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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장수의 백상루 구경


안주(安州) 백상루(百祥樓)는 빼어난 풍경을 지닌 관서 지방의 누각이다. 중국 사신이 오거나 우리나라 사람이 공무로 지나가게 되면, 누구든지 이 누각에 올라 풍경을 감상하지 않는 경우가 없다. 덕수(德水) 이자민(李子敏, 이안눌)이 “수많은 산들이 바다에 이르러 대지의 형세는 끝이 나고, 꽃다운 풀밭이 하늘까지 이어져 봄기운은 떠오른다.”라고 시로 읊은 곳도 바로 이곳이다.

어떤 상인이 소금을 싣고 가다가 이 누각을 지나게 되었다. 때는 겨울철로 아침 해가 아직 떠오르기 전이었다. 상인은 누각 아래 말을 세워 놓고 백상루에 올라서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그저 보이는 것이라곤 긴 강에 깔린 얼음장과 넓은 들을 뒤덮은 눈뿐이었다. 구슬픈 바람은 휙휙 몰아오고, 찬 기운은 뼈를 에일 듯 오싹해서 잠시도 머물 수 없었다. 그러자 상인은 “도대체 백상루가 아름답다고 한 게 누구야?”라고 탄식하며 서둘러 짐을 꾸려서 자리를 떴다.

저 백상루는 참으로 아름다운 누각이다. 하지만 이 상인은 알맞은 철에 놀러 오지 않았으므로 그 아름다움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렇듯이 모든 사물에는 제각기 알맞은 때가 있으며, 만약에 알맞은 때를 만나지 않는다면, 저 백상루의 경우와 다름이 없게 되는 것이다.

여우 겨드랑이 털로 만든 가죽옷은 천하의 귀한 물건이지만 무더운 5월에 그것을 펼쳐 입는다면 가난한 자의 행색이 되며, 팔진미(八珍味)가 제 아무리 맛이 좋은 음식일지라도 한여름에 더위 먹은 사람을 구하지는 못한다. 황금과 구슬, 진주와 비취는 세상 사람들이 보석이라고 일컫는 물건이지만, 돌보지 않아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 방안에서 그런 황금과 옥으로 치장을 하고 앉아 있다면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농사짓는 집의 여인이 짧은 적삼에 베치마를 입었으면서 그 위에 구슬과 비취로 만든 머리 장식을 하고 있다면 비웃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아름다운 명성과 좋은 관직은 세상 사람들이 누리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러나 얻을 만한 때 얻는다면 좋은 것이겠지만 얻을 만한 때가 아닌 때에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면,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전한(前漢)의 세상에서는 유협(遊俠)을 숭상하였고, 전국시대의 경춘(景春)은 장의(張儀)와 공손연(公孫衍)1을 대장부로 간주하였다. 그들의 명성도 명성이라 할 수는 있지만 그 때는 다름 아닌 한나라가 쇠퇴한 때요 전국(戰國)시대였다. 송(宋)나라 소흥(紹興) 시절에는 금(金)나라와 강화를 맺자는 주장에 찬동하는 자들이 높은 벼슬자리에 올랐고, 경원(慶元) 연간에는 주자(朱子)를 그릇된 학문이라고 공격하는 자들이 요직에 두루 포진해 있었다. 그런 자리가 좋은 자리이기는 하지만 그 때는 바로 진회(秦檜)와 한탁주(韓탁胄)2가 행세하던 시기였다. 저들은 자신들이 훌륭하다고 생각했겠지만, 군자들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썩은 쥐보다도 못하여 병든 올빼미가 한 번 놀랄 거리도 3되지 못한다.
무릇 이러한 것들이 다 겨울에 백상루를 구경한 소금장수와 다르지 않다.

권득기(權得己), 〈만회집(晩悔集)〉, 《염상유백상루설(鹽商遊百祥樓說)》

  1. 장의와 공손연은 모두 전국시대의 종횡가(縱橫家)이다. 《맹자(孟子)》 〈등문공하〉에서 경춘이 그들에 대해 말하기를, “공손연과 장의가 어찌 진정한 대장부가 아니겠습니까? 그들이 한 번 화를 내자 제후들이 두려움에 떨었고, 편안하게 지내자 천하가 전쟁을 멈추었습니다.” 하였다. [본문으로]
  2. 진회는 금나라와의 화친을 주장하였고, 한탁주는 주희(朱熹)를 내쫓고 성리학을 위학(僞學)으로 몰아 경원당화(慶元黨禍)를 일으켰다. 이 두 사람은 송나라의 대표적 간신으로 평가받는다. [본문으로]
  3. 《장자(莊子)》 〈추수(秋水)〉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혜자(惠子)가 양(梁)나라의 재상으로 있을 때, 어떤 사람이 혜자에게, “장자(莊子)가 와서 당신을 대신하여 재상이 되려고 한다”고 말했다. 혜자가 몹시 두려워하여 전국에 수배하여 사흘 밤낮을 장자를 찾았다. 장자가 스스로 혜자를 찾아가서 이렇게 말했다. “남방에 원추란 새가 있는데 자네는 아는가? 원추는 남쪽 바다를 출발하여 북쪽 바다로 날아갈 때 오동나무가 아니면 쉬지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으며, 단물이 나는 샘이 아니면 마시지 않았네. 그런데 올빼미가 썩은 쥐를 얻고서 원추를 쳐다보면서 쥐를 뺏길까 봐 ‘꿱’ 하고 을러댔다네. 그처럼 자네도 양나라 재상 자리 때문에 나를 을러대는 것이 아닌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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