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주 한 잔 / 반숙자
바람 부는 날이면 거리에 선다. 오라오라 부르는 손짓이 있어 황황히 문 열고 거리에 서면 삼삼히 밟히는 그림자 하나. 늦더위가 한풀 꺾인 팔월 어느 날 나는 덕수궁 뜰에 있었다. 은행나무는 도시의 소요를 꿀떡 삼킨 채 무상(無常)으로 섰고 세계 성화전이 열리고 있는 전람회 장은 숨소리까지 멈춘 듯 고요했다. 깔리긴드의 ‘부활 그리스도’의 담담한 얼굴에서 지고(至高)의 아름다움은 고통의 모습이나 유열의 모습이 아닌 무념(無念)의 바로 저 얼굴이라는 생각을 했다. 쎈스토이의 성프란치스꼬 청동상 앞에 섰을 때 “가엾은 어머니, 무엇보다도 신뢰를 잃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신회 이외에는 모두 잃어버려도 괜찮습니다”라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싶어 귀를 모았다. 빈자의 아버지, 그가 가난한 한 여인에게 건네준 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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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4. 29.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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