 쓸개도 없이// 멍하니 기가 죽어 살고 있다.// 나는 타락했다./ 내가 아무의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피의 계율을 잊었기 때문에.//

젖은 혀, 마른 혀 / 황인숙
바람의 축축한 혀가/ 측백나무와 그 아래 수수꽃다리를 핥으면/ 측백나무와 수수꽃다리는/ 슬며시 눈을 뜨고/ 측백나무와 수수꽃다리로 깨어난다// 바람의 마른 혀가/ 측백나무와 수수꽃다리로 깨어난/ 측백나무와 수수꽃다리를 핥으면/ 측백나무와 수수꽃다리는/ 스스로 눈을 감고/ 측백나무와 수수꽃다리로 잠이 든다/ 영혼이 펄럭이며 잘 마르는 날.//

주름과 균열 / 황인숙
내 기억이 포개진 수많은 주름/ 속에 포개진 균열// 그 단애에/ 헐벗은 나무가 서 있다/ 눈과 얼음이/ 따개비처럼 불가사리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다// 기가 막히다/ 세월의 빠름이,아니 사실/ 빠른건 모르겠는데/ 세월의 많음이// 균열이 포개진 주름.//

우리는 철새처럼 만났다 / 황인숙
네가 사랑한 것이/ 이토록 추한 것임을 안다면!// 나를 아연하게 하는 것, 절망감과 분노로 나 자신을 물어뜯고 싶게 하는 건, 이 공포스러운 수치심에도 불구하고 내가 추함을 멈출 수 없다는 것.// ‘추함이 내 본질’이라고는 말하지 않겠다. 참이건 아니건 그 말은 자기 사면의 도구로 쓰일 것이기에.// 詩가 나를 정화해주기를, 그래서 네게 주는 것이 조금이나마 더 가치 있는 것이 되기를!/ 나를 구원해주기를!//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 황인숙
보라, 하늘을./ 아무에게도 엿보이지 않고/ 아무도 엿보지 않는다./ 얏호, 함성을 지르며/ 자유의 섬뜩한 덫을 끌며/ 팅! 팅! 팅!/ 시퍼런 용수철을/ 튕긴다.//

바람 부는 날이면 / 황인숙
아아 남자들은 모르리/ 벌판을 뒤흔드는/ 저 바람 속에 뛰어들면/ 가슴 위까지 치솟아 오르네/ 스커트 자락의 상쾌//

묽어지는 나 / 황인숙
이상하다/ 거품이 일지 않는다// 어제는 팔팔했는데/ 괜히 기진맥진한 오늘의 나/ 거품이, 거품이 일지 않는다// 쓰지 않아도 저절로/ 소진돼버리는/ 생의 비누의 거품//

조깅 / 황인숙
후, 후, 후, 후! 하, 하, 하, 하!/ 후, 후, 후, 후! 하, 하, 하, 하!/ 후, 하! 후, 하! 후하! 후하! 후하! 후하!// 땅바닥이 뛴다, 나무가 뛴다./ 햇빛이 뛴다, 버스가 뛴다, 바람이 뛴다./ 창문이 뛴다. 비둘기가 뛴다./ 머리가 뛴다.// 잎 진 나뭇가지 사이/ 하늘의 환한/ 맨몸이 뛴다./ 허파가 뛴다.// 하, 후! 하, 후! 하후! 하후! 하후! 하후!/ 뒤꿈치가 들린 것들아!/ 밤새 새로 반죽된/ 공기가 뛴다./ 내 생의 드문/ 아침이 뛴다.// 독수리 한 마리를 삼킨 것 같다.//

일요일의 노래 / 황인숙
북풍이 빈약한 벽을/ 휘휘 감아준다/ 먼지와 차가운 습기의 휘장이/ 유리창을 가린다/ 개들이 보초처럼 짖는다// 어둠이/ 푹신하게 깔린다// 알아?/ 네가 있어서/ 세상에 태어난 게/ 덜 외롭다//

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 / 황인숙
하얗게/ 텅/ 하얗게/ 텅/ 눈이 시리게/ 심장이 시리게/ 하얗게/ 텅/ 네 밥그릇처럼 내 머릿속/ 텅// 아, 잔인한, 돌이킬 수 없는 하양!/ 외로운 하양, 고통스런 하양,/ 불가항력의 하양을 들여다보며// 미안하고, 미안하고,/ 그립고 또 그립고//

