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나 지금이나 시골 동네는 조용하기만 하다. 장닭이 지붕 위에 올라가 꾹- 꾹꾸구~ 하고 울면 다른 집 장닭도 나도 질세라 따라 울고, 봄이 되어 새 풀을 먹고 기운이 오른 황소가 암소를 보고 환장을 하는 것 외에는 무료하기 짝이 없는 시골 동네에 이변이 일어났다. 신문 잡지 하나 없고, 라디오 하나 없는, 기계라고는 자전거밖에 없는 동네에 집채만 한 트럭이 들어온 것이다. 동네 아이들이 처음 보는 자동차를 보기 위해 다 모였다. 나도 트럭을 보기 위해 달려갔다. 그런데 내 등 뒤에는 동생이 업혀 있었다. 그날따라 동생 업어주는 배당이 나에게 돌아온 것이다. 좀 창피하지만 좋은 구경을 놓칠 수는 없었다. 그 당시 부모는 농사일 나가고 할머니가 손자를 길렀다. 줄줄이 사탕 그 많은 손자를 다 돌보지 못하고..

보릿고개가 완전히 없어진 것은 1970년대 말이다. 지금과 같이 봄이 되어 보리가 고개를 숙이는 ‘보릿고개’가 오면 먹을 것이 없어 초근목피(草根木皮)를 찾아 산과 들을 헤매야 했다. 그중에서 쑥이 가장 좋은 먹거리였다. 시골 어디를 가도 잘 자라있는 쑥을 보면 그때 그 시절이 생각난다. 동네 어른을 만나면 “아침 잡수셨습니까? 점심 잡수셨습니까?” 이렇게 인사를 했다. 그때 GNP 100달러, 지금 2만5천달러, 우리나라 정말 잘 살아졌다. 그때나 지금이나 자식교육이 문제였다. 자식 공부를 시키지 않은 부모는 나무 그늘 밑에서 부채질이나 하며 농감(農監)을 했고, 자식 공부시키는 부모는 자식 대신에 농사일을 해야 했다. 돈이 되는 것은 다 내다팔고, 나중에는 소도 팔고 논밭도 팔고, 빚까지 져야 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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