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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박소란 시인

by 부흐고비 2022. 7. 12.

박소란 시인
1981년 서울에서 태어나 경남 마산에서 자랐다.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09년 《문학수첩》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심장에 가까운 말』, 『한 사람의 닫힌 문』, 『있다』가 있다.

2015년 신동엽문학상, 2016 내일의 한국작가상, 2020년 노작문학상을 수상했다.

 



모르는 사이 / 박소란
​당신은 말이 없는 사람입니까/ 이어폰을 꽂은 채 줄곧 어슴푸레한 창밖을 내다보고 있군요/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를 태운 7019번 버스는 이제 막 시립은평병원을 지났습니다 광화문에서부터 우리는 나란히 앉아 왔지요/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나는 인사하고 싶습니다/ 당신이 눈을 준 이 저녁이 조금씩 조금씩 빛으로 물들어 간다고/ 건물마다 스민 그 빛을 덩달아 환해진 당신의 뒤통수를 나는 몰래 훔쳐봅니다/ 수줍음이 많은 사람입니까 당신은// 오늘 낮에 혼자 밥을 먹었습니다 행복한 사람들이 가득한 광장을 혼자 걸었습니다/ 언젠가 당신은 그곳에서 우연히 친구를 만난 적이 있지요 언제 밥이나 한번 먹자 악수를 나누고서 황급히 돌아선 적이 있지요// 나는 슬퍼집니다/ 당신은 곧 벨을 누르고 그렇고 그런 약속처럼 버스는 또 멈출 테지요/ 나는 다만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변덕스러운 오늘의 날씨와 이 도시와 도시를 둘러싼 휘휘한 공기에 대해 당신 무릎 위 귀퉁이가 해진 서류 가방과 손끝에 묻은 검뿌연 볼펜 자국에 대해// 당신은 이어폰을 재차 매만집니다/ 어떤 노래를 듣고 있습니까 당신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들리지 않는/ 그 노래를 나도 좋아합니다// 당신을 좋아합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문이 열립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당신이 유유히 문을 나섭니다 당신의 구부정한 등이 저녁의 미지 속으로 쓸려 갑니다// 우리는 헤어집니다 단 한 번 만난 적도 없이// 나는 인사하고 싶습니다/ 내 이름은 소란입니다//

빛의 주인 / 박소란
문틈으로 새어 나온 빛,/ 한 줄기 가느다란// 복도를 지나다 보았다/ 문 앞에 잠시 멈춰 빛의 연한 몸뚱이를 쓸어 보았다/ 아주 어리고 아주 순한 빛이었다// 그 빛의 주인을/ 나는 알지 못한다// 한동안 곁을 어슬렁거리던/ 빛은/ 꼬리를 흔들며 다가와 마른 손등을 핥는가 싶더니/ 어느새 나를 피해 멀찍이 달아났다// 어두운 복도를 종종종 걸어서/ 찬 허공을 사뿐사뿐 날아서/ 빛 쪽으로/ 빛 쪽으로// 빛은 서서히 멀어져 갔다/ 그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았다/ 빛은/ 돌아보지 않았다// 곧 문이 열릴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어두운 얼굴이 나를 불러 세워/ 빛의 행방을 추궁할 것이다//

온다, 온다, 온다 / 박소란
열심히 살아갑니다 모든 걸 끝장내려고/ 어느 날 어느 때/ 지금이구나, 더 열심히 끝장내려고// 머잖아 그날은 올 테니까// 버스를 타면/ 벽제까지는 고작 한 시간// 엄마, 죽은 엄마, 젖은 창밖을 내다보면/ 원치 않는 생각들이 은행나무 감은 두 눈을 비집고 나온 잎사귀처럼/ 눈물을 머금고 살이 오른 잎사귀처럼// 지난밤 취한 고백을 늘어놓던 그 남자는 오지 않는 거야 왜 전화하지 않는 거지// 나는 지금 벽제로 향하고 있고/ 이 길은 미치 소풍 같아// 웃으며 혼잣말을 합니다 맛있는 것도 사 먹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이건 아니지// 별안간 영정을 껴안고 찬 바닥에 엎드려 긍긍합니다/ 열심히 긍긍합니다// 머잖아 그날이 온다, 온다, 온다// 자정이 가까워 올 무렵 날아든 한 통의 전화/ 재빨리 몸을 일으켜/ 지금이구나, 달려가려고// 달리는 버스에 앉아/ 젖은 창밖을 내다보면/ 비쩍 마른 나무 아래 뒹구는 고약한 웃음/ 이건 아니다 이건 아니지// 열심히 살아갑니다 초록의 입술을 앙다무는 심정으로//

우연의 방 / 박소연
종로3가역 1번 출구 계단에서 느닷없이/ 우리가 만난 일/ 당신은 골뱅이호프로 나는 서울극장으로 총총히 걸음을 옮기다/ 어 안녕하세요, 어, 안녕, 인사를 건넨 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잠시 잠깐/ 서로를 바라본 일// 우리 둘 사이/ 구걸하는 노인이 낮은 음성으로 무어라 중얼거린 일/ 판타지의 한 장면 능통한 주문처럼/ 나란히 보조개를 맞춰 입은 어린 연인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고/ 안녕을 말하며 손을 흔들며/ 우리가 멀어져간 일// 낯선 숨결의 사람들 틈// 한참을 종종거리다 괜스레 멈춰 뒤돌아본 일// 당신은 왁자한 술자리로 나는 어둠 무성한 객석으로/ 자꾸만 가물대는 뒤통수를 비끄러맬 때/ 내가 당신을/ 당신이 나를 애써 부르지 않고 아득한 길 위에 놓아준 일// 그로부터 나는 / 제일만물 희부연 창가에서 종로지구대 담벼락에서/ 주름으로 얽히고설킨 탑골공원 구석구석에서 알은체/ 당신을 알은체하느라 쉴 새 없이 두 눈을 깜짝거리고 그로부터/ 내내 만지작거리던 우연을 가방 속에서 펼쳐 든 당신이 활짝/ 인사를 건네는 일// 안녕, 난생처음/ 깡통을 뚫고 나온 골뱅이처럼 영원히 엔딩에 닿지 않는/ 한 편의 영화처럼/ 서로가 서로를 향해 걸어가는 일//

울음의 방 / 박소란
불현듯 슬프다/ 너무 오래 울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어느 곳 어느 때 아주 사소한 흐느낌조차// 울기 위애 집으로 달려간, 그때는 스무 살/ 수업을 마치고 과제를 제출하고 사려 깊은 학생이 되어/ 조금씩 꼬깃해져가는 표정을 가방 깊숙이 밀어 넣고서 가까스로/ 열어젖힌 싸구려 자취방은 더없이 고요해/ 너무 낮고 너무 어두워 울음은/ 다름 아닌 여기에 살고 있음을 알았다// 마음이 타들어갈 때마다 기꺼이 방문을 열어 준/ 나의 울음, 엄마가 죽던 밤에도/ 사랑이 더운 손을 뿌리치던 마지막 순간에도 나는/ 그 방에 있었다 별이 들지 않는 방/ 아릿한 곰팡내가 명치를 꾹꾹 누르는 방// 울음의 방으로 내가 숨어들수록 울음은 아프고/ 어찌 된 영문인지/ 울음은 도무지 견디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증발하는 물기처럼 어느새 울음은/ 여기에 살 수 없음을 알았다/ 한 마디 인사도 없이 떠나갔음을/ 어디로 갔나 울음은/ 울음의 빈자리를 오래오래 뒤척이던 나는// 후미진 골목 끝/ 자취방은 헐리고 녹진 스무 살도 멀리 달아났으니/ 어디로, 말수가 적어 겉돌기만 하던 나의 울음은//