도시의 불빛 / 황인숙
좀더 밤이 오길 기다리자꾸나./ 내 방에서처럼 저 집들도/ 분명 전등을 켜고 있을 터인데/ 불빛들이 내게 닿기에는/ 아직 충분히 어둡지 않다.// 조금만 더 기다리자꾸나. 샛별은/ 하늘의 경사를 오르며 맑아진다./ 집들의 윤곽이 가라앉고/ 말갛게 창문이 떠오른다./ 밤을 보낼 치장을 마친/ 집들이 떠오른다.// 언젠가 한 친구가 외쳤었지./ "저 불빛들 좀 봐!/ 알알이 슬픔이야!"/ 지금 저 건너편에서 어떤 이도/ 이쪽을 건너보며 똑같은 탄식을 하고 있을지도// 슬프든 노엽든 따뜻한 핏톨처럼/ 집집의 불빛들이/ 밤의 언덕, 골짜기에/ 고요히 웅얼거리며 맥박 친다.//

풍경 / 황인숙
이미 기세 높은/ 오전 열한시의 쨍쨍한 햇볕 속에/ 매연을 뿜으며 덜컹거리며/ 트럭도 지나가고 버스도 지나가고/ 오토바이도 택시도 지나다니는 대로변 길바닥에/ 일인용 소파가 놓여 있다/ 그 소파에/ 등받이는 뒤로 젖혀진 얼굴과 어깨를 걸치고/ 양쪽 팔걸이에는 팔꿈치를 걸치고/ 벌린 무릎과 맞붙인 발바닥과 나머지 몸뚱어리를/ 포근히 파묻고 한 남자가 잠들어 있다/ 홀연히 떨어진 방패연처럼// 난데없는 그 소파/ 자세히 보니 눈에 익다/ 이따금 들르던 카페가 소파 뒤에서/ 철근과 시멘트 블록 파편으로 얼크러져 있다// 바둑판무늬의 일인용 소파에 햇볕이 몰려 있다/ 한 남자가 혼곤히 잠들어 있다/ 홀연히 떨어진 방패연처럼//

하늘꽃 / 황인숙
날씨의 절세가인입니다/ 얼마나, 얼마나, 아름다운지!/ 눈이 텅 비는 것 같습니다/ 앞서 떨어지는 눈송이들에 걸려/ 뒷눈송이들이 둥둥 떠 있는/ 하늘까지 까마득한 대열입니다/ 저 너머 깊은 天空에서/ 어리어리한 별들이 빨려들어/ 함께 쏟아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도 빨려들어/ 어디론가 쏟아져버릴 것 같습니다/ 모든 상념이 빠져나간 하양입니다/ 모든 소리를 삼키고/ 하얗게 쏟아지는 눈 오는 소리/ 나를 호리는 발성입니다// 몇 걸음마다 멈춰 서/ 묵직해진 우산을 뒤집어 털어/ 길 위에 눈을 돌려줬습니다/ 계단골이 안 보이도록 쌓인 눈/ 아무 데나 딛고 올라가려니/ 자꾸만 웃음이 비어져 나옵니다/ 내 방에 들어서 문을 닫으니/ 호주머니 속에 눈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황사 바람 1 / 황인숙
무수한 틈으로 꽉 짜인/ 꽉 짜인 어금니로 바람이/ 만물을 분쇄한다/ 신경쇠약 직전의 유리창들이/ 들들들들 갈린다/ 갈린다 틈틈 켜켜로/ 바스라져 하늘이 휘날린다/ 저 뿌연 아가리에/ 가시철망을 던진다면/ 검고 둥근 가시철망이/ 고딕체로 공중에 굴러다닌다면!//

