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태환 시인 1960년 부천 출생. 고려대학교 사범대 국어교육과, 동대학원 국문과 석사, 박사. 198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계해일기」가, 한국일보에 「최익현」이 당선하여 등단, 시집으로 『북한산』, 『수화(手話)』, 『별빛들을 쓰다』, 『복사꽃, 천지간의 우수리』가 있으며 시론집 『미당 시의 산경표 안에서 길을 찾다』, 비평집 『경계의 시 읽기』, 세상읽기 『오늘의 빵에 관하여』 등이 있다. 제2회 윤동주 서시 문학상, 2017 시와 표현 작품상 수상. 최익현 / 오태환 1/ 엎드려서 울고 있다/ 낮게 내려 앉은 대마도의 하늘/ 성긴 눈발, 춥게/ 뿌리고 있다./ 바라보고, 또 바라보아도/ 서릿발 같은 바람소리만/ 어지럽게 쌓이는/ 나라의 산하/ 불끈 쥔 두 주먹이 붉은/ 얼굴을 감춰서/ 설악 같은..
잠실蠶室로 쓰던 헛간에 세간을 전부 옮겨 놓고 나자 하루해가 설핏했다. 둘째와 막내는 돌아가고 나는 안방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기로 했다. 아침 일찍 포클레인이 집을 헐러 오기로 되어 있기도 했지만 나는 내일이면 허물어질 이 집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고 싶었다. 세간을 비워 낸 빈집은 마치 공연을 끝내고 장소를 옮겨 가기 위해서 내부를 비워 낸 서커스단의 빈 천막처럼 썰렁했다. 기우는 늦가을 엷은 저녁 햇살이 아쉬운 듯 마루 끝에 잠시 머물렀다. 마음 둘 곳이 없어 마당에 서성거렸다. 세간이래야 할머니와 어머니가 시집올 때 해 가지고 온 낡은 장롱을 비롯해서 이불과 옷가지 그리고 옹기와 사기들이 전부지만, 우리 식구들의 기쁜 웃음과 허망한 한숨이 밴 피붙이 같은 세간들이다. 그 세간을 비워 낸 집은 집이 아..
근본주의 혹은 원리주의라 하면, 초기 기독교 정신에 기초해 부패의 소굴 바티칸을 매섭게 질타하다가 화형을 당한 피렌체의 수도사 사보나롤라, 아니면 주자학의 원리에 따라 임금 언행을 꼬치꼬치 간섭하다가 사약을 받은 조선의 거유 조광조 선생을 떠올리실지 모르겠습니다. 한데 고교 시절 제 친구 가운데도 두 분 못지않게 근본주의자라 불러 전혀 손색이 없을 녀석이 하나 있었습니다. 기말고사가 박두했는데도 삶의 근본은 시험에 있지 않다며 엉뚱한 개똥철학서나 읽다가 시험 종료 땡 하면 바로 책상머리에 앉아 다음 시험 계획표를 날짜별 분 단위로 짜느라 밤샘을 하는데, 그 계획이란 게 고3이란 놈이 공부를 근본부터 한답시고 중1 과정 제1과부터 새로 시작하는 식이었습니다. 물론 계획표 작성에 기진맥진해 정작 본 게임은 ..