소요 / 박소란
사람이 있는 풍경,/ 그 한장의 사진을 본다// 눈이 오고 있으므로/ 사람은 서둘러 걸음을 옮긴다/ 눈은 쌓이고/ 사람은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휘청거린다// 풍경은 잠시도 멈추지 않는다/ 한 사람의 걸음으로 인해/ 풍경은 두근거림을 피하지 못한다// 나는 본다/ 반쯤 녹아버린 눈사람과 같은 표정으로/ 왜 이런 사진을 찍었나/ 왜 이런 사진을 들여다보나// 눈이 오고 있으므로/ 눈 속 몸부림치는 한 사람으로 인해/ 눈은 쌓이고/ 쌓일수록 거세고/ 사람은 기어코 넘어진다 강마른 무릎을 짓찧는다// 풍경 저 바깥 어딘가/ 손을 흔드는 또다른 사람이 있는가 어쩌면// 넘어진 사람은 일어선다/ 보이지 않는 사람으로 인해/ 사람은 걷는다/ 저 바깥 어딘가// 그러나 결코 당도하지 못할 한 사람을/ 나는 본다/ 눈이 오고 있으므로/ 눈이 그치지 않고 있으므로//

고장 난 저녁 / 박소란
주전자에 물을 끓인다/ 끓지 않는다/ 고장이다/ 이것 좀 먹어봐요/ 옆집에서 삶은 감자를 한 바구니 내민다/ 지나치게 감사한다 여러 번 머리를 조아린다/ 어디가 고장인 건지/ 가스레인지도 보일러도 켜지지 않는 저녁/ 멀거니 앉아 감자를 먹는다/ 설익어 설컹거리는 감자를/ 맛있게 먹는다/ 먹고 밤새 잔병이나 앓을 것/ 빈 바구니에 사과 몇 알을 가져다 담는다/ 군데군데 멍이 든 사과를/ 아무도 먹지 않겠지/ 다행이다, 빈 바구니를 생각하면/ 상하게 목이 메어/ 캑캑거리며 물을 마신다 끓지 않는 물을//

푸른 밤 / 박소란
짙푸른 코트 자락을 흩날리며/ 말없이 떠나간 밤을/ 이제는 이해한다 시간의 굽은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볼수록/ 이해할 수 없는 일, 그런 일이/ 하나둘 사라지는 것// 사소한 사라짐으로 영원의 단추는 채워지고 마는 것/ 이 또한 이해할 수 있다// 돌이킬 수 없는 건/ 누군가의 마음이 아니라/ 돌이킬 수 있는 일 따위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잠시 가슴을 두드려본다/ 아무도 살지 않는 낯선 행성에 노크를 하듯/ 검은 하늘 촘촘히 후회가 반짝일 때 그때가/ 아름다웠노라고,// 하늘로 손을 뻗어 빗나간 별자리를 되짚어볼 때/ 서로의 멍든 표정을 어루만지며 우리는/ 곤히 낡아갈 수도 있었다// 이 모든 걸 알고도 밤은 갔다// 그렇게 가고도/ 아침은 왜 끝끝내 소식이 없었는지/ 이제는 이해한다// 그만 다 이해한다//

심야 식당 / 박소란
당신은 무얼 먹고 지내는지/ 궁금합니다/ 이 싱거운 궁금증이 오래 가슴 가장자리를 맴돌았어요// 충무로 진양상가 뒤편/ 국수를 잘하는 집이 한군데 있었는데/ 우리는 약속도 없이 자주 왁자한 문 앞에 줄을 서곤 했는데/ 그곳 작다란 입간판을 떠올리자니 더운 침이 도네요 아직/ 거기 그 자리에 있는지 모르겠어요/ 맛은 그대로인지// 모르겠어요/ 실은 우리가 국수를 좋아하기는 했는지// 나는 고작 이런 게 궁금합니다/ 귀퉁이가 해진 테이블처럼 잠자코 마주한 우리/ 그만 어쩌다 엎질러버린 김치의 국물 같은 것/ 좀처럼 닦이지 않는 얼룩 같은 것 새금하니 혀끝이 아린 순간/ 순간의 맛// 이제 더는/ 배고프다 말하지 않기로 해요 허기란 얼마나 촌스러운 일인지// 혼자 밥 먹는 사람, 그 구부정한 등을 등지고/ 혼자 밥 먹는 일// 형광등 거무추레한 불빛 아래/ 불어 선득해진 면발을 묵묵히 건져 올리며/ 혼자 밥 먹는 일// 그래서/ 요즘 당신은 무얼 먹고 지내는지//

김밥천국 / 박소란
연인이 밥을 먹네/ 헝클어진 머리통을 맞대고 늦은 저녁을 먹네/ 주방 아줌마 구함 벽보에서 한걸음 물러나 정수기가 놓인 맨 구석 자리에 앉아/ 푸한 김밥 두어줄 앞에 놓고 소꿉을 살 듯/ 여자가 콧물을 훌쩍이자 그 앞으로 쥐고 있던 냅킨 조각을 포개어 내미는/ 남자의 부르튼 손이 여자의 붉어진 얼굴이/ 가만가만 허기를 달래네/ 때마침 식당 앞 정류장에 당도한 파주행 막차/ 연인은 김밥처럼 동그란 눈으로 젓가락질을 멈추네/ 12월의 매서운 바람이 잠복 중인 바깥/ 버스 뒤뚱한 꽁무니를 넋 없이 훔쳐보다 이내 버스가 떠나자/ 그제야 혓바닥 위에 올려둔 김과 밥의 부스러기를 내어 재차 오물거리네/ 흰머리가 희끗한 주인은 싸다 만 김밥 옆에서 설핏 풋잠에 들고/ 옆구리가 미어지도록/ 연인은 밥을 먹네 김밥을 먹네//

상추 / 박소란
퇴근길에 상추를 산다/ 야채를 먹어보려고/ 좀 건강해보려고// 슈퍼에서 한봉지 천오백원/ 회원 가입을 하고 포인트를 적립한다/ 남들처럼 잘 살아보려고// 어떤 이는 화분에 상추를 기른다는데/ 아 예뻐라 정성으로 물을 주면서/ 때가 되면 그것을 솎아 먹겠지// 상추를 먹으면/ 단잠에 들 수 있다는데/ 상추가 피를 맑게 한다는데// 나는 건강해질 것인가/ 상추로 인해/ 행복해질 것인가// 밥을 데운다// 냉장고에서 묵은 쌈장을 끄집어낸다/ 상추가 포장된 비닐을 사정없이 찢는다/ 찢은 비닐을 쓰레기통에 내동댕이치는 나는/ 행복해질 것인가// 상추는 나를 사랑할 것인가//

컵 / 박소란
컵은 아무 데나 놓여 있지/ 누가 여기에 컵을 가져다 놓았는지 몰라// 컵은 말이 없네// 살고 있을 뿐/ 컵의 나날을 다만 컵으로서/ 한컵 정도,라고 얼버무려 말할 때의 그 사소한 습관으로서// 컵은 텅 비어 있네// 어느 추운 날/ 우연히 만난 당신에게서 커피나 한잔 얻어 마실 수 있다면,/ 그런 꿈을 꾸는 게 아닐까 컵은// 잠시 웃네,/ 쟁그랑 소리를 내며/ 우는 순간도 오지/ 예의 그 사소한 습관으로서// 컵을 든 누군가/ 피 흘리며 아파하네 컵, 컵 하나 때문에// 이렇게 끝나버릴 줄은 몰랐어요, 숨죽인 파편을 멍하니 바라다보네// 누가 그로 하여금 컵을 들게 했는지 컵을 깨게 했는지/ 몰라// 그는 다만 커피를 한잔 마시고 싶었지 아주 따뜻한 커피를//