비 / 황인숙
"사랑하는 어머니/ 비에 젖으신다"/ 가슴 졸일 자식도 없는/ , 같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것 같은/ 할머니 비에 젖으신다// 후암동 종점/ 햄버거집 처마 밑/ 깊숙이도 못 들어서시고/ 처마 끝에 쪼그려앉아/ 할머니 비에 젖으신다// 흐린 유리알 같은 할머니의 눈에/ 빗물이 흐른다, 멈추지 않는다/ 빗줄기는 머리에도 아니고 가슴에도 아니고/ 할머니의 몸에 들이친다/ 납작 눌린 머리칼과 곱은 손등에 들이친다// 할머니는 기억도 기력도 없으시지/ 도둑고양이만큼도 아는 이가 없으시지/ 아이고, 하느님/ 왜 나를 이때까지 살게 하셔서/ 이렇게 춥고 외롭게 하십니까?/ 한탄도 할 줄 모르시지/ 하지만 평생의 기억은 사라졌지만/ 설움은 남으셨을 할머니/ 생각도 없이 눈물이 흐르고/ 그러면 멈추지 않으실 할머니// 비가 조금 듬성해지자/ 할머니는 접은 판지상자 뭉치를 머리에 이시고/ 비틀비틀 일어나신다/ 빗물에 젖어드는/ 판지 뭉치 머리에 이시고/ 할머니,/ 멍한 얼굴, 비틀걸음으로/ 어디로, 어디론가 걸어가신다.//

비 / 황인숙
저처럼/ 종종 걸음으로/ 나도/ 누군가를/ 찾아나서고/ 싶다//

비 / 황인숙
찰박거리는 맨발들./ 찰박 찰박 찰박 맨발들./ 맨발들, 맨발들, 맨발들./ 쉬지 않고 찰박 걷는/ 티눈 하나 없는/ 작은 발들./ 맨발로 끼어들고 싶게 하는//

비 온 가을 아침 / 황인숙
블록 담벼락은 젖어 있었다./ 남은 잎새를 마저 던지고/ 튤립나무는 우두커니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길바닥은 노란 잎들을/ 힘껏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 남자는 튤립나무보다/ 더 벗고 있었다./ 주름살을 기묘히 구겨/ 갓난애의 얼굴을 하고/ 후들후들 떨며/ 행인들의 눈치를 보며/ 먼 유년을/ 놀고 있었다.//

산오름 / 황인숙
친구와 북한산 자락을 오른다/ 나는 숨이 찰 정도로 빨리 걷고/ 친구는 느릿느릿,/ 그의 기척이 이내 아득하다/ 나는 친구에게 돌아가 걸음을 재촉한다/ 그러기를 몇 번, 기어이 친구가 화를 낸다/ 산엘 왔으면, 나무도 보고 돌도 보고/ 풀도 보고 구름도 보면서 걷는 법이지/ 걸어치우려 드느냐고/ 아하!/ 친구처럼 주위를 둘러보며 걸으려는데/ 어느 새 획획 산을 오르게 되는 나다/ 땀을 뚝뚝 흘리며 바위에 앉아 내려다보면/ 멀리서 친구가 느릿느릿 올라온다/ 나무도 데리고 돌도 데리고/ 풀도 데리고 구름도 데리고.//

수전증 / 황인숙
가끔/ 탁자 위에 올려놓은/ 손이 떨릴 때가 있다/ 사람들 앞에서/ 제멋대로 손은 떨고/ 나는 확확 달아오르지 못하게/ 얼굴을 굳힌다/ 그리고 내 손이 생쥐나/ 재떨이나 구름인 양 내려다본다/ 한 번 떨기 시작하면/ 제어할 수 없는 손// 얼굴도 아니고 어깨도 아니고/ 가슴도 아니고 손이/ 어리숙하게 보여준다/ 피로나 두려움 때로는 긴장과 흥분// 달아나고 싶은거다/ 그래서 앞발이/ 파들거리는 것이다//

슬픔이 나를 깨운다 / 황인숙
슬픔이 나를 깨운다./ 벌써!/ 매일 새벽 나를 깨우러 오는 슬픔은/ 그 시간이 점점 빨라진다./ 슬픔은 분명 과로하고 있다./ 소리없이 나를 흔들고, 깨어나는 나를 지켜보는 슬픔은/ 공손히 읍하고 온종일 나를 떠나지 않는다./ 슬픔은 잠시 나를 그대로 누워있게 하고/ 어제와 그제, 그끄제, 그 전날의 일들을 노래해준다./ 슬픔의 나직하고 쉰 목소리에 나는 울음을 터뜨린다./ 슬픔은 가볍게 한숨지며 노래를 그친다./ 그리고, 오늘은 무엇을 할 것인지 묻는다./ 모르겠어…… 나는 중얼거린다.// 슬픔은 나를 일으키고/ 창문을 열고 담요를 정리한다./ 슬픔은 책을 펼쳐주고, 전화를 받아주고, 세숫물을 데워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식사를 하시지 않겠냐고 권한다./ 나는 슬픔이 해주는 밥을 먹고 싶지 않다.// 내가 외출을 할 때도 따라나서는 슬픔이/ 어느 결엔가 눈에 띄지 않기도 하지만/ 내 방을 향하여 한 발 한 발 돌아갈 때/ 나는 그곳에서 슬픔이/ 방안 가득히 웅크리고 곱다랗게 기다리고 있음을 안다.//

