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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득 코너

개미의 크기 / 박지원

부흐고비 2008. 4. 23. 17:36

 

개미·파리·사슴·코끼리의 크기(答某)


우연히 거칠고 못난 성질을 이야기하다가 제 자신을 사슴에 비의한 것은 사람이 가까이 다가가면 잘 놀란다는 의미이지 감히 제 자신이 크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지금 그대의 편지에서 그대 스스로를 말꼬리에 붙은 파리에 비유하고 계시니 어째 이렇게 자신을 하찮게 여기십니까? 만약 그대가 작게 되기를 바란다면 파리도 오히려 크지요. 개미가 있지 않습니까?

제가 일찍이 약산(藥山)에 올라가서 밑의 고을을 굽어본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달음질치고 뛰어가며 땅에 붙어 꿈틀꿈틀하는 모습이 마치 개미집의 개미와 같아서 한번 휙 불기만 해도 다 날아갈 듯싶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고을 사람더러 저를 바라보라고 한다면, 산비탈을 기고 바위를 돌고 풀 덩굴을 더듬어 잡고 나무를 붙잡고 산꼭대기까지 올라와서는 함부로 거들먹거리는 모습이 머리의 이가 머리카락을 따라 기어오르는 것과 뭐가 다르겠습니까? 그러고서도 이제 큰소리로 제 몸을 사슴에다 비의한다고 하면 그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습니까? 마땅히 대가(大家)들에게 비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만약 몸뚱어리의 크고 작은 것을 따지려 하고 시력이 좋고 나쁨을 변별하려 든다면 그것들은 모두 허망한 생각입니다. 사슴이 과연 파리보다야 크다고 하겠지만 코끼리가 있지 않습니까? 파리가 사슴보다는 작다고 하겠지만 개미와 비교한다면 사슴과 코끼리의 관계와 같습니다.

이제 저 코끼리가 서 있는 모습은 집채처럼 크고, 나다니는 것은 풍우처럼 빠르며, 귀는 구름장을 드리운 것처럼 넓으며, 눈은 초승달처럼 작고 발가락 사이에 낀 진흙덩이는 봉긋한 둔덕처럼 큽니다. 개미가 그 둔덕 속에서 집을 짓고 살다가 비가 오는지 살피러 밖으로 나와서 두 눈을 부릅뜨고도 코끼리를 보지 못함은 무슨 까닭입니까? 보이는 대상물이 너무 멀리 있기 때문입니다. 코끼리가 한 눈을 감고 노려보아도 개미를 보지 못함은 무슨 까닭입니까? 보이는 대상물이 너무 가까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좀더 넓은 안목을 가진 사람이 있어 다시 백 리쯤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게 하더라도 아물아물하고 가물가물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어디서 소위 사슴이니 파리니 개미니 코끼리니 하고 분간해낼 수 있겠습니까?

연암 박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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