1. 나뭇가시 어느 시인이 말했다. 한숨이 화가 되어 깊은 병이 들면 엄나무 생가시를 가마솥에 삶아 마시라고. 세상 가시에 찔려 죽을 만큼 아플 때는 가시나무의 가시가 곪은 상처 터트려 주는 명약이라 하였다. 어릴 적 손가락에 가시가 박히면 어머니는 탱자나무 가시로 가시를 빼내었다. 바늘은 쇳독이 있지만 나뭇가시는 독이 없다고 늘 나뭇가시를 챙기셨다. 엄나무, 유자나무, 두릅나무, 석류나무 대추나무도 가시를 가지고 있다. 모두 제 몸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나무는 열매를 버릴지언정 가시는 버리지 않는다. 2. 바늘쌈지 “봄 두릅은 금이요. 가을 두릅은 은”이라는 말이 있다. 가시가 억센 것일수록 약효가 좋다는 두릅나무는 당뇨병 환자에겐 생명의 나무라고도 불린다. 우연히 산기슭에서 만난 두릅나무는 가시투성이..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 사람도 인기척이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 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이 적고 있다. 무량수전, 안양문, 조사당, 응향각들이 마치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 무량수전은 고려 중기의 건축이지만 우리 민족이 보존해 온 목조 건축 중에서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오래된 건물임이 틀림없다. 기둥 높이와 굵기, 사뿐히 고개를 든 지붕 추녀의 곡선과 그 기둥이 주는 조화, 간결하면서도 역학적이며 기능에 충실한 주심포의 아름다움, 이것은 꼭 갖출 것만을 갖춘 필요미이며 문창살 하나 문지방 하..
두부는 순하다. 뼈다귀도, 발톱도, 간도, 쓸개도 없다. 단호한 육면 안에 방심한 뱃살을 눌러 앉히고 수더분한 매무시로 행인들을 호객한다. 시골 난장부터 대형마트까지 앉을 자리를 가리지 않지만 조심해서 받쳐 들지 않으면 금세 귀퉁이가 뭉개지고 으깨진다. 날렵하게 모서리를 세워 각 잡고 폼 잡아 봐야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제국이 몸이라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는 눈치다. 생살을 갈라도 소리하지 않고 날카로운 칼금에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 슴슴하면 슴슴한 대로 얼큰하면 얼큰한 대로 주연이든 조연이든 탓하지 않고 부드럽게 어우러지는 그는 어둠의 집에서 막 출소한 젊은이에게 숫눈 같은 육신을 송두리째 보시하기도 한다. 괜찮다고, 지난 일은 잊으라고 저 또한 진즉 열탕 지옥을 견디고 환골탈태로 새..
오랫동안 나이를 생각해 보지 않았었다. 지금 내 나이 이십 구세- 그러니까 액년이다. 그러나 올해 나는 특별히 재앙이나 불행을 겪지 않고 지났다. 만성적 재앙으로 침체를 들 수 있을 뿐이다. 직업이나 모든 면에서 올해는 무발전의 해였다. 꽤 미신가인 나는 올해 초부터, 소위 아홉 자가 든 올해를 두려워하면서 무슨 카타스트로프를 예상하고 있었으나 아무 일도 안 일어났다. 어느 해나 마찬가지로 평범하게 흘러갔다. 연령의 중량도 지금 내 펜에 쓰이는 대상으로서만 비로소 내 의식의 표면에 떠오를 정도로 매우 바쁘고 피곤한 한 해였다. 생각해 보니 피로가 심했던 것이 올해의 특징인지도 모르겠다. 수레에 끼워진 바퀴처럼 자기 자신이나 주위에 대해 신선한 흥미를 잃고 타성처럼 회전하고 있었던 생활이 단적으로 말해서 ..
나는 오백 원짜리 동전을 좋아한다. 목직하고 도톰하여 돈다운 맛도 맛이려니와, 그보다는 동전의 뒷면에 나를 닮은 두루미 한 마리가 창공을 날고 있기 때문이다. 푸른 숲 노송 위에 한 다리를 접고 서서 사색에 잠긴 두루미, 그 고고한 자태에다 나를 비교한다는 것이 가당찮은 일인 줄은 안다. 그러나 그의 가냘픈 육신을 보고 있노라면 적어도 외모만큼은 내가 그를 닮았거나 그가 나를 닮았거나 둘 중 하날 거라는 생각이 든다. 가끔 저울에 올라가 본다. 바늘이 반 바퀴를 겨우 돌아가 멈춘다. 구십 근인가? 옷, 구두까지 몽땅 합쳐도 백 근이 못 되는 체중이다. 사반세기 전 인사기록카드에 기록했던 몸무게가 지금껏 변함이 없다. 허리띠를 새로 사면 삼분의 일쯤 잘라낸다. 그냥 두르면 두 바퀴나 돌아가기 때문이다.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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