시장에서 / 황인숙
그를 위해 무얼 살까 들러보았죠./ 수줍은 제비꽃에 벗은 완두콩./ 그에게는 아무짝에 소용없는 것./ 그럼그럼 딸길 살까 바나날 살까?/ 아니면 익살맞은 쥐덫을 살까?/ 그를 위해 무얼 살까 둘러보았죠./ 한 쾌의 말린 뱀, 목에 늘인 할아범./ 아아아아 재밌어 이걸 사줄까?/ 뽀골뽀골 미꾸라지 시든 오렌지/ 아니면 특제 실크덤핑넥타이./ 아아아 재밌어 이걸 사줄까?// 복작복작 밀리며 걷는 내 손엔/ 한 쪽엔 아이스크림 한 쪽엔 풍선./ 농담처럼 절뚝절뚝 뛰는 지게꾼./ 그 뒤를 바싹 쫓아 빠져나왔죠./ 주머니에 뭐가 있나 맞춰보아요./ 바로바로 올림픽 복권이어요./ 만약에 첫째로 뽑힌다면은/ 아아아아 재밌어 너무 재밌어/ 풍선처럼 그이는 푸우 웃겠죠.//

벚꽃 반쯤 떨어지고 / 황인숙
한 소절 비가 내리고/ 바람 불고/ 벚꽃나무 심장이/ 구석구석 뛰고// 두근거림이 흩날리는/ 공원 소롯길/ 환하게 열린 배경을/ 한 여인네가 틀어막고 있다/ 엉덩이 옆에 놓인 배낭만 한/ 온몸을 컴컴하게 웅크리고/ 고단하고 옅은 잠에 들어 있다// 벚꽃 반쯤 떨어지고/ 반쯤 나뭇가지에 멈추고.//

병든 사람 / 황인숙
몸이 굉장히/ 굉장히, 굉장히/ 어려운 방식을 푼다/ 풀어야 한다/ 혼자서/ 하염없이 외롭게/ 혼자서.//

봄 / 황인숙
온종일 비는 쟁여논 말씀을 풀고/ 나무들의 귀는 물이 오른다./ 나무들은 전신이 귀가 되어/ 채 발음되지 않은/ 자음의 잔뿌리도 놓치지 않는다./ 발가락 사이에서 졸졸거리며 작은 개울은/ 이파리 끝에서 떨어질 이응을 기다리고./ 각질들은 세례수를 부풀어/ 기쁘게 흘러 넘친다./ 그리고 나무로부터 한 발 물러나/ 고막이 터질 듯한 고요함 속에서/ 작은 거품들이 눈을 트는 것을 본다.// 첫 뻐꾸기가 젖은 몸을 털고/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봄날 / 황인숙
`전화 받지 말 것'/ 이라고 쓴 딱지를 전화기에 붙여놓고/ 나는 부재중이었다./ 나, 세상으로부터 멀리/ 떠나갔다 돌아왔을 때/ 오랜 잠에도 식지 않고 베개의 부드러움에 묻힌/ 턱뼈로만 존재했다./ 어떤 소리도 분간되지 않고/ 그저 소리로만 공기를 끄적이고/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 마음은 풀리고 적막했다/ 적막하게 평화로웠다/ 나, 아득히 세상과 멀리.// 닝닝닝 전화벨 울렸다./ 닝닝닝 전화벨 끊이지 않고/ 닝닝닝 다 됐니?/ 넘실거렸다./ 나는 꽉 눈을 감았다./ 닝닝닝 꽃이 피고 닝닝닝 바람 불고/ 닝닝닝 닝닝닝 누군가/ 내 다섯 모가지를 친친 감았다.// 아주 달아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봄의 꿈 / 황인숙
봄비가 보습처럼/ 완고하고 무표정한 하늘을 바스라뜨렸다// 어디론가 가보고 싶지만/ 그곳이 내게로 온 것도 같다// 사방 간 데로 꿈틀거리는 아지랑이 속을/ 사방 간 데로 걸으리// 땅에 갓 뿌리를 묻은 묘목들도/ 무덤들도 푸르러지리.//

