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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득 코너

내가 본 이덕무 / 박지원

부흐고비 2008. 5. 9. 18:36

 

내가 본 이덕무


나와 30년을 알고지낸 형암(炯庵) 이군(李君)은 적성현감(積城縣監)겸 규장각 검서관(奎章閣檢書官)이었다. 그의 휘(諱)는 덕무(德懋)고, 자(字)는 무관(懋官), 후능(後陵)의 별자(別子)인 무림군(茂林君) 시(諡) 소이공(昭夷公) 선생의 자손이다.

 

이덕무의 고조부는 증(贈) 호조참판 (戶曹參判)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정형(廷蘅)이고, 통독랑 상함이 그의 증조부이며, 강계도호부 일익(必益)이 조부이고, 동덕랑 성호(聖浩)가 바로 그의 아버지이다. 어머니 반남박씨는 금평위로 시호가 효정공 필성의 손녀이며, 현감 사렴의 딸이다.

신유년(영조17년, 1741) 6월 11일에 태어나 지금의 임금인 정조17년(1793) 1월 25일 본가에서 생을 마쳤는데 그의 나이가 55세였다. 광주부(廣州府) 남쪽 판교촌(板橋村) 언덕에서 선비의 예를 갖추어 장사지냈다. 그가 죽은 지 3년이 지난 을묘년(정조19년, 1795)에 임금께서 내각에 지시를 내려 이렇게 말했다.

“지금 운서(韻書)를 새로 간행하면서 예전의 일을 떠올려보니, 처음 이 책을 간행할 때 애쓴, 죽은 이덕무의 재주와 식견이 아직까지 잊혀지지 않는다. 각신(閣臣)에게 명하여 이덕무의 본가에서 그가 남긴 글을 가져다가 다듬어서 문집을 간행하게 하라.” 그리고는 개인적으로 경비 5백 냥을 하사해 문집을 간행하는 비용으로 사용하게 하셨고, 그의 아들 광규(光葵)를 검서로 채용하셨다.

이때 광규가 여러 유명한 이들에게 아버지의 명(銘)을 써달라는 부탁을 하기위해 직접 기록한 선군유사(先君遺事) 85조항을 가지고와서 나에게 행장(行狀)을 지어달라고 했다. 나는 이덕무와 30년 동안 친구의 우정을 쌓았기 때문에 그의 평소의 언행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광규의 부탁을 사양하지 않고 행장을 짓게 되었다.

경전(經傳)에도 나오지 않던가? “그의 시를 외우고 그의 글을 읽으면서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면 옳겠는가” 라고. 이덕무는 보잘 것 없는 가난한 선비였지만 높은 덕을 지녀 임금으로부터 특별한 사랑을 받았다. 임금께 받은 극진하고 정성스러운 포상과 두터운 은혜는 당시의 으뜸이었고, 그의 올바른 행실에 대한 기록은 그가 죽은 후에도 끊이지 않고 있다.

 

이에 그의 시문을 길이길이 남기려고 하니, 후세에 이덕무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여기에서 그 답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곧고 깨끗한 행실, 분명하고 투철한 지식, 익숙하고 해박한 견문, 그리고 온순하고 단아하고 소탈하고 시원스러운 용모와 말씨는 다시 볼 수가 없어서 그것을 애석하게 생각할 뿐이다. 그 친구가 저 세상으로 떠난 뒤 나는 이리저리 방황하고 울먹이면서 혹시라도 이덕무 같은 사람을 만날 수 없을까 했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이덕무는 어려서부터 슬기롭고 글 읽기를 매우 좋아했다. 하루는 집안사람들이 아이를 잃어버려서 난리가 났었는데 저녁때가 훨씬 넘어서 관아 뒤의 풀 더미 속에서 찾았다. 벽에 붙은 옛글을 보는데 정신이 팔려 날이 어두워지는 줄도 몰랐다고 한다.