예감 / 박소란
나를 보는/ 저 눈,/ 저 불길한// 어떤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낮 속에 숨어/ 웃음의 어줍은 탈을 훔쳐 써 보지만 이를 악다물고 숨을 참아 보지만/ 보는 일은/ 보이는 일은 도무지 멈추지 않는다// 적의를 거두지 않는다, 지독해/ 집으로 가는 이 길// 마치 애원하듯/ 두 손 두 발을 저어 기껏 어항 같은 독방에 드는 것/ 제 속에 웅크려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것/ 어떤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이따금 꿈을 꾸지만/ 서늘한 벽 가장자리 작은 창을 하나 그려보지만/ 사위는 금세 어둠의 목을 조르고/ 피 묻은 자리 마다 깨진 거울이 내걸린다 보란 듯/ 나를 찌르는// 저 눈, 저 불길한// 나를/ 나는 너무 오래 견뎌왔다//

손이 없다면 / 박소란
잠 속에/ 손이 있다/ 그 손을 끌어다 잡는다// 다섯 개의 가느다란 리본으로 포장된/ 손은/ 누구의 것인가 누구의/ 선물인가// 알 수 없지만// 그 손을 끌어다 잡는다 잡고야 만다/ 나도 모르게/ 주먹을 쥐면 그만 꿈이 되어 부서져버릴 것 같은// 다만 눈을 감고서/ 죽은 사람처럼/ 감은 눈을 또다시 질끈 감고서// 밤은 견딘다/ 이토록 긴긴밤을// 손이 없다면/ 잠 속에/ 손이, 우리는 왜 고작 손인가 생각에 잠기는 손과 손이//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다만 눈을 감고서/ 감은 눈을 또다시 질끈 감고서//

어떤 여정 / 박소란
어느 날 마침내/ 우리가 아르항가이 고요한 초원에 서게 될 때/ 그때는 당신, 몇 마리 순한 양들을 몰고 내게로 와 줘/ 다부진 눈매의 유목민 사내가/ 오랫동안 아껴온 여인에게 청혼을 하러 먼 길을 나서듯/ 한발 한발 설레는 걸음을 걸어 어린 날의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그렇게/ 당신이 걷는 몇 날 며칠 그 낮과 밤 동안/ 세상의 꽃과 바람과 강물은 결코 잠들지 않아/ 옛날 옛적 무너진 어워의 돌무더기에도 흥건히 젖이 불어/ 그 속 발간 뿌리를 박고 자라나는 한 망울의 순정한 빛을/ 당신은 보게 될 테지 하지만 이내/ 청춘의 산록을 지나는 사이 걸음은 차츰 더뎌지고/ 고단한 시간의 짐을 짊어진 당신의 늘어진 어깨 위론/ 내지의 적막을 견디는 별들의 깊은 한숨과 절망이 스며들겠지/ 대지 곳곳 살아있는 것들을 온통 휘몰아 쓸듯 시린 어둠이 밀려들면/ 우리의 길은 그만 까마득 잊히고 말겠지 나의 게르는 먼지처럼 부서져/ 서쪽 산자락 어디쯤에선가 곡을 하듯 마두금 소리 울려 퍼지고/ 늙은 양들은 그대로 쓰러져 눈을 감겠지/ 서서히 식어가는 모닥불 앞에/ 홀로 앉은 당신은 소리 내어 엉엉 울게 될지도 몰라/ 꽃과 바람과 강물을 모조리 잃어버리고 이제 두 번 다시/ 아침은 밝아오지 않겠지/ 지난날의 쇠한 발자국들만이 아득한 곳에서 당신의 이름을 부르겠지/ 이미 당신은 없고 이생의 머나먼 길마저 한 편의 고약한 꿈으로 끝이 날 때/ 그때는 와 줘 내가 당신의 열두 번째 아내가 될게//

다음에 / 박소란
그러니까 나는/ 다음이라는 말과 연애하였지/ 다음에, 라고 당신이 말할 때 바로 그 다음이/ 나를 먹이고 달랬지 택시를 타고 가다 잠시 만난 세상의 저녁/ 길가 백반집에선 청국장 끓는 냄새가 감노랗게 번져나와 찬 목구멍을 적시고/ 다음에는 우리 저 집에 들어 함께 밥을 먹자고/ 함께 밥을 먹고 엉금엉금 푸성귀 돋아나는 들길을 걸어 보자고 다음에는 꼭/ 당신이 말할 때 갓 지은 밥에 청국장 듬쑥한 한술 무연히 다가와/ 낮고 낮은 밥상을 차렸지 문 앞에 엉거주춤 선 나를 끌어다 앉혔지/ 당신은 택시를 타고 어디론가 바삐 멀어지는데/ 나는 그 자리 그대로 앉아 밥을 뜨고 국을 푸느라/ 길을 헤매곤 하였지 그럴 때마다 늘 다음이 와서/ 나를 데리고 갔지 당신보다 먼저 마음이/ 기약을 모르는 우리의 다음이/ 자꾸만 당신에게로 나를 데리고 갔지//

내가 그랬다 / 박소란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어느 저녁/ 초대를 받아 참석한 자리의 타이틀은 ‘추모의 밤’이었다/ 누군가 울먹이는 음성으로 시를 낭독하고/ 낭독이 끝나자 박수를,// 박수가 끝나자 다 같이 노래를 불렀다/ 나도 그랬다// 내 어두운 방에 앓는 사람이 있다고 그를 혼자 두고 여기에 왔다고/ 말하지 않았다 저녁은 먹었어요?/ 얘야, 내 걱정은 말아라,/ 실은 아무것도 먹지 않고 멍하니 어두운 천장만 더듬고 있으리란 것// 시집을 들고 다가온 누군가 웃으며 인사를 건네고/ 나는 웃으며 사인을 하고/ 추모의 밤은 계속되는데// 나는 전화를 걸었다/ 속으로 이따금/ 시를 낭독한 사람은 아직 저만치서 울먹이는데// 금방 가요, 거의 다 끝이 났어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생전에 친분이 두터우셨죠? 누군가 묻고/ 나는 적당한 표정을 찾아 참 좋은 분이셨어요, 참 좋은…/ 그분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구석으로 가 숨듯이 앉아/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무심코 페이지 하나를 접는데/ 손끝에 피가 맺혔다 내가,/ 내가 그랬다 그 조그만 글자를 찔렀다/ 뜯고 뭉갰다// 버렸다/ 말하지 않았다// 앓는 사람이 있어요 그를 두고 나는 시를 썼어요//

검정 / 박소란
검정은 있다// 세수를 하고 수건을 집어 들 때나 젖은 손으로/ 쌀을 씻을 때 갓 지은 밥을 풀 때/ 검정을 본다// 수시로 고개를 드는 검정/ 방 곳곳에 숨어 있다 내가 다가가면 깜짝 놀래는 검정// 너는 대체 누구니?/ 늦은 시각 들른 어느 상가(喪家)에서 묻어온 것인지/ 제 몸만 한 개미를 지고 가던 개미인지 장지(葬地)의 흙인지// 손을 뻗어 잡으려 하면 이내 도망쳐 버리는 검정/ 뜻 모를 이름의 벌레처럼 수많은 발을 달고서// 나는 공연히 이불 밑이나 호주머니 속을 들춰 보게 되고/ 비명을 지르게 되고// 검정은 없지만, 분명/ 검정은 있다// 밤이면 쓰다 만 일기 속에 슬그머니 다가와 속삭인다/ 너는 대체 누구니?// 버려야겠다 이 어두운 방을,/ 생각하지만/ 문을 열면 이내 성큼 따라나서는 검정// 검정은 나를 입고 아주 잠시 외출한다//

