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바람이 어시장을 휘돌고 간다. 시리고 헛헛한 속을 데워줄 뜨끈한 국물이 생각나 장바구니를 들고 나온 참이다. 동태, 대구, 도루묵을 견주다 손질된 아귀가 눈에 들어왔다. 싱싱한 애와 곤, 간과 위 내장도 함께 좌판에 진열되어 있어 보기에도 풍성하다. 겨울이면 어촌에는 아귀가 지천으로 널린다. 한때 동해안 집집의 마당과 옥상에는 오징어가 많이 널렸다. 어느 날부터 오징어가 자취를 감추자 아귀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머리 떼어내고 내장을 발라내고 빨래처럼 줄에 널어 반 건조시킨다. 멀리서 보면 깃발 같기도 한 것이 무슨 점령군처럼 기세등등하기도 하다. 예전에는 아무도 아귀를 거들떠보지 않았다고 한다. 물고기 씨가 마른 요즘에야 사람들의 눈길을 받는다. 거무튀튀한 색깔에 몸체는 두루뭉술한데 험상궂은 머리가 ..
묘하게 알아보기 어려웠던 기억이 난다. 생전보다 특별히 부으시거나 살이 빠지신 것도 아닌데도. 가만히 들여다보자 그제야 익숙한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돌아가시기 전 담도가 막힌 탓에 온통 누렇게 변해 있었기는 해도, 확실히 명절 때마다 뵈었던 그 얼굴이 맞았다. 기묘했다. 그냥 주무시고 계신 것처럼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 보면 또 아예 사람인 적 없었던 밀랍인형처럼 보였다. 왜 옛사람들이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빠져나간다고 생각했는지 짐작할 것도 같았다. 생명의 마지막 흔적마저 자취를 감춘 얼굴은 마른 강바닥 같았다. 강이었고, 강의 모양을 하고 있지만, 넘실거리는 뭔가가 사라져 버렸기에 강이라고 하기에는 어색하고 이질적인. 천성이 감성적인 엄마는 할머니 옆으로 다가가 떨리는 목소리로 “어머니, 먼저 ..
돌담 위에 소담스레 쌓인 눈을 참 오랜만에 본다. 담장 아래 뒹구는 강아지 똥도 모처럼 예쁜 눈꽃을 피우고 있다. 이번 겨울은 유난히 눈이 오지 않아 아쉬웠는데, 삼월 하순에 이곳에서 함박눈을 보게 되다니. 계절을 넘어선 몽환적인 풍경에 속절없이 분주했던 몸과 마음을 눈송이에 실어 살포시 내려놓는다. 모처럼의 눈 소식에 안동의 시골 마을 조탑리로 한달음에 달려왔다. 아름다운 설경에 대한 기대와 눈처럼 순수하고 따뜻했던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의 흔적을 오롯이 느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을 어귀에서부터 순백의 무채색 세상이 펼쳐진다. 고샅길에 들어서니 문득 시간이 멈추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냥 이대로 이 풍경 속에 머물 수 있으면 얼마나 행복할까. 지금, 이 순간 이곳에 있는 것이 참으로 감사하다. 시..
시큰둥한 첫 만남이다. 왕방울 눈을 지닌 감실부처를 건성으로 일별하고 돌아 나오는 뒤통수가 간지럽다. 향토 사학자 수준으로 설명하는 친구의 유식에 주눅 들어 딴청 부린 것이 부끄러워 발길을 멈춘다. 뒤돌아서 두 손을 모은다. 감실 안을 비추는 햇빛에 반사된 희미한 미소가 찌뿌둥한 마음 근육을 풀어준다. 민망한 여운이 오래 머문다. 절 마당에 들어서면 마음이 편안해지지만, 전각 안쪽을 삐끔삐끔 들여다보고는 뜨락만 어슬렁거렸다. 찰나를 견디지 못하는 삿된 생각이 들락거리니 낯부끄러운 염치에 법당 주위만 맴돌았다. 남의 손에 이끌려 까치발로 들어가서도 지은 업의 무게에 눌려 조아린 육신을 일으킬 힘이 없음을 핑계 삼았다. 불교 경전에는 문외한이라 석가모니는 고사하고 나무아미타불의 뜻도 관심 밖이었으니 부처..