 

어른들에게 글을 배울 때는 반드시 자획과 글자의 뜻을 자세하고 분명하게 익혔는데, 혹시라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갑자기 울곤 하였다. 아이들과 정신없이 놀 때에도 남들 몰래 벽에다 해시계를 그려놓고 시간이 되면 반드시 일어나 서재로 가서 단정히 앉아 책을 읽기에 여념이 없었다.

어른이 되고부터는 온갖 서적을 두루 읽었다. 늘 남에게 책을 빌려보았는데, 남들 또한 아무리 몰래 감춰두는 귀한 책이라도 싫은 기색이 없이 기꺼이 빌려주면서 말하기를, “이덕무. 자네는 정말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군”했다.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덕무가 책 빌리기를 부탁하기 전에 먼저 빌려주면서, “책을 두고 자네의 눈을 거치지 않으면 그 책을 무엇에 쓰겠는가”했다.

그는 책을 베끼는 습관이 있어서 늘 책을 볼 때는 그 책을 다 읽는 다음에 꼭 베끼곤 했다. 그리고 항상 작은 책을 소매 속에 넣고 다니면서 배(舟)에서도 책을 보았다. 그래서 비록 집에는 책이 없었지만, 책을 쌓아 둔 거와 다름이 없었다. 평생 동안 읽은 책이 거의 2만권에 넘었고, 손수 베긴 문자가 또한 수 백 권이 되었는데, 그 글씨가 모두 반듯하고, 아무리 바빠도 속자(俗字)로 쓴 것은 한 글자도 없었다.

지금의 임금께서 즉위한지 3년(1779)이 되는 해에 규장각을 설치하고 네 사람의 검서를 뽑았는데, 그 중에 이덕무가 으뜸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규장각에서 편찬한 많은 서적작업에 빠지지 않고 참여했기에 국조보감, 갱장록, 문원보불, 대전통편 등이 모두 이덕무의 손을 거쳐 세상에 나왔다. 또 무예도보, 규장전운을 편찬했는데, 고증한 자료가 정밀하고 방대하며, 형태와 격식이 매우 상세했다. 임금의 뜻에 꼭 맞게 책이 완성되어서 이덕무는 6품으로 직위가 올라가게 되었다.

이덕무가 직접 저술한 저서는 십여 종이나 된다. 예전에 이덕무가 말하기를 “군자는 몸가짐과 마음 쓰는 것을 어린아이나 처녀같이 해야 한다”고 했다. 사람들이 간혹 이덕무가 지은 시문을 보자고 하면 그는 보여주기를 꺼리면서 “나의 문집은 진기하지 못해서 한번 남에게 보여주면 사흘 동안 부끄러워진다. 그래서 상자 속에 깊숙이 넣어두었는데, 저절로 나올 날이 있을 것이다,”하고는 그의 첫 문집을 영처고(嬰處稿)라 이름 붙였다.

온종일 물가에 우두커니 서서 먹이는 구하지 않고 앞에 지나가는 고기만 쪼아 먹는 새가 있는데, 이것이 신천옹(信天翁) 또는 청장(靑莊)이라는 물새다. 그가 이것을 자신의 호로 삼았기 때문에 수 번째 문집의 이름은 청장관고(靑莊館稿)이다. 말하나 행동하나에도 도(道)를 떠나지 않고 귀, 눈, 입, 마음 씀씀이 하나도 게을리 하지 않아서, 자신이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는 것을 그대로 기록했기에 저서의 이름을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라고 했다.