맴맴 / 박소란
그 여름의 숲에서 당신은 물었지/ 낯선 초록을 멍하니 바라보던 내게 물었지/ 왜 우는가/ 왜 너는 울어야만 하는가// 짐짓 어리둥절한 채로 나는/ 초록 속으로 초록 속으로 쉼 없이 걸어들어가고/ 당신은 물었지/ 세상 가장 근심 어린 얼굴로/ 왜 우는가/ 무엇이 너를 울게 하는가// 나는 무거운 외투를 벗고/ 신발도 가방도 놓고/ 초록을 한 송이 꺾어 슬며시 주머니 속에 넣었지/ 오래오래 그것을 길러 볼 요량으로// 언젠가 한번은 당신을 초대할 요량으로// 당신은 물었지/ 왜 우는가/ 왜 우는가// 나는 그만 길을 잃고 싶었네, 무성한 초록 속에// 당신을 오롯이 남겨 두고// 슬픈 일은 모두 사라져/ 시간이여,/ 이제 달려간대도 나를 싣고 저 멀리 가버린대도//

사람의 얼룩 / 박소란
셔츠에 묻은 얼룩이 닦이지 않았다/ 얼룩이 진 셔츠를 입고 다녔다// 사람들이 쳐다봤다 은근슬쩍/ 더러는 대놓고/ 너는 더러운 셔츠를 입었구나/ 욕을 하고 침을 뱉은 건 아니지만,/ 셔츠는 더럽구나 너는/ 더러운 셔츠를 입은 사람 더러운 셔츠 사람 더러운// 셔츠는 더러운 셔츠였으므로// 가까이 오지 마시오/ 아무렇게나 구겨도 좋은// 가까이 오지 말라니까!/ 돌을 던져도 좋은, 그러면 얼굴도 없는 그 돌을 주워 오래도록 만지작거리면서// 셔츠는 셔츠를 입었다/ 더는 지울 수 없을 것 같은 얼룩을// 아무렴 어때,/ 될 대로 되라지, 하는 말을 달고 살면서 지긋지긋해, 하는 말도// 모든 게 하찮아져서/ 모든 게 하찮아지길 바랐다 진심으로// 더러운 셔츠 사람 더러운 사람 셔츠 더러운// 셔츠를 더는 입지 않아도 그만이지만// 사람,// 사람이 사람을 떠나도 그만이지만// 얼룩은 지워지지 않았다// 셔츠를 버리는 게 훨씬 쉬웠다 셔츠는/ 조금도 어렵지 않았다//

사고 / 박소란
처음엔 그냥 흉내만 내려 했어요 다 큰 어른 흉내/ 한낮의 변두리 모텔촌으로 차를 몰아/ 껌 씹을래? 아스팔트 바닥에 씹히다 만 껌처럼 문드러진 들짐승을 보고도/ 화들짝 놀라지 않을 때/ 비로소 어른이 된 것만 같았어요 그렇고 그런 어른이/ 되고 싶다고 더 빨리 늙고 싶다고 가볍게 체위를 바꾸듯/ 나는 생각했어요 당신 귓가에 아무 거짓말이나 속삭이며/ 닳고 닳은 사랑을 이야기하며 웃고도 싶었는데/ 그러면 당신은 슬픔을 도려낸 심장을 선물할 테죠 섹스 하러 가는 길/ 닳고 닳은 바퀴의 교성이 흐드러질수록/ 가방 속 꽃무늬 우산은 어째서 자꾸만 구겨진 몸을 들썩이는지/ 몰랐어요 끝까지 모르는 척 태연한 얼굴로/ 한 줄기 소나기가 먼지 낀 차창을 후려칠 때/ 아무렇지 않다고 나는 생각했어요 능숙한 어른이니까/ 비는 촌스러운 거라고 믿었어요/ 껌 씹을래? 그래요 뭐라도 씹고 싶었죠 그때/ 덜 자란 사슴 한 마리 갑자기 나타나 도로를 가로지를 때/ 화들짝 놀라 탁한 비명을 토해낼 때/ 나는 생각했어요 내가 지른 게 비명이라고/ 아무 거짓말이나 마구 쏟아냈어요 그냥 잠시 흉내만 내려 했는데/ 여기까지 오게 될 줄은 몰랐다고/ 이런 말은 아무래도 너무 촌스럽네요//

로드킬 / 박소란
죽은 것이 있다. 어쩌면/ 죽어가는 것이// 죽어가는 것은 무엇인가/ 너와 내가 어딘가를 향해 서둘러 갈 때/ 건널목에 나란히 서서 잠시 신호를 기다릴 때// 형체를 알 수 없는 것이 있다 어쩌면/ 형체를 알 것도 같은 것이/ 그러므로 징그럽고 무서운 것이// 그러므로 어쩐지 눈을 뗄 수 없는/ 그것이// 자꾸만 고개를 돌려 내가 그것을 볼 때/ 왜,/ 묻던 너의 얼굴은 괜스레 슬퍼지고// 아마도 나는 좋아하고 있다./ 비명을 지르는 척 속으로 탄성을 지르고 있다.// 깨진 컵/ 피 흘리는 손, 그런 손을 맞잡을 때/ 아마도 나는 사랑하고 있다.// 사랑하는 것은 무엇인가/ 컵인가 손인가/ 피 묻은 컵을 들고 웃는 나인가.// 나는 무엇인가/ 건널목에 나란히 서서 잠시 신호를 기다릴 때/ 핏발 선 너의 눈처럼 붉은 것이/ 그러므로 한없이 아름다운 것이 있다.// 너와 내가 땀에 흥건한 손을 맞잡을 때 그때/ 왜,/ 너는 내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가.//

애완동물 / 박소란
개 한 마리와 고양이 두 마리를 기르는 너는/ 그 애들과 한 침대에 누워 잠들고/ 아침이면 얼굴을 핥아대는 그 애들로 인해 잠에서 깬다고 한다./ 그 애들을 보고 있으면 괜스레 마음이 말랑해져서 이따금은 눈물이 핑 돈다고 한다.// 아 정말?/ 나는 커다랗게 뜬 눈을 거듭 깜박인다.// 어릴 때는 병아리를 기르곤 했는데 그 애들이 시름시름 앓을 적마다/ 학원도 가지 않고 곁을 지켰다고 한다./ 밤 사이 죽은 애들을 놀이터 구석에 묻었다고 한다./ 꽃삽으로 작은 봉분도 만들어주었다고 한다.// 오 세상에// 햄스터는 온순하지만 겁이 많고 기니피그는 쉽게 외로움을 탄다고 한다./ 잘 길들여진 고슴도치를 쓰다듬으면 가시를 바짝 눕혀/ 그 촉감이 무척 보드랍다고 한다.// 네 개의 발, 가느다란 꼬리와 복슬복슬한 털을 가진 것/ 그런 것들을 생각한다. 보풀이 인 쿠션이나 쿠션을 받아든 의자 같은 것/ 어깨가 기운 식탁 같은 것은 어떨까./ 소리도 표정도 없는 것 가만히 숨을 참는 것/ 나는 말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애들도 다 알겠죠./ 내가 없는 틈을 타 작은방 한켠에 웅크려 울기도 하겠죠.// 창밖에는 엉거주춤 외발로 서서 과자 부스러기를 쪼는 비둘기,/ 구구구구구 그 외로운 애에게 너는 다정한 인사를 건넨다.// 다음에는 우리 아쿠아리움 쇼를 보러 가요 흰동가리나 에인절피시를 구경해요./ 그리고 한강에 가서 유람선을 타요 저녁에는 치킨에 맥주를 마셔요./ 잘 정돈된 머리칼을 살랑이며 너는 웃는다 나도 따라 온순한 웃음을 짓는다.// 헤어지는 길에 너는 조그만 화분 하나를 건네고, 선물이에요./ 그 붉고 푸른 것을 두 손으로 받아든 나는/ 집으로 가는 내내 알 수 없는 걱정에 휩싸여/ 멀리서 들려오는 순찰차의 사이렌 소리에도 별안간 놀란다./ 걷다가 또 걷다가/ 어느 가로등 아래 내가 아는 가장 환한 곳에 그 애를 살며시 놓아주기로 한다.//

