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 정재순
달팽이 한 마리가 풀잎 위에 동그마니 앉았다. 더듬이를 세우더니 목을 쭈욱 빼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무게를 지탱할 뼈 한 조각 없는데, 제 몸뚱이만 한 집을 지고 느릿느릿 기어간다. 등에 지고 다니는 저 집이 없다면 달팽이는 천애의 알몸으로 노숙해야 한다. 나도 저리 작은 집이라도 가졌으면 했던 적이 있다. 부모 도움 없이 결혼을 하고 세입자들만 사는 주택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두 번째 계약 기간이 끝날 무렵, 새로운 집주인이 찾아왔다. 우리와 안면을 트려는 줄 알았는데 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보증금을 올려달라고 했다. 단번에 뭉칫돈을 내놓으라니, 조금이라도 깎아 달라 사정했으나 반응은 차가웠다. 집주인은 형편이 안 되거든 다른 집을 알아보라며 등을 돌렸다. 한여름인데도 온몸에 한기가 느껴졌다. 하루아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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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1. 23.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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