선비는 마땅히 곡례(曲禮)로 자신을 수양하고 내칙(內則)으로 가정을 다스려야하니 작은 예절을 조심하지 않으면 큰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겠는가하면서 옛 성현들이 남긴 교훈을 인용해 깨우침과 교훈을 주려했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소절(士小節)은 지금 사람들의 경솔한 일들을 엮어서 보고 느끼는 자료로 삼기위해 지은 저서이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역대의 시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좋으냐”고 했더니 이덕무가 대답하기를 “꿀벌은 꿀을 만들 때 꽃을 가리지 않는다. 만약 꽃을 가린다면 꿀벌은 결코 꿀을 만들지 못할 것이다. 시를 짓는 것도 이와 같다. 천지의 재주와 지혜가 뛰어나고 사리와 도리에 밝은 기운은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 가운데 뛰어난 글귀로 나의 창자를 씻고자 한다” 하고는 청비록(淸脾錄)을 지었다.

중국의 황제이하의 역사와 중화 이적에 대한 들고 엮었는데, 연대별로 간략하고 일반적인 내용을 모아서 어린아이들이 볼 수 있게 했다. 이것이 기년아람(紀年兒覽)이다.

백대에 걸쳐 원수가 되고도 남을 저 교활한 섬나라 오랑캐들은 그 소굴이 너무나 깊어서 지도나 호적등에 대해 증거 삼을 것이 없었다. 내가 적을 살피려고 해도 도대체 방법을 몰랐는데 이덕무가 한번은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만일 섬나라에 사신으로 간다면 그들의 기밀을 남보다 잘 살펴 알아낼 수 있을 것이네. 내가 예전에 표류되었다 돌아온 사람을 만났는데 그 지역의 세세한 사실까지 물어보았더니 그 사람들이 깜짝 놀라며 ‘공이 언제 바다를 건너갔었느냐’ 고 하더군"이라 했다. 이덕무가 일본의 세계지도 풍요 토산을 기록했는데, 그것이 바로 청정국지이다.

옛사람들은 밭을 갈면서 감나무 잎을 따다가 정사(正史)에서 빠진 일들을 기록해서 항아리에 넣고 밭 가운데 묻어두었다고 한다. 이덕무도 이와 같은 뜻으로 앙업기를 지었다. 영남에서 벼슬을 할 때의 견문을 널리 기록하고 편지까지 일일이 수록해서 한편의 책으로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한죽당섭필(寒竹堂涉筆)이다.

예기(禮記)의 기록 중에서 의심스러운 뜻과 어려운 글자를 나름대로 해석했는데, 그것이 바로 예기억(禮記臆)이다. 임금의 명으로 송사전을 교열하면서 임금께 간청하여 사고 정사초등의 인물의 전기를 만들고, 별로도 몽고, 요, 금 열전을 지어서 중화와 이적의 분별을 바로 잡았는데, 이것이 바로 송사보전(宋史 補傳)이다.

한번은 남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명나라 백성이다. 융경 만력 천계 숭정 연간의 뛰어난 신하와 처사들과 교유를 맺었으니, 눈앞에서 아첨하다가 뒤돌아서는 눈을 흘기는 것에 비하면 어찌 훌륭하다 하다 않겠는가” 하고는 갑신년 이후 명나라 유민들의 일들을 채록했는데 이것이 바로 뇌뢰낙락서이다. 하지만 이것은 다 간행되지 못했다.

이덕무는 유가의 도를 닦는 선비라 자청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행실을 조심하여 정주의 문호를 지키는 일에 조금의 실수도 없었다. 문장을 지을 때는 화려한 기교를 부리기보다는 조리가 있고 이치가 잘 통하게 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우렸다. 그래서 임금께서도 그의 글을 보고 일찍이 산림의 기상이 있다고 칭찬하였다. 소학 명물에 대해서는 너무나 박식해서 나무, 풀, 곤충 어류에 대해서는 농부나 시골의 노인들도 판별하지 못하는 것까지 정확히 구분할 수 있었다.

전장(典章). 풍토. 금석. 서화 그리고 섬세하고 생소해서 단서를 알기조차 어려운 것에 대해서도 메아리처럼 대답해 주어 상대방의 요구를 만족시켜야만 설명을 그치곤 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모르는 것을 설명해 주는 때가 아니면 배운 것을 축적해 두기만 하고 텅 빈 사람처럼 지내며 남에게 뽐내지 않았다.