분홍새 / 황인숙
기지개를 켜다가 보았어./ 굴뚝위의 야릇한 새./ 그게 정말 분홍색인지/ 그게 막 깨어난 햇남의 장난인지/ 눈비비고 나니/ 훌쩍 지붕 너머로 사라졌어/ 내 말 듣는 거야, 안 듣는거야?/ 분홍새를 본 것 같다니까./ 내 말 듣는 거야, 안 듣는 거야?/ 갸우둥거릴 것 없어./ 무슨 은유인지, 상징인지,/ 난 분홍새를 보았고/ 그저 보았다고 말하는 거야./ 그저 그뿐이야.//

불행의 나비, 행운의 나비 / 황인숙
저기 행운의 나비가 보이네요/ 팔랑팔랑/ 세상 좋은 향기란 향기는 다 풍기는 듯하네요/ 주위를 그 자신의/ 행운의 빛으로 환하게 밝히네요/ 먼 빛으로라도 행운의 나비를 보면/ 우리는 미소짖죠/ 이리와, 이리 내게로 와, 행운의 나비야/ 우리는 행운의 나비를 만나고 싶어하죠// 행운의 나비는 내려앉는 데서마다/ 듬뿍 행운의 가루를 묻혀 날아가죠/ 우리의 눈을 부시게 하고/ 우리의 가슴을 아리게 하는/ 행운의 나비가 저기 가네요// 저기 불행의 나비가 보이네요// 펄렁펄렁/ 칙칙한 빛깔의 묵직한 날개/ 주위가 다 캄캄해지네요// 저리가, 저리 멀리 날아가, 불행의 나비야/ 우리는 불행의 나비를 피하고 싶어하죠// 불행의 나비는 내려앉는 데서마다/ 듬뿍 불행의 가루를 묻혀 날아가죠/ 우리가 눈을 감고 외면하는/ 불행의 나비가 저기 가네요.//

남산, 11월 / 황인숙
단풍 든 나무의 겨드랑이에 햇빛이 있다. 왼편, 오른편./ 햇빛은 단풍 든 나무의 앞에 있고 뒤에도 있다./ 우듬지에 있고 가슴께에 있고 뿌리께에 있다./ 단풍 든 나무의 안과 밖, 이파리들, 속이파리,/ 사이사이, 다, 햇빛이 쏟아져 들어가 있다.// 단풍 든 나무가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있다./ 단풍 든 나무가 한없이 붉고, 노랗고, 한없이 환하다./ 그지없이 맑고 그지없이 순하고 그지없이 따스하다./ 단풍 든 나무가 햇빛을 담쑥 안고 있다./ 행복에 겨워 찰랑거리며.// 싸늘한 바람이 뒤바람이/ 햇빛을 켠 단풍나무 주위를 쉴 새 없이 서성인다./ 이 벤치 저 벤치에서 남자들이/ 가랑잎처럼 꼬부리고 잠을 자고 있다.//

낮잠 / 황인숙
지금은 내가/ 사람이기를 멈추고/ 쉬는 시간이다/ 이 시간 참 많은 사람들이 나를 찾아온다/ 알 듯한 모르는 사람들과/ 모를 듯한 아는 사람들/ 그리고 전혀 모를 사람들// 어떤 사람이 공연히 나를 사랑한다/ 그러면 막 향기가 난다, 향기가/ 사람이기를 멈춘 내가 장미꽃처럼 피어난다/ 톡, 톡, 톡톡톡, 톡, 톡,/ 지금은 내가/ 사람이기를 멈추고 쉬는 시간/ 아는 이 모두를 저버린 시간// 문득, 아무래도 상관없다,/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톡, 톡, 톡톡톡, 톡, 톡!/ 사람이기를 멈춘 내/ 영혼에 이빨이 돋는다/ 아는 이 모두가 나를 저버렸다!// 톡, 톡, 톡톡톡, 톡, 톡,/ 모두 다 꿈이라고/ 절세가인 날씨의 바람이/ 나를 흔들어 깨운다.//