나무들이 호수에 물구나무를 하고 섰다. 안동호에 물결이 일렁이면 반영은 환영처럼 나타났다 사라진다. 낮은 산성을 옆으로 끼고 양쪽 동네를 잇는 부교가 호수면 위에 표표히 늘어져 허청댄다. 안동선비순례길이 물 위에 떠 있는 선성수상길을 가로지르며 첫길을 수굿하게 열고 있다. 마을 간 줄다리기라도 있었던 걸까. 겨루기를 끝내고 이제 막 내려놓은 굵은 밧줄 같다. 운동회가 한창일 가을날이다. 나의 물그림자를 나무들 사이에 세운다. 구름덩이 서너 점과 섬 같은 산과 설핏 물든 단풍들이 정물처럼 고요한데 물비늘에 뜬다리가 꿀렁인다. 나도 따라 속이 울렁이고 눈이 뱅그르르 돈다. 작은 여파에도 통째로 휘둘리고 만다. 이럴 땐 멀리 보아야 한다. 세상이 요동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흔들리는 것이라고 나만 멈추면 된다고..
갈매기 떼 지어 내려앉아 한가로이 쉬고 있는 조용한 바닷가, 한 시대 나라의 수호신을 모시던 성지였고, 영토방위의 최전선이었다. 지금 동유럽 우크라이나 동남부 해안지역 마리우폴 니코폴처럼 강 하구 해안의 군사 요충지였던 곳이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통일국가를 이룩하였으나, 내부의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지 못하고, 바다를 건너 끊임없이 침입해 들어오는 왜적을 방어하는 전초기지였던 곳이다. 고요한 신새벽 잠에서 깨어나서 가만히 누워있었다. 멀리서 바다의 신음 소리가 나지막이 들린다. 일찍 일어나신 할아버지께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신다. “바다 끓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풍파가 오려나 보다.” 장마철 태풍이 올 때면 깊은 바닷속 물이 일렁이면서, 바닥의 자갈 끌리는 소리가 ‘싸르~르~~’ 환청처럼 들린다. 구름이..
염천의 개 혓바닥처럼 축 늘어진 앞집 옥상의 빨래가 갑자기 무녀(舞女)의 치맛자락처럼 펄럭이기 시작한다. 찌는 듯하던 여름밤의 무더위가 슬그머니 뒷문을 박차고 꽁무니를 뺀다. 혁명군인 양 치달아온 바람이 고요한 누리에 파문을 일군다. 뜨락의 나무들은 바람의 위세에 눌려 저마다 아부의 깃발을 흔든다. 키다리 백목련은 무당춤을 추어대고, 분기(分器)에 발을 담근 대나무는 나긋나긋 승무를 춘다. 수줍음을 타던 백합은 사근사근 어깨춤을 추어대고, 대추나무․은행나무․모과나무․사과나무․감나무․백일홍은 디스코를 춘다. 어느덧 우리 집의 손바닥만 한 뜨락은 무도장이 되고 말았다. 바람이 한눈을 팔면 몸놀림이 느슨해지다가 바람이 다시 눈을 부릅뜨면 어느새 춤동작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바람에 놀아나는 나무들의 작태다. 우..
내 어린 날의 추석은 포도와 누나의 향기로 그윽했다. 그때만 해도 내 고향 강화도엔 포도가 거의 생산되지 않았다. 누나는 대나무 바구니 가득, 서울의 시장에서 산 포도를 들고 고향집을 찾았다. 남정임 윤정희 같았던 머리, 소매가 잠자리 날개처럼 얇고 투명했던 옷, 그리고 이국의 향기를 닮은 화장품 냄새. 희디 흰 얼굴. 차부에서 내려 고향집까지의 시오리 길을 걷는 동안, 사람들은 문밖에 나와 서울내기가 되어 돌아오는 누나를, 뒷모습이 다 사라질 때까지 우두커니 바라보곤 하였다 한다. 누나가 집에 머무는 며칠 동안 고향집은 포도와 누나의 향기로 은은했다. 결코, 맹세코 잊을 수 없는 건 포도와 함께 가져왔던 두 개의 라면. 온 식구가 나누어 먹었던 그 라면 맛은 서울이 어떤 곳이라고 떠드는 백 마디 천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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