그러면서 세상 모든 일의 옳고 그름, 성공과 실패, 시대마다 문장의 고아함과 방일함, 순수함과 비순수함에 대해 저울로 재듯이 분명하게 했으니 천하에 남다른 안목을 지닌 사람이라 하겠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이덕무를 평가하기를 그의 품행을 제1로 치고, 학문을 제2로 치고, 박문강기를 제3으로 치고, 문예를 특별히 제4로 쳤다. 그의 문예에도 미치지 못함이 이와 같으니 이덕무의 품행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아, 이덕무는 어려서부터 성품이 단정하여 함부로 교유하지 않았는데, 문을 닫고 들어앉아 글을 읽은 지 40년 동안 그 이름이 마을 밖으로 나가지 않았고, 세상에 이름을 날리는 벼슬아치조차도 알지 못했다.

무너질 듯한 집은 비바람을 가리지 못할 정도였고, 변변치 못한 음식조차 자주 때를 걸렀지만, ‘기한(飢寒)이라는 두 글자를 입 밖에 내지 않았기에 부인과 자식들도 그 말을 듣지 못했다. 앉고 눕고 일어나고 거처하는 데에도 일정한 법도가 있고 책과 책상의 위치도 정리정돈 되어있었다. 어려 사람들과 어울려 하루 종일 같이 있을 때에도 존귀한 듯 보이나 잘난 체 하지 않으며, 서로 의좋게 지내되 함부로 하지 않았기에 다른 사람들도 감히 버릇없는 말을 걸어오지 못했다.

효성이 지긋하여 아버지를 섬길 때는 얼굴에 항상 부드러운 빛을 띠었고, 어머니 상(喪)을 지낼 때는 잠시도 상복을 벗지 않았으며 묘소에 오를 때가 아니면 친척의 집에도 가지 않았다. 그리고 아침저녁으로 슬프게 울부짖어 이웃사람들이 귀를 막을 정도였다.

어떤 이가 ‘선비의 본분이 무엇이냐’ 고 물었더니, ‘집에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밖에 나가서는 어른에게 공손하며 낮에는 밭을 갈고 밤에는 글을 읽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또 ‘어떤 일을 할 때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가’라고 물었더니, ‘억울한 마음을 다스리고 욕심을 막고 음식을 절재하고 말을 조심하면 된다’고 대답했다.

일찍부터 자식들에게 가르치기를, “일상생활에서 남과 너무 다르게 할 것도 없지만, 구차하게 속세를 따를 필요도 없으며 평범한 존재로 간단히 마음을 바로 잡으면 된다”고 했다.

사신을 따라 연도(燕都)에 들어가 산천풍물을 구경하면서 당시의 유명한 선비들과 담론하며 친분을 맺었는데, 모두가 말하기를, “이덕무의 시는 평범한 문체를 벗어나서 특별한 경지를 열었으니 송, 명 사이에서 한자리를 차지 할만 하다”고 했는데 참으로 정확한 평가라 하겠다.

이덕무는 22개월 동안의 검서관 생활을 거쳐 사도시지부에 승직되었다가 사근 역찰방으로 나갔으며, 광흥창주부, 사옹원주부를 거쳐 적성현감에 임명되었다.

적성현감에 있을 때 어떤 사람이 “고을이 가난한 데다 녹봉이 너무 적다”고 하자, 이덕무가 정색하며, “내 본래 글 읽은 선비인데, 지극히 두터운 임금의 은혜로 고을을 지키며, 늙은 어버이를 봉양하게 되었으니 그 은총이 이보다 더할 수 없다. 그런데 어찌 감히 다른 것에 대해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그리고는 부임해서 받은 녹봉을 털어 청사를 새롭게 수리했다. 청학동에다 조그마한 정자를 지었는데, 오래된 소나무와 바위로 둘러진 그 그윽한 경치는 아껴보고 볼만큼 아름다웠다. 그 정자에 우취옹(又醉翁)이란 편액을 걸고 조그마한 수레를 타고 혼자 가서 한가로이 거닐곤 했다.