내 머릿속에 나무 하나가 / 황인숙
내 머릿속에 나무 하나가/ 그뿌리를 억세게 뻗어/ 머리를 옥조이고/ 피를 흡빨고// 향기 같은 것/ 잎새 소리 같은 것/ 가끔 그런 것이나 보내오고/ 꽃도 잎샏 없이// 내 머릿속에 나무 하나가/ 그 뿌리만 억세게 퍼져/ 혀를 짓누르고/ 꿈을 지배하고// 아, 나는/ 꿈속에서도 쉬지 못한다/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내 머릿속에/ 나무 하나가.//

눈길 / 황인숙
발바닥을/ 퉁겨내듯 가볍게 잡아당긴다/ 귓속에서 속삭이는/ 아니, 발바닥이 직접 듣는 바삭 소리// 모든 것을 하얗게/ 지워버리는 하양// 끝없이 점멸하는/ 일만 가지 색채의 까망//

눈은 마당에 깃드는 꿈 / 황인숙
눈이 온다/ 먼 북국 하늘로부터/ 잠든 마당을 다독이면서/ 단풍나무 꼭대기에서 갸웃둥거리던 눈송이가/ 살풋이 내려 앉는다/ 살풋살풋 둥그렇게, 마당이 부푼다/ 둥그렇게, 둥그렇게// 눈은 마당에 깃드는 꿈/ 마당은 커다란 새가 됐다/ 그리고 단풍나무 꼭대기에서/ 작은 새가 내려 앉는다// 저 죽지에/ 볼을 대고 싶다/ 하지만 어떻게 그의 잠을 깨우지 않고?//

늙은 건달 불루스 / 황인숙
돈은 다 떨어지고/ 마음은 옹졸해졌네,/ 엄마와 대판 싸우고 집을 나오니/ 갈 곳이 없구나./ 이 공원 저 벤치/ 저 버스 이 지하철을 헤매는데/ 개나리 진달래 만발했도다./ 하! 공복통처럼/ 만건곤한 봄날//

다른 삶 ㅡ이아라 리 감독의 영화 <종합적 쾌락>을 보고 / 황인숙
얼굴이 예뻐도/ 삶이 지루할까?/ 돈이 많아도/ 삶이 지루할까?/ 집안이 무고해도/ 삶이 지루할까?// 여일한 삶이 지루해/ 예쁜 얼굴을 망가뜨리기도 한다/ 앞으로 추한 얼굴로 한 번 살아보려고/ 밋밋한 삶에/ 피어싱을 한다/ 문신을 한다/ 성형수술을 한다.//

담쟁이 / 황인숙
만져보는 거야./ 네 입술을./ 네 입술의 까슬함과 도드라짐./ 한숨과 웃음./ 만져보는 거야.// 만져보는 거야./ 네 귀, 네 콧망울과 콧등, 눈두덩./ 까슬함과 보드라움./ 헤아리지 않아,/ 그냥 만져보는 거야./ 네 가슴,/ 네 등, 네 엉덩이/ 허벅지와 팔꿈치.// 만져보면서 가는 거야.//

