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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중매 / 이종묵

부흐고비 2008. 11. 27. 06:41

 

설중매


눈 속의 매화 설중매(雪中梅). 얼마나 멋진 말인가? 천지는 눈 속에 하얗게 얼어붙었는데 홀로 꽃을 피우니. 예전의 선비들은 설중매를 좋아하고 또 스스로 설중매이고 싶어 하였다. 설중매는 선비의 표상일 뿐만 아니라 여인의 마음까지 사로잡아 기생도 다투어 제 이름을 설중매라 하였다.

그러나 과연 눈 속에 매화가 필 수 있을까? 우리나라에서 눈이 펄펄 날리는 겨울철에는 매화가 피지 않는다. 요즘에는 산수유, 개나리와 나란히 핀다. 날씨가 지금보다 더 찼던 예전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기후가 따뜻한 영남 일부 지역에서는 겨울에 매화꽃을 볼 수 있었지만 조금만 북쪽으로 올라가면 그러하지 못하였다. 장유(張維)의 시 〈강가의 매화[臘前江梅]〉를 보면 “서울의 귀족들 화분 매화를 애지중지하여, 더운 물로 따뜻하게 해도 도통 피지 않는데(洛中豪貴重盆梅, 煖護湯熏苦未開).”라 하였으니, 17세기 서울에서는 세밑에 매화를 보기 위해서 화분을 이용하는 등 기온을 조절하기 위하여 온갖 정성을 기울였지만, 그럼에도 매화꽃을 피우는 일이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눈이 펄펄 날리는 한겨울에 꽃을 피운 매화를 즐기기 위하여 옛날 중국에서는 화병을 주로 이용하였다. 중국에서는 화병에서 꽃을 피우는 기술이 발달하여 원굉도(袁宏道)의 《병사(甁史)》라는 전문서가 나온 바도 있다. 이러한 자료를 보면 중국에서는 소금물이나 따뜻한 물을 화병에 부어 일찍 꽃을 피우게 하는 병화법(甁花法)이 발달한 것을 알 수 있지만, 우리나라에는 이러한 방법이 개발되지 않았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이른 시기부터 구리나 도자기로 된 화병을 널리 사용하였지만, 이미 핀 매화를 꽂아두는 데 그쳤을 뿐 꺾꽂이로 꽃을 피우게 하였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한겨울에 매화꽃을 보기 위해서는 주로 매화 화분을 집안에 들여놓고 꽃피는 시기를 조절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그런데 방안에 매화 화분을 그냥 두면 먼지가 끼어, 깨끗함을 생명으로 하는 매화의 운치에 방해가 된다. 그래서 18세기 무렵부터 매화 화분을 넣어두는 작은 감실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매화 감실에 대해서 18세기 문인 정극순(鄭克淳)은 〈이소매기(二小梅記)〉(《연뢰유고(淵雷遺稿)》)에서 자랑스럽게 다음과 같이 적어놓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이 백 가지가 서툴지만 볼 만한 것은 매화를 기르는 것이다. 그 법이 매우 좋은데 예전에는 없던 것이다. 매화는 청고소담(淸高疎淡)한 것이 꽃에 있고 애초에 그 둥치는 여러 꽃나무 중에 아름다운 것들과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그 둥치가 예스럽지 않으면 그 아름다움을 칭할 수 없기에, 이에 기이함을 좋아하는 선비들이 산골짜기를 뒤져 복숭아와 살구나무 고목을 찾아 베고 자르고 쪼개고 꺾어 그루터기와 앙상한 뿌리만 겨우 남겨놓는다. 비바람이 깎고 갈고 벌레가 좀먹은 다음에, 무너지고 깎아지른 벼랑에 거꾸로 매달리고, 오래된 밭의 어지러운 돌 더미에 비스듬히 눌려, 구불구불 옹이가 생기고 가운데 구멍이 뚫려 마치 거북과 뱀, 괴물 모양으로 된 것을 가져다가 접붙인다. 운치 있는 꽃이 평범한 가지에서 훌훌 떨어지고 나면, 그 위에 접을 붙인 다음 흙 화분에 심는다. 날이 차기 전에 깊숙한 방에 넣어두는데 또 왕성한 기운이 흩어져 빠져나가 꽃을 피우지 못할까 우려되면, 작은 합(閤)을 만들어 담아둔다. 먼지와 그을음이 절대 바깥을 오염시키지 않게 하여 맑은 싹이 안에서 자라날 수 있게 한다. 적당한 장소가 생기면 옮겨서 북돋워주고 물을 주되 또 합당한 재배법대로 한다. 이 때문에 온 천지가 한창 추울 때가 되면 꽃을 피운다. 마치 신선이나 마술사가 요술을 부려 만들어 낸 것 같다. 아아, 신기하다.

매화는 꽃이 아름답지만 나무 등걸 자체는 보통 꽃나무와 다를 것이 없다. 등걸이 기굴한 맛을 풍기게 하기 위해서 복숭아나무나 살구나무를 기굴한 모습으로 변형시킨 다음 매화나무와 접을 붙인다. 그리고 방안에 작은 감실을 만들어 매화 화분을 보호하는데 이를 매합(梅閤)이라 한다. 이어지는 글에서 정극순은 늘 우리나라 사람이 서툴고 거칠어 백 가지 중에 한 가지도 좋은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는데 오직 매화를 기르는 데서만은 중국도 따를 수 없다고 자랑하였다. 우리나라가 비록 조그마하지만 조물주가 기이함을 좋아하여 매화를 키우는 기술을 우리나라 사람에게 베풀어준 것이라 하였다.

눈 내리는 계절이 되었다. 설중매는 술로는 있지만 이제 꽃으로는 보기 어렵다. 지금의 농업기술로 설중매를 만들어 팔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이야기는 아직 들어보지 못하였다. 매화의 깨끗함을 사랑하는 선비가 없어서인가?

이종묵,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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