주소 / 박소란
내 집은 왜 종점에 있나// 늘// 안간힘으로/ 바퀴를 굴려야 겨우 가닿는 꼭대기// 그러니 모두/ 내게서 서둘러 하차하고 만 게 아닌가//

노래는 아무것도 / 박소란
폐품 리어카 위 바랜 통기타 한채 실려간다/ 한시절 누군가의 노래/ 심장 가장 가까운 곳을 맴돌던 말/ 아랑곳없이 바퀴는 구른다/ 길이 덜컹일 때마다 악보에 없는 엇박의 탄식이 새어나온다/ 노래는 구원이 아니어라/ 영원이 아니어라/ 노래는 노래가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어라/ 다만 흉터였으니/ 어설픈 흉터를 후벼대는 무딘 칼이었으니/ 칼이 실려간다 버려진 것들의 리어카 위에/ 나를 실어보낸 당신이 오래오래 아프면 좋겠다//

공사 중 / 박소란
시끄러,/ 너무 시끄럽다/ 귀를 틀어막게 되는 소리// 굴착기가 아스팔트를 뚫는 것 같은데/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 모르겠다// 붉은 라비콘이 줄이어 서 있고/ 야광 조끼를 입은 사람이 다급히 경광봉을 흔드는데/ 마스크를 쓴 사람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데// 어디서 뭘 부수고 만드는지 모르겠다/ 어디서 뭘 만들고 부수는지// 모르겠다// 흙먼지가 날아와 눈을 감긴다/ 입을 막는다// 탁한 비명이 새어 나오고// 어디서/ 저 높은 위에서 아래로 사정없이 떨어진 사람이 있는 것도 같은데// 돌아가시오,/ 태연한 표지판과/ 유모차를 미는 사람 배드민턴을 치는 사람// 조금은 안심할 수 있다/ 발치로 날아든 셔틀콕을 주워드는데/ 구부러진 깃털 하나가 천천히 가라앉는데// 자갈처럼 쏟아지는 빗방울 다리를 절며 뛰는 고양이// 질끈 눈 감을 수 있다// 서둘러 걸음을 옮기는데/ 집으로 가는 방향을 헤아리는데 어리둥절/ 귓가에 맴도는 소리// 집까지 쫓아와/ 보란 듯 창문을 닫는 소리// 조금은 음미할 수 있다 아 시끄러, 하면서/ 하루의 피로를 씻는다// 하릴없이 가슴 안쪽을 더듬거리는데/ 아무 구멍도 잡히지 않는데// 모르겠다/ 모르겠다// 모르는 것은/ 신비롭고 아름답다고 믿는다//

무서운 이야기 / 박소란
귀신 영화를 보고 밤늦게 집으로 돌아온 너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너무 무서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잖아 꼭 누가 숨어 있는 것 같잖아 언제 불쑥 눈앞에 나타나/ 날 찾았니? 속삭이기라도 한다면//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푸석한 얼굴로 일어나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지하철 승강장에선 헛것을 보았고 회사 엘리베이터가 잠시 작동을 멈췄을 땐 비명을 지를 뻔했다고 한다// 전화기 속 너의 목소리는 점점 떨리고 나는 괜히 뒤를 한번 돌아본다// 아무도 없어, 아무도// 빈 집에 돌아와 불을 켰을 땐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고 한다/ 알지?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의 그런 분위기/ 실은 좀 울었다고 한다// 늘어진 몸을 간신히 일으켜 노트북 전원 버튼을 누르는 너의 모습을 떠올리며// 나도 모르게/ 귀신 생각을 하고 귀신 꿈을 꾸고// 마지막까지 죽지 않는 자는 누구일까/ 귀신일까 사람일까 너는 언제부터 혼자 영화를 본 거야?// 넷플릭스를 보며 맥주를 마신다는 너는/ 벌써 취한 듯 킬킬거린다// 오늘은 칼퇴 했으니/ 어서 자야 하는데 내일 아침 일찍 중요한 회의가 있는데/ 근데 이 영화 재밌다/ 정말 재밌어// 괴상한 웃음소리/ 밤의 긴 머리칼을 천천히 쓸어 넘기는// 네가 웃는 게 좋아서 전화를 끊지 못하는 나는/ 그래서 말인데,/ 인터넷에서 찾은 무서운 이야기를 불쑥 시작한다//

문병 / 박소란
마지막이라고 했다 더는 볼 수 없을 거라고/ 어째서?/ 나는 묻지 않았다// 어째서?/ 울음을 터뜨리며 황급히 문을 나서는 사람의 등을 두어 번 쓸었을 뿐// 병상에 누운 그가/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반쯤 감긴 눈이 빛났다// 물을 마시고 싶다고, 차가운 물을/ 더듬거리는 그 말을/ 쉬고 싶다는 것으로 나는 들었다// 남은 한 모금이 시든 목을 온통 적시는 동안// 기도하지 않았다/ 어떤 이야기도 시작하지 않았다 그냥 멀찍이 서서/ 그의 몸에 핀 알록달록한 반점들이 내게로 옮겨오는 상상을 했다// 봄의 빈소에 여름이 찾아와 절을 하는 상상을 했다/ 검은 옷을 걸치고 선 계절들 사이// 환하게 웃는 영정을 열고/ 그가 손을 내밀었다/ 어째서?// 지우지 못한 얼룩이 끝내 무지개를 만드는지// 그가 손을 잡아 주었다/ 굵다란 링거 줄이 가닥가닥 돋아난 손은/ 참 크고 따스하구나// 잘 가// 그가 인사해 주었다// 그가 내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결벽증 / 박소란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이 무서워/ 가서는 오지 않는 것들// 문 밖에서 멀어지는 한 사람의 발소리를/ 오래 들었지/ 알몸으로 누워// 우는 사람은 아픈 사람/ 아마도 그건/ 시간에 대한 병// 너는 어디로 갔니// 물을 때마다/ 시계는 걸음을 재촉해 걷는 법을 잊고/ 달리는 사람처럼/ 사는 법을 잊고 그제야 살 수 있는 사람처럼//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닐 텐데, 사랑은/ 희고 빳빳한 삼베 같은 것// 또한 아닐 텐데// 훗날/ 남몰래 흙을 열고 나와 강파른 산길을 헤매는/ 나를 보았지/ 바랜 삼베 저고리를 풀어헤치고서// 나는/ 나는 어디로 갔니//