나, 덤으로 / 황인숙
나, 지금/ 덤으로 살고 있는 것 같아/ 그런 것만 같아/ 나, 삭정이 끝에/ 무슨 실수로 얹힌/ 푸르죽죽한 순만 같아/ 나, 자꾸 기다리네/ 누구, 나, 툭 꺾으면/ 물기 하나 없는 줄거리 보고/ 기겁하여 팽개칠거야/ 나, 지금/ 삭정이인 것 같아/ 핏톨들은 가랑잎으로 쓸려다니고/ 아, 나, 기다림을/ 끌어당기고/ 싶네//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 황인숙
이 다음에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윤기 잘잘 흐르는 까망 얼룩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사뿐 사뿐 뛸 때면 커다란 까치같고/ 공처럼 둥글릴 줄도 아는/ 작은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나는 툇마루에서 졸지 않으리라/ 사기 그릇의 우유도 핥지 않으리라/ 가시덤불 속을 누벼누벼/ 너른 들판으로 나가리라/ 거기서 들쥐와 뛰어놀리라/ 배가 고프면 살금살금/ 참새떼를 덮치리라/ 그들은 놀라 후다닥 달아나겠지/ 폴짝 폴짝 뒤따르리라/ 푸드득 푸드드득/ 꼬마 참새는 잡지 않으리라/ 할딱거리는 고놈을 앞발로 툭 건드려/ 놀래주기만 하리라/ 그리고 곧장 내달아/ 제일 큰 참새를 잡으리라/ 이윽고 해는 기울어 스산해지겠지/ 들쥐도 참새도 가버리고/ 어둔 들판에 홀로 남겠지/ 나는 돌아가지 않으리라/ 어둠을 핥으며 낟가리를 찾으리라/ 그속은 아늑하고 짚단냄새 훈훈하겠지/ 훌쩍 뛰어올라 깊이 웅크리리라/ 내 잠자리는 달빛을 받아/ 은은히 빛나겠지/ 혹은 거센 바람과 함께 찬 비가/ 빈 벌판을 쏘다닐 지도 모르지/ 그래도 나는 털끝 하나 적시지 않을 걸/ 나는 꿈을 꾸리라/ 놓친 참새를 쫓아/ 밝은 들판을 내닫는 꿈을//

나를 믿지 마세요 / 황인숙
믿지 마세요./ 당신이 믿음을 저버리고, 들킨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는 사람을.// 절대로/ 마음을 놓지 마세요./ 하느님도 그를 달래 실 수 없어요.// 까실한 얼굴을/ 절벅거리며 씻다가/ (우리에게는 바빌론강도 없으니까)/ 수돗물을 틀어놓고/ 수돗물가에 앉아서 울어본 적이 있는 사람은/ 내 말을 알 거예요.//

나뭇잎 하나에 / 황인숙
가장 너른 하늘을 보기 위하여/ 가장 너른 땅이 필요한 건 아니다.// 비온 뒤의 즙 많은 햇살을/ 빠는 나뭇잎./ 그 치켜올려진 입귀에/ 황혼이 몰려든다.// 간지러움, 간지러움/ (간지러움은 통증)// 모든 이파리에 바람은 말을 전하니/ 나는 거기에/ 귀 기울여야지.//

나비 / 황인숙
나비의 심장은 저토록이나 고요하고/ 유유히/ 뱃놀이를 하듯 뛰는구나/ 늘 낮잠을 자는/ 구름처럼 뛰는구나/ 이따금 가느스름 뜨는/ 커다란 눈처럼 뛰는구나/ 삽시간, 느리게/ 새벽과 밤과/ 아침의 그림자와 오후의 그림자를/ 오게 했다 지우며/ 어쩌겠다는 생각도 없이/ 살며시 나비를 잡으면/ 심장이 멎는다, 정오/ 나비는 만파 시선을 피하려 쩔쩔매고/ 나도 쩔쩔매며/ 그를 본다/ 손끝 사이로 가뭇없이/ 빠져나갈 것 같다. 비틀어지거나/ 나비는 날개에 내 지문을 묻히고/ 화들짝 날아간다/ 내 손끝에는/ 반짝거리는 하얀 가루가 묻어 있다.//

나의 맹세 / 황인숙
나는 역경을, 불운을, 고통을/ 따뜻이 영접하지 않겠다.// 울음소리로 미루어/ 까마귀는 참 속깊은 새인 듯싶기도 하지만.// 아, 비천하게도 나는, 아씨 체질인 것이다./ 처지는 비록/ 아씨를 모셔도 시원치 않을지라도.//

기다려지는 카톡 / 황인숙
언제부턴가 카카오록을/ 자주 들어가게 되고 귀 기울이고/ 기다리게 된다 친구가 매일 보내오는 카톡/ 아름다운 시어와 아름다운 영상/ 사랑의 시어들 속에 빠저들어/ 마음 저리게 감동으로/ 잔잔하게 파도치는/ 영혼을 흔드는 시어들/ 기다려지는 카톡 귀 기울이고/ 친구에게서 보내온 카톡/ 또 다른 친구에게 카톡을 보낸다//