집안사람에게 절약을 강조하며, 주역에 ‘절재하기를 정해진 법도대로만 한다면 재산을 손상하지 않고, 백성을 해치지 않는다’했다. 국가도 이런데 하물며 조그마한 고을은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하고, 달마다 주는 월급을 나누어 매일매일 지급해서 쌀과 소금과 땔나무와 나물이 당일의 수량을 넘지 않도록 했다. 스스로도 어버이께서는 좋은 음식을 대접하고 자신은 손님을 대할 때도 나물만 대접할 정도였으니, 그 참된 정의가 공평하다 하겠다. 하지만 이것은 닭을 잡아서 노모를 대접하면서도 자신은 채소를 먹었다는 모용(茅容)의 고사(古事)를 억지로 배우려고 그런 것은 아니었다.

관리들의 평가에서 열 번이나 최고점수를 받았기 때문에 외직에서 내직으로 다시 들어와 와서별제, 장원서별제, 상의원주부가 되었고, 사도와 사옹에 다시 임명되었다. 그러나 지방직에서 해임되고 서울로 올라와서도 따르는 하인이나 말 한필 없이, 항상 여자노비에게 도포와 두건을 싸가지고 따르게 하고, 걸어서 이문원을 출입하면서, ‘이것이 나의 본분’이라고 했다. 대궐에 출입한지 15년 동안 다른 사람과 차별하여 더 친절하게 보살펴주는 사람이 있다거나 뇌물을 주거나 하는 일은 동료들이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다.

어릴 때부터 벼슬에 나아가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서 공령문(功令文)짓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내각에 선임된 후에는 다시 과장에 들어가지 않았는데, 그러면서 말하기를 “임금께서 친히 내 글을 높이 평가해 주셨으니 이것이 과거에 급제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라고 했다.

그리고 늘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평생 글을 좋아했는데, 오늘날 고관(古觀)에 소장한 어서(御書)를 마음껏 열람하게 되었으니, 할 일을 다 했다”라고 했다. 일찍이 임금을 모시고 임금께서 지은 글과 문자를 교정하는데 임금의 얼굴을 가까이 대하게 되어 글소리를 약간 낮추었더니 임금께서 자주 돌아보시고는, “너의 글 읽는 소리가 좋으니 음성을 높여라” 하셨다.

하루는 임금이 이덕무에게 “너도 장차 늙어 갈 텐데 더 늙기 전에 일대문헌을 구성해 감추고 있던 재능을 널리 알려서 후학들에게 길을 열어주는 것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하셨다. 임금께서 그를 소중히 여기고 기대하는 바가 이와 같았다. 그래서 이덕무는 물러나와 집안사람들에게 이를 말하면서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영예로운 총애를 입어도 자만하지 않고, 겸손하고 삼가며 검약하여 본성을 바꾸지 않았음으로 세상 사람들은 더욱 그를 칭찬했다.

일찍이 임금의 명으로 성시전도에 대한 백운시(百韻詩)를 지었는데, 임금께서 직접 시권(詩卷)에 ‘雅’자를 쓰셨다. 그래서 드디어 ‘아정(雅亭)’으로 호를 삼았다. 이덕무의 아내는 수원백씨로 충장공 시구의 증손녀이며 동지중추부사 사굉(師宏)의 딸이다.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이가 곧 광규(光葵)이고 두 딸은 유선과 김사광에게 시집을 갔다.

아, 이덕무가 시문을 짓고 읊조리는 풍류는 다시 접할 수 없지만, 그 평생의 행적을 보건대 청사유림전(淸士 儒林傳)에 오를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삼가 이렇게 글을 쓰고, 그를 위해 글을 써줄 입언자(立言者)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노라.


박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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