감상 / 박소란
​한 사람이 나를 향해 돌진하였네 내 너머의 빛을 향해/ 나는 조용히 나동그라지고// 한 사람이 내 쪽으로 비질을 하였네 아무렇게나 구겨진 과자봉지처럼/ 내 모두가 쓸려갈 것 같았네/ 그러나 어디로도 나는 가지 못했네// 골목에는 금세 굳고 짙은 어스름이 내려앉아// 리코더를 부는 한 사람이 있었네/ 가파른 계단에 앉아 그 소리를 오래 들었네/ 뜻 없는 선율이 푸수수 귓가에 공연한 파문을 일으킬 때// 슬픔이 왔네/ 실수라는 듯 얼굴을 붉히며/ 가만히 곁을 파고들었네 새하얀 무릎에 고개를 묻고 잠시 울기도 하였네// 슬픔은 되돌아가지 않았네// 얼마 뒤 자리를 털고 일어나 나는, 그 시무룩한 얼굴을 데리고서/ 한 사람의 닫힌 문을 쾅쾅 두드렸네//

목 / 박소란
목이 자라났다 한숨 자고 일어났더니/ 목이/ 천장에 닿을 만큼 쑥쑥 길어져// 긴 것은 기차 기차는 빠르다// ​나는 어디론가 실려가고 있었다/ 빠르게 빠르게/ 시간은 굉음의 바퀴를 굴렸다// 동물원 같은 곳으로 가려나보다/ 기린처럼 매여 어슬어슬 풀을 뜯어야지/ 사람들이 몰려와 손가락질을 하면 더 부지런히 뜯어야지// 이런 틈에도/ 목은 계속해서 자라나// 빠른 것은 비행기 비행기는 높다 높은 것은// ​천장을 뚫고 허공 가운데 쑥쑥 길어져// 하늘은 푸르다 푸른 것은// 슬픔으로 가득 차올라// 한숨 자고 일어났더니/ 나는 보이지 않고 어디론가 실려가고 없고/ 목은/ 나의 목은// 괜스레 먹먹해진 목청을 가다듬고 앉아/ 노래를 불렀다// 노래만 불렀다//

​골목이 애인이라면 / 박소란
방금 마트에서 나온 여자, 그녀가 품에 안아 든 것이/ 아기 라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채로 바스락바스락 웃는다면// 그녀 곁을 스쳐 쌩하니 멀어지는 것/ 강아지라면/ 언제 그랬냐는 듯 꼬리를 흔들며 다가와 그녀의 낡은 슬리퍼를 핥아준다면// 슬리퍼를 탈탈탈 끌며 집으로 돌아가는 여자// 그녀의 꽁무니에 붙은 저 어둠의 무늬가 실은/ 빛이라면/ 밤마다 빛의 자그만 손이 한땀 한땀 떠 선물한 스웨터라면// 텅 빈 골목이 애인이라면/ 그녀를 기다리다 어떤 생각에 골똘히 잠긴 그를 향해/ 힘껏 달려간다면// 사소한 웃음소리가 잠지 골목 어귀에 머물다 팔짱을 낀 채로 천천히 멀어진다면// 어느새 그녀는 불 앞에 서서 라면을 끓이고/ 익었나 안 익었나 면발을 건져 후후 불며/ 있잖아 요 앞 사거리에서 길 잃은 강아지를 봤어, 아냐 어쩌면/ 강아지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아닐지도 모르겠다// 집이 그 커다란 눈을 반짝이며 그녀를 바라본다면/ 식탁의 표정은 더없이 따스해/ 덥석 애인의 손을 잡은 그녀는/ 가자, 지금 데리러 가자//

메리 크리스마스 / 박소란
내가 가진 가장 두꺼운 옷,/ 옷을 떠올린다/ 그것을 입으면 춥지 않으리// 나에겐 오래된 점퍼가 하나 있고 장롱 가장자리 때를 기다리듯 잠잠히 걸려 있고// 언젠가 세일 중인 백화점 앞 매대에서 고른 것/ 그것을 입으면 춥지 않으리// 하얀 패딩에 하얀 모자가 달린 것 앞자락 플라스틱 단추가 어느 선한 이의 눈망울처럼 빛나는 것// 눈 쌓인 창밖으로/ 처연한 햇살이 젖은 성냥을 만지작거리는 빌딩 너머로// 영하의 날은 계속될 것이다 옷,/ 옷을 떠올린다/ 그것을 입으면 춥지 않으리// 뒤뚱거리며 걷다 무심코 디딘 빙판에 벌렁 나동그라진대도 한참을 그대로 멈춘대도/ 춥지 않으리// 슬프지 않으리, 보세요 엄마/ 눈사람이에요 완전히 얼어붙은/ 사람이에요 공연히 빈 놀이터를 기웃대던 아이는 신이 나 웃고// 아이도 엄마도 춥지 않으리/ 장롱 속 웃을 꺼내어 입기만 하면//

개를 찾는 사람 / 박소란
누구에게나 개는 있습니다/ 어떤 개는 별안간 사라집니다 알 수 없는 곳으로// 개란 원래 그런 것입니다/ 개의 세계를 온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라진 개를 잊지 못합니다 잊지 못해 병이 들곤 합니다/ 어떤 사람은/ 개가 되고 싶습니다 사람을 버리고, 고작/ 사람을// 개의 보드라운 털과 먼 곳을 응시하는 눈빛 같은 것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는 차츰 개를 닮아갑니다/ 개처럼 곤히 웅크리거나 또 금세 몸을 일으켜 컹컹 짖곤 합니다/ 컹컹 울곤 합니다/ 그 모습을 알아채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개는 어디에 있나요 잃어버린 개를 찾는 사람은/ 전봇대에 나붙은 전단을 물끄러미 들여다봅니다 칠흑의 혀를 빼문 골목을 서성이다 맥없이 주저앉곤 합니다/ 다시 네발로 터덜터덜 돌아와 눕곤 합니다// 영원을 생각합니다 다른 무엇도 아닌 개로 인해/ 신은 존재합니다/ 당신은 왜 개의 얼굴을 하고 있습니까 신이시여/ 개의 얼굴로 기도합니다//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숙인 사람 곁으로 앙상한 뼈다귀를 입에 문 사나이가 다가와 넌지시 속삭입니다/ 개는 돌아올 것입나다 개를 찾는 사람에게로/ 어느날 문득 예의 희고 기다란 꼬리를 흔들며, 안녕// 보이지 않는 개가 한 사람을 유유히 끌고 갑니다// 어떤 사람은 별안간 사라집니다//

슬픔의 최선 / 박소란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묻는다// 많이 힘들지? 걱정스러운 얼굴로 위로를 건네기도// 아무 일도 없었어요 아무 일도,/ 믿지 않는다// 슬픔을 응원하는 사람들/ 힘을 내요 조금 더, 더, 더// 슬플 수 있도록// 웃는 사람들/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 서로의 어깨에 묻은 머리카락 같은 걸 떼어 주면서// 난롯가에 붙어 앉아 불을 쬔다/ 연한 입김이 서린/ 유리 벽 바깥 실금처럼 스케치 된 겨울의 풍경/ 뭐해요 들어가지 않고?/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건다면/ 그냥요/ 얼버무리고 말겠지만 슬픔은// 유리 벽 바깥에 혼자 서 있다 코트를 여미고 빈 주머니를 더듬거리면서/ 뒤돌아 먼 곳을 본다// 사람이 살지 않는 곳/ 눈발이 나부끼자마자 사라지는/ 空中//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는데, 차고 투명한 손이/ 인사하듯/ 슬픔의 물크러진 뺨으 할퀴고 간다//