길 / 황인숙
『내셔널 지오그래픽』 포스터 속의 길은/ 피려는 것인지 지려는 것인지 모를/ 꽃송이들을 단 잡목 덤불 사이로 나 있다./ 아마 지려는 것인 햇빛 아래/ 잔돌이 구르는 비탈이다./ 온기가 가시지 않은 그 길은 멀리/ 안개와 구름에 싸인 산맥들과 하늘로/ 시선을 이끌어, 떨구고,/ 제자리로 돌아간다.// 내 시선이, 책방을 겸한 문구점이 있는/ 길거리의 길 위로 돌아오자마자/ 누군가 나를 향해 돌진하듯, 튀어오른다. 마주 걸어오는/ 그의 몸의 길은/ 험준하게 뒤틀려 있다./ 안개와 구름에 싸여.// 그 길 위에서, 그의 얼굴은 정면을 향해 있고/ 그의 눈의 길은 곧다./ 그래서, 그의 바른 자세는/ 더욱 비틀려 있다./ 힘껏 튈려고/ 휜 스프링처럼.//

꿈 / 황인숙
가끔 네 꿈을 꾼다./ 에는 꿈이라도 꿈인 줄 모르겠더니/ 이제는 너를 보면/ 아, 꿈이로구나./ 알아챈다.//

꿈들 / 황인숙
꿈에 나는/ 타이티나 지중해 아니면/ 제주 바다를 향해 떠난다/ 그런데 꿈에 나는/ 공항이나 비행기 안에서 혹은 대합실에서/ 시간을 다 보낸다// 꿈에 나는/ 거울을 본다/ 젊고 아리땁다!/ 나는 하염없이 거울을 본다/ 꿈이냐 생시냐 의문도 없이/ 그러다 잠이 깨면/ 거울을 본다/ 젊어서 뭐 할 건데?/ 별로 다행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딱히 할 일은 없다// 꿈에 나는/ 등장하지 않는다/ 아무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 꿈은 한 권의 책이다/ 꿈에서도 글자가 가물거려/ 이따금 나는 등장하지 않는 눈을 가늘게 뜬다/ 글자를 쓰다듬는 눈의 감각/ 문장을 핥는 뇌의 감각/ 끝내주는 글이군, 끝내준다/ 책장이 넘어간다/ 그러다 잠이 깬다/ 그 책이 아직 꿈속에/ 그대로 있을까./ 꿈에서 읽은 책은 누가 지은 것일까?// 꿈에 나는/ 하늘 흐린 바닷가에서/ 탐스럽게 커다란 조개들 본다/ 모래 속에 조개들이 지천이다/ 나는 허리를 구부리고 정신 없이 조개를 줍는다/ 앞자락이 축 늘어지도록 조개를 주워 담는다/ 그러다 잠이 깬다/ 꿈인 줄 알았으면 바다나 실컷 볼걸// 내 친구는 이런 꿈을 꿨다/ 구름의 거대한 성곽/ 위에 커다랗게, 커다랗게/ 떠오르는/ S-A-N-T-A M-A-R-I-A/ 하늘의 파아랑! 구름의 하아양!/ 터지는 심장!//

꿈에 깨다 / 황인숙
그것은 마른 꽃잎처럼/ 얇고 아주 가볍다.// 쓰디쓴 수액으로/ 아리고 통통하던/ 때도 지나고// 이제 기억에도 없다.// 물결에 흘러가다/ 찰나, 어른거렸는데// 모르겠다./ 언제였는지, 왜 그랬었는지,/ 그러기는 그랬었는지,/ 모르겠다./ 누구였는지, 나였는지/ 대체 무슨 일이었는지./ 꿈을 꾸기는 꾼 것인지.//

막다른 골목 / 황인숙
문은 헤맨다/ 열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토록 완강하게/ 그는 문을 흔들고 있다/ 문은 정신이 하나도 없다/ 그는 부술 듯이 문을 두드린다/ 문은 흔들리면서 마음을 굳혔다/ 난 몰라, 널 모른다고! 알고 싶지도 않고/ 그는 헤맨다/ 여태껏도 헤매다가 우연히 이 문을 만났다/ 그는 문을 두드리고 흔들면서/ 자기가 왜 이러는지 헤맨다/ 문의 완강한 거부만이/ 그의 완강함의 명분이다/ 깊은 새벽 막다른 골목길을/ 그와 문이 흔들고 있다.//

마침표 / 황인숙
찍는 것이지요./ 그리는 게 아니구요./ 질질 끄는 게 아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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