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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나의 스승은 똥 / 송일호

부흐고비 2021. 9. 17. 08:08

보릿고개가 완전히 없어진 것은 1970년대 말이다.

지금과 같이 봄이 되어 보리가 고개를 숙이는 ‘보릿고개’가 오면 먹을 것이 없어 초근목피(草根木皮)를 찾아 산과 들을 헤매야 했다. 그중에서 쑥이 가장 좋은 먹거리였다. 시골 어디를 가도 잘 자라있는 쑥을 보면 그때 그 시절이 생각난다. 동네 어른을 만나면 “아침 잡수셨습니까? 점심 잡수셨습니까?” 이렇게 인사를 했다.

그때 GNP 100달러, 지금 2만5천달러, 우리나라 정말 잘 살아졌다. 그때나 지금이나 자식교육이 문제였다. 자식 공부를 시키지 않은 부모는 나무 그늘 밑에서 부채질이나 하며 농감(農監)을 했고, 자식 공부시키는 부모는 자식 대신에 농사일을 해야 했다. 돈이 되는 것은 다 내다팔고, 나중에는 소도 팔고 논밭도 팔고, 빚까지 져야 했으니 그 고생이 말이 아니다.

그 당시에는 비료가 귀하기 때문에 똥이 중요한 거름이 되었다. 나이 많으신 할아버지는 소똥 개똥을 주우러 다녔다. 어릴 때 나는 소변이 마려우면 참고 뛰어서 우리 논밭에 쉬를 한 일이 있다. 방학이 되어 고향에 가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통시(화장실)의 똥을 푸는 일이다. 일손이 모자라 우리 집은 언제나 화장실이 넘쳐나 있었다. 똥장군에 똥을 가득 담아 지게에 지고 보리밭으로 향한다. 나무로 된 똥장군 사이로 똥이 한 방울 두 방울 목을 타고 나중에는 바지까지 내려온다. 처음에는 격한 냄새가 나지만 나중에는 냄새를 모른다. 이것을 보리밭에 고루 뿌려준다. 이듬해 봄이 되었다. 기적을 발견한 것이다. 거름을 먹은 보리와 먹지 않은 보리가 멀리서 보아도 성장이 완연히 달라져 있었다. 이것을 보고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농부가 많은 수확을 얻으려면 농작물에 충분한 거름을 줘야 한다. 거름은 썩어야 한다. 썩는다는 것은 자기희생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열매만 가지려하지 그 열매를 알차게 익게 하는 거름이 될 사상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다. 뉴턴은 사과를 보고 만유인력을 발견했고, 나는 똥을 보고 ‘먼저 거름이 되라’는 좌우명을 얻었다. 가훈을 얻은 것이다.

노름판에서 돈을 딴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잃은 사람이 있다. 골드만은 부자가 되려면 500명의 재산을 뺏어야 한다고 했다. 돈을 뺏기 위한 전쟁은 지금도 전국에서 일어나고 있다.

승자의 절규와 패자의 눈물을 가장 리얼하게 보여주는 것은 스포츠다. 월드컵 4강 일등공신은 히딩크가 아니다. 승부차기에서 실축한 스페인 선수 호아킨이다. 호아킨이 실축하지 않았다면 4강이 어떻게 될 것인지 누구도 모른다. 선거도 마찬가지다. 모든 경쟁은 상대성이다. 나보다 더 강한 사람을 만나면 필연적으로 지게 되어있다. 패자에게 감사해야 한다.

부모들은 자식을 일등 대학, 일등 직장에 보내기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친다. 합격한 사람은 평생을 잘 살고 있다. 좋은 부모를 만났기 때문이다. 불합격자는 평생을 낙오자로 열등의식 속에 살아야 한다. 합격의 일등공신은 나 대신 떨어진 수험생이다. 합격한 사람은 떨어진 사람에게 감사해야 한다.

모두가 장관, 국회의원, 사장, 장군을 하려고 하면 나라는 망한다. 모두가 주연하려고 하면 연극 영화 못 만든다. 회사를 살리는 것은 비정규직이다. 남들이 천하게 여기는 공장에서 말없이 땀 흘려 열심히 거름의 역할을 하는 일꾼이 있기 때문에 이 나라가 있는 것이다. 열악한 환경에서 열심히 일하는 농부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여러 가지 음식을 배불리 먹을 수 있다. 거름의 역할을 하고 있는 이들을 감사하게 생각해야 한다.

나라 위해 목숨 바친 순국선열, 전몰장병이 있었기에 우리가 지금 이렇게 잘 살고 있다. 죽는 사람만 억울하고, 나만 잘 살면 그만이라는 세상이 된다면 누가 거름이 되겠는가? 그래서 현충일은 공휴일이 아니다.



송일호: 소설가, 수필가. 《대구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저서: 장편소설 〈3%와 30% 그리고 70%〉, 소설집 〈대학아! 대학아!〉, 칼럼집 〈있어도 없고〉, 방송집 〈말자취〉, 수필집 〈머리도 중요하지만 팔다리도 중요하다〉 〈에세이 산책〉. 한국소설가협회, 한국수필가협회, 대구소설가협회, 한국문인협회, 대구문인협회. 현진건 문학상, 대구예술상(문학), 대구수필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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