774 / 박소란
도로에 놓인 기다란 화살표,/ 흰 천으로 감싼 한 구의 시신이라는 것을 알았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어디론가 쉼 없이 달려가면서// 장사(葬事)는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수차례 밟고 뭉개는 바퀴에도/ 죽지 않고,/ 죽음은 왜 죽지 않는 걸까/ 벌써 오래 전 불에 살라 버렸는데 깊은 곳을 찾아 묻었는데// 버스를 타고 있다/ 자리마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 충혈된 눈으로 허공을 더듬는 사람들// 어서 빨리 내려야겠다고/ 오늘은 불광동에서 저녁 약속이 있고 남자를 만나 술도 한 잔 할 것이다/ 취기가 오르면 아낌없이 웃다가 어느 순간/ 울상이 되어 귀가할 것이다// 다시 버스에 올라// 어리둥절 노선을 확인하면서/ 계속해서 일정한 방향을 바라보면서// 나는 가고 있다/ 괴이한 영혼을 따라, 아니다/ 실은 그냥 아스팔트에 그려진 화살표 하나를 좇아/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누군가 넌지시 일러준다/ 거의 다 왔다고, 거의 다/ 순대국밥 현란한 간판이 보이고 사람들은 주섬거리며 내릴 채비를 한다/ 벽제다//

벽제화원 / 박소란
죽어가는 꽃 곁에/ 살아요// 긴긴낮/ 그늘 속에 못 박혀// 어떤 혼자를 연습하듯이// 아무도 예쁘다 말하지 못해요/ 최선을 다해/ 병들 테니까 꽃은// 사람을 묻은 사람처럼/ 사람을 묻고도 미처 울지 못한 사람처럼// 쉼 없이 공중을 휘도는 나비 한 마리/ 그 주린 입에/ 상한 씨앗 같은 모이나 던져주어요// 죽은 자를 위하여// 나는 살아요 나를 죽이고/ 또 시간을 죽여요//

신앙생활 / 박소란
누가 달라질 수 있을까/ 이렇게 단단한 걸// 이렇게 생생한 걸/ 밤이면 더 잘 알 수 있지/ 둥근 어둠 속/ 쉼 없이 움직이는 사람 울고 웃고 춤추고/ 사랑하는 사람// 저기 저 첨탑 끝/ 진아, 보이니?/ 어린 조카는 창가로 달려가 이리저리 바깥을 살피고/ 어디? 어디? 묻다가 금방 싫증을 내고// 거실 바닥에 팽개쳐둔 장난감을 만지작거리다가// 보이지 않니?/ 저기 사람, 사람이// 흰 날개를 팔랑이며/ 나를 보고 있잖아/ 우리는 자꾸 눈이 마주치고, 눈을 감으면/ 더 잘 알 수 있지// 예기치 않은 한순간/ 빛으로 얼룩진 창을 뚫고 거세게 날아든 공/ 진아?/ 진아, 괜찮니?// 피를 흘릴 때마다/ 너는 네 낡은 장난감을 더 꽉 껴안게 되겠지/ 이렇게 진짜인 걸/ 진아?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걸// 아무것도 깨어지지 않고 잠시 울고 나면// 공은 어디론가 또 날아가잖아/ 날아갔다 날아오잖아// 상처를 닦지 않은 손에// 힘껏 쥐면/ 이렇게 따뜻한 걸 꼭 살아 있는 걸//

깊이 좋아했던 일 / 박소란
산에 한그루 나무를 심었다/ 비좁은 화분에 듬쑥한 잎이며 가지를 거머안고 신음하던/ 나무// 언젠가 깊이 좋아한 사람에게 선물로 받은 것인데/ 내게서 시들어버리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던 것인데// 이제 산에서 쑥쑥 자라렴 화분 같은 건 잊고// 누군가에게 이 일을 이야기하자 웃으며 그는/ 유기(遺棄)로군, 말했다// 유기로군, 나는 웃지 않았다// 산을 떠올렸다/ 나무를 품은 비옥한 흙과 바람과 햇살 같은 따스한/ 그 산의 모든 것들// 정말일까 그러나// 산은 정말 산일까 흙과 바람과 햇살은,/ 그 사람은/ 지금 청청한 빛으로 살고 있을까// 좋아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깊이 좋아한다는 것은// 막무가내로 엉긴 생각의 뿌리가 풀리지 않았다// 산에 올랐다/ 나무를 찾아 한참을 두리번거렸지만/ 나무는 보이지 않고, 산에는 나무가 너무 많아/ 이토록 많은 나무는 누구의 소행일까// 썩어 비틀어진 등걸에 맥없이 주저앉았다// 산의 부름을 받는 일이 남았다//

끈 / 박소란
잡을 수도 놓을 수도 있다// 짐짓 골똘한 표정으로/ 헐거운 매듭을 만지작거리며 답을 미룰 수도 있다// 나는 지금/ 교외로 향하고 있다 버스는 이상하리만큼 굼뜨고/ 창밖 도로변에는 꽃들이 빽빽이 심어져 있다 이상하리/만큼/ 눈이 부셔// 슬며시 훔쳐다 감거나 묶을 수도 있다/ 괴성을 지르며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사랑할 수도 있다// 사랑은 아닐 수도 있다/ 엉클어진 시간을 풀 수도 그냥 내버려둘 수도 있다// 적당한 크기와 모양으로 조각을 내어/ 아무 바닥에나 던져버릴 수도 있다/ 오래 벼린 칼이 있고 마침 칼은 가방 속에 있고// 나는 지금/ 교외로 향하고 있다 끈과 칼은/ 이상하리만큼 닮았고// 끊을 수도/ 더 잘 끊을 수도 있다// 울 수도 웃을 수도 있다//​

눈곱 / 박소란
내가 사랑한 건 당신의 눈곱/ 후미진 곳 자그맣게 돋아난 한 포기 이끼 같은 것// 이 어두운 것을 꽃이라 하자 우리 긴긴 그늘을 쏙 빼닮은 이름을 붙여/ 아무도 부르지 않는// 그 속에 숨어 천천히 병들고 싶었지/ 영영 차도를 모르는 나의 병 영원의 병// 어느 날 희고 아름다운 손가락 하나 눈가로 향했을 때 슬며시 눈가에 끼인 것을 훔쳐냈을 때// 잠시 거울을 보고 온다 하던 당신은/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고 두 번 다시 어떤 슬픔도 돋아나지 않아// 오래도록 화분에 물을 주었지/ 한번 들이켜면 장님이 된다는 물 영원의 물// 화(造花)라고 새겨진 팻말을 나는 본 적이 없었지//

정다운 사람처럼 / 박소란

화를 내는 것 굳게 팔짱을 끼고 성마른 등을 보이는 것// 이제 막 하나의 심장을 받아 소용돌이치는 사람처럼 이별을 모르는 사람처럼// 미안, 하면 눈물이 돈다 처음부터 미안을 기다려온 사람처럼 단지 미안만을/ 고개를 떨군 채 말없이 내민 손을 붙드는 것// 비 갠 오후 성당 돌담길은 더없이 평온해/ 세상 마지막 인사인 듯// 물기 번진 잎사귀를 매달고 걷는 것/ 바람이 살랑이고 슬며시 웃음이 고이고 잠시 잠깐 기도를 떠올리는 것// 토라졌다 때마침 화를 푼 사람처럼/ 하늘의 표정은 맑고 사랑에 빠질 듯 자꾸만 찰랑거리고 모든 게 그만 괜찮아/ 괜찮아, 하면 눈물이 돈다// 이별을 모르는 사람처럼 살아 이토록 정다운 사람처럼//

