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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밀주 한 잔 / 반숙자

부흐고비 2021. 4. 29. 15:06

바람 부는 날이면 거리에 선다. 오라오라 부르는 손짓이 있어 황황히 문 열고 거리에 서면 삼삼히 밟히는 그림자 하나. 늦더위가 한풀 꺾인 팔월 어느 날 나는 덕수궁 뜰에 있었다. 은행나무는 도시의 소요를 꿀떡 삼킨 채 무상(無常)으로 섰고 세계 성화전이 열리고 있는 전람회 장은 숨소리까지 멈춘 듯 고요했다.

깔리긴드의 ‘부활 그리스도’의 담담한 얼굴에서 지고(至高)의 아름다움은 고통의 모습이나 유열의 모습이 아닌 무념(無念)의 바로 저 얼굴이라는 생각을 했다. 쎈스토이의 성프란치스꼬 청동상 앞에 섰을 때 “가엾은 어머니, 무엇보다도 신뢰를 잃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신회 이외에는 모두 잃어버려도 괜찮습니다”라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싶어 귀를 모았다.

빈자의 아버지, 그가 가난한 한 여인에게 건네준 말이 뚜껑을 열고 나왔다. ”때때로는 눈먼 이가 보는 이를 위로했다.” 그 표제가 얼마나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지 나는 우두망찰 서 있다가 부모의 집으로 돌아온 탕자의 심정이 되어 모처럼 안식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들어선 곳이 국내 화가의 작품 전시실이었다. 나는 어느 그림 앞에 멈춰서고 말았다. 수술 자리가 도지듯 잿속에 사그러져 버린 줄만 안 기억의 불씨가 바알갛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먼 먼 어느 봄날이었다. 개나리가 노랗게 학교 울타리에 피어 아이들 목소리와 어울려 더욱 생기찬 토요일, 나는 편지 한 통을 받았다. 꿀벌들이 윙윙거리는 개나리 울타리에 숨어 발신이 없는 봉투 끝을 가위로 자르면서 저고리 섶을 들먹이는 심한 동계를 느꼈다.

봉투 안에는 종이 한 장 없었다. 이상하다 싶어 봉투를 거꾸로 들고 치마폭에 쏟았다. 나비 되어 날으는 꽃잎, 꽃잎, 진홍의 천도화 꽃잎이었다. 연연한 꽃잎에 쓰여진 글씨, 한 잎 한 잎 맞추어 가는 손끝이 가늘게 떨려 왔다.

‘봄빛, 그리움, 잔인한 4월.’

그런 편지는 날마다 날아들었다. 지극히 절제된 언어로 수많은 마음을 전달해 왔다. 어떤 날은 한마디 말도 삼켜버린 채 은단을 쏟아부어 보내기도 했다.

그림을 그리는 그에게 언어란 얼마나 거추장스러운 것인가를 안 것은 그 후의 일이었다. 그런데 무심하자 하면 할수록 궁금증은 더해 가고 알 수 없는 갈증은 바람이 되어 폭풍으로 변해 갔다.

슬픈 듯 달콤한 비애가 서리서리 감아 왔다. 그 무서운 바람은 무방비한 나를 눈멀게 하고 귀멀게 하고 차츰차츰 심장 복판까지 쳐들어와서 그만 뜨거운 불길이 되어 단근질하기 시작했다. 야속한 그리움이었다. 야속한 그리움이었다. 아무 준비 없는 순결한 가슴 안에 밀주는 한 모금씩 쪼록쪼록 타고 내려 마침내 내 이성은 서서히 마비되어 갔다. 언젠가는 그것이 독주가 되어 숨넘어가게 할 줄은 꿈에도 모르고.



바람 부는 날에는 더 심란했다. 무작정 거리로 나섰다. 허풍스럽게 으르렁거리는 바람은 성재산 꼭대기에 바람꽃을 뽀얗게 피우며 조그만 M읍을 난타했다. 아무리 사납기로 4월 바람은 속살이 따습고 은근한 데가 있다. 얼굴은 써늘해도 가슴엔 훈훈한 봄의 입김이 서렸다.

바람 부는 밤,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사람, 그는 긴 다리목에 혼자 서 있었다. 이상한 예감에 끌리 듯 가까이 섰을 때 냇물은 싱싱한 고기 비늘로 달빛에 출렁이고, 웬 사나이 혼자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를 감싸고 있는 암울한 회색빛에 취해 꽃다운 나의 감성은 멍울이 들기 시작했다. 그를 생각하면 나는 왠지 자꾸 작아졌다. 그의 영혼은 너무 높고 아득하여 손이 닿지 않았다. 사랑이라는 달콤함에 취하려 했지. 그러므로 감내해야 하는 고통에는 겁을 먹고 몸을 사렸다. 그의 방황과 고뇌, 절망 앞에 나는 무기력했다.

그림은 곧 그의 신앙이요, 기도였다. 술을 마셨다. 죽도록 마셨다. 그림과 글은 창문 하나 사이라고 결국 예술은 신의 메시지여야 한다고. 술잔에 넘쳐 흐르는 고독의 빛깔이 되어 그의 화폭에 어둡게 스며들었다. 내 얄팍한 상식으로는 그의 포효를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서로의 기억에 아름다움으로 남고 싶어 한다. 그러니 나는 그를 생각함에 황괴(惶愧)의 아픔만이 전부다. 이제 나는 이십칠 년만의 아득한 거리에서 한 예술가의 깊은 고뇌와 조우 하는 것이다. 어두웠던 화폭이 밝아졌다. 물방울 같은 무수한 타원의 보라 빛과 하늘색으로 어울리며 말갛게 말갛게 살아 올랐다. 죽음보다 더 고독한 고뇌를 통해 비로소 환희에 다다르는 성숙한 한 영혼을 거기서 만난 것이다.

사랑은 인간을 인간답게 한다. 대나무가 자라면서 마디마디 아픔을 채워 더 곧고 푸르르듯 우리 삶의 내용도 사랑이라는 열병을 치뤄 내고 알차게 영글어 가는 것이다. 바람이 인다.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깊은 강물이고자 나는 문을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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