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경 시인, 번역가 1976년 서울 출생. 한양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다. 2004년 《시와세계》로 등단해 시인이자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와 옮긴 책으로 『밥 딜런: 시가 된 노래들 1961-2012』, 『등에』, 『창세기 비밀』 등이 있다. 제20회 김준성문학상을 수상했다. 흡혈귀 / 서대경 흑백의 나무가/ 얼어붙은 길 사이로/ 펄럭인다// 박쥐 같은 기억이 허공을 난다/ 모조리 다 헤맨/ 기억이 박쥐로 태어났다// 나는 이간의 피를 먹지 않는다/ 내가 두 손가락을 입에 대고/ 휘파람을 불면// 박쥐가 내 어깨에/ 내려앉기/ 까지 한다// * 2004년 《시와세계》 등단작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 / 서대경 공장 지대를 짓누르는 잿빛 대기 아래로 한 사내가 자전거를 타..
뽀득뽀득 눈을 밟고 온 택배 상자를 열었다. 마른 대추 한 봉지와 함께 잘게 잘린 나뭇가지가 한가득 담겨 있었다. 가을걷이를 끝낸 마른 고춧대다. 언니가 보낸 선물이다. 쓸모없는 고춧대를 왜 보냈을까. 궁금증 해결은 잠시 미뤄두고 무엇보다 고춧대를 보니 언니 오빠들과 다정했던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우리 집은 꼭 휴일에 고추를 심었다. 호락질하시던 부모님의 일손을 돕는 날이면 한가하던 들판이 모처럼 분주해졌다. 도랑물 퍼 담는 소리, 종달새처럼 종종대는 발자국 소리, 숲속 바람까지 슬그머니 우리 곁으로 내려왔다. 밭이랑은 반짝이는 땀방울로 푸르게 메워졌고, 시들시들 눕던 고추 모종도 단물 한 모금에 화답하듯 화들짝 일어섰다. 고추를 다 심고 나면 오빠가 대장이 되어 작은 둠벙으로 먼저 들어갔다. 줄줄이 ..
지도에서도 꼭꼭 숨겨놓은 듯한 아주 작은 해수욕장 근처에 짐을 풀었다. 펜션 주인이 알려준 곳을 찾아 나선 골목길은 다시 찾기 어려운 미로 같았다. 아는 사람만 갈 수 있는 후미진 집이다. 문을 열고 들어설 때도 과연 음식 맛이 있을까 싶어 되돌아 나오고 싶을 정도였다. 손때 묻은 후줄근한 물건들이 하나둘씩 눈에 들어오면서 엉덩이가 쉽게 안착이 되지 않았다. 일어설 수도, 그대로 앉아 있기도 뭐해서 괜히 손바닥만 비비적거렸다. TV에서 흘러나오는 싱거운 뉴스가 간신히 시간을 넘겨주었다. 재깍거리며 넘어가는 시곗바늘을 흘낏거리던 시각이 후각으로 옮겨지며 칸막이도 없는 부엌 쪽에서 스며 나오는 간간한 냄새에 젖어 들었다. 초봄에나 맛볼 수 있는 도다리쑥국이란다. 찬 겨울을 이겨내기 위해 지방을 축적해둔 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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