울지 않는 입술 / 박소란
입술을 주웠다/ 반짝이는 입술이었다// 언젠가/ 참 슬픈 노래로군요, 말했을 때 그 노래가 흘리고 간 것은 아닐까/ 넌지시 두고 간 것은 아닐까// 서랍 깊숙한 곳 아무도 모르게 숨겨 둔 입술// 취해 돌아온 날이면/ 젖은 손으로 입술을 꺼내어 한참 동안 어루만졌다/ 컴컴한 귀를 두고 입술 앞에 무릎 꿇기도 했다노래하지 않는 입술, 나를 위해/ 울지 않는 입술/ 입술에 내 시든 입술을 잠시 포개어 보고도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그 붉고 서늘한 것을/ 돌려주어야지 슬픔의 노래에게로 가져다주어야지// 내 것이 아닌 입술// 여느 때와 같이/ 침묵의 안간힘으로, 나는/ 견딜 수 있다//

이 단단한 / 박소란
공중에서 벽돌 한 장이 떨어졌다 발치에 닿은 이 단단한 것/ 이 캄캄한 것/ 이것은 과연 벽돌이고// 나는 조금도 부서지지 않았다/ 여전히 아스팔트 위를 걷고 여전히 살아 있다, 마치 죽은 듯/ 벽돌을 닮았다// 괜찮아요, 또 금세 잊겠죠, 같은 말을 한다/ 무던한 사람이라고, 당신은 나를 그렇게 기억하면 좋겠다// 벽돌에게도 밤은 있고/ 또 그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며 아픈 기도의 문장을 읊조리기도 할 테지만/ 그것은 단지 벽돌의 일/ 당신과는 무관한 일/ 미안해하지 않아도 좋아요, 같은 말도 한다// 당신은 여전히 아스팔트 위를 걷고 여전히 살아 있다/ 벽돌의 바람대로// 아름다운 사랑을 한다 시를 쓴다아름다운 시는 거리 곳곳을 날고 그러다 지치면 당신 품에 들어 쉰다// 나는 과연 벽돌이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이따금 몸을 던진다/ 당신은 벽돌을 던진 적이 없다//

이명(耳鳴) / 박소란
그의 귓속에 작은 집 한 채 짓고 싶었네/ 꽃 피고 잎 돋아 무성한 한때/ 몇 마리 이름 없는 새들 약속처럼 날아와/ 알을 품고 기르듯/ 우묵한 둥지 하나 틀고 싶었네/ 긴 한숨이 그의 몸을 들고 날 때마다 더욱 아득해지던/ 어느 기슭, 꿈꾸듯 홀로 누워/ 검게 충혈된 천장을 올려다보면/ 이내 바스러져 내릴 듯한 마음의 지푸라기들/ 그를 지탱해온 시간의 여린 어깨들/ 가만가만 토닥여주고 싶었네/ 그의 바깥을 맴돌던 노래 죄다 불러들여 놀아도 좋을/ 다정한 집 한 채/ 나는 그 속 헛것처럼 앉아 오래오래/ 알을 품고 싶었네/ 빛을 문 새들이 하나둘 알을 깨고 일어나/ 축포처럼 환한 울음 터뜨릴 때/ 나도 따라 울고 싶었네/ 언젠가 닿지 못한 말, 그 한마디/ 오랜 잠을 떨치고 와 마침내 훨훨 날아오를 때까지/ 끝없는 환열로 먹먹히 차 오를 때까지/ 오래오래 울고 싶었네//

​불쑥 / 박소란
불쑥, 이라는 말이 좋아// 불쑥 오는 버스에 불쑥 올라 불쑥 아는 사람을 만나는 일/ 그런 일이 좋아// 나는 그에게 사랑을 고백할 텐데 불쑥 우리는 사랑할 텐데// 고단을 가득 태운 버스가 우리를 창밖으로 내팽개친대도그리고 모른 체 달려간대도/ 우리는 깔깔 웃을 텐데 별일 아니라는 듯// 이봐, 이걸 보라구, 여기 불쑥이란 게 있다구/ 아하, 그렇군!/ 걱정 없을 텐데// 이제부터 나는 불쑥이 될게, 실없는 농담을 해도 그는/ 고개를 끄덕일 텐데/ 어이 불쑥, 반색하며 불러줄 텐데// 그러면 대답할 텐데 응, 하고/ 불쑥이 대신// 불쑥은 내가 될 텐데/ 나는 불쑥 뒤에 숨어 숨바꼭질처럼 살 텐데// 우리는 깔깔 웃을 텐데 별일 아니라는 듯// 불쑥 왔다 불쑥 갈 텐데 술래도 모르게 나는, 멀리 저 멀리 갈 수 있을 텐데//

시 쓰는 남자 / 박소란
노트 위에 평생을 골몰했네/ 힘겹게 써 내려간 다열종대의 행과 행 사이에서/ 그는 자주 길을 잃었네 어쩌면/ 마흔 일곱 혹은 여덟 번째로 향하는 급커브에서는/ 펜을 꺾었어야 했는지도 돌연/ 야근이 끝나고 돌아갈 곳이 떠오르지 않던 부랑의 밤/ 어둠 쪽으로 한껏 몸을 낮춘 옥상 난간에 서서/ 그는 실로 오랜만에 휘파람을 불었네/ 쇳 쇳 쇳소리가 자맥질치는 허공을 응시하다 그대로 풍덩/ 어둠 속에 온몸을 찔러 넣었네, 넣을 것이었네 그 순간/ 그가 본 건 한때 꾸었던 푸른 꿈의 심상들/ 누구나 한번쯤 노래했던 별, 별 같은 것 우수수/ 아무렇게나 떨어져 야윈 꽁지를 파닥이고 있었네/ 그는 왜 마침표를 찍지 못했나 이토록 오래 주저해야 했나/ 어떤 비유로도 건널 수 없는 나날들을 수없이 쓰고 지우며/ 절망의 습작만을 되풀이하며/ 그는 살았네 산다는 건 정체불명의 메타포/ 조악한 모음과 자음으로 띄엄띄엄 써 내려간/ 비문투성이 시, 아무도 읽은 적이 없는/ 그는/ 아직 노트를 덮지 않고 있네//

없다 / 박소란
우체통을 들여다본다/ 길들여지지 못한 짐승의 아가리처럼 깊고 어둔 곳/ 어떻게 알았을까 당신은/ 이곳에 주소가 없다는 것을// 집이 없다는 것을/ 상기된 표정으로 커튼을 열어젖히는 얼굴이/ 발갛게 피어나는 식탁이 풋잠을 머금은 나릿한 하품이/ 없다는 것을 벌써 오래 전/ 아침은 이곳으로 오는 길을 잃었다는 것을// 밤의 우체통을 들여다본다/ 주린 속 깊숙이 손을 찔러 본다/ 짐승은 파르르 떠는/ 또 다른 짐승의 야윈 손을 물고 놓아주지 않는다/ 짓궂은 장난 같은 차가운/ 피, 피가 흐르고// 당신은 어떻게 알았을까/ 울음이 없다는 것을/ 컹컹 짖는 법을 나는 배운 적이 없다는 것을// 오랜 침묵의 우체부인 당신은 어떻게/ 어떻게 알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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