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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묵은 먹 / 김상숙

부흐고비 2009. 1. 16. 08:43

 

오래 묵은 먹


이호(梨湖)에 있는 집의 옛 물건 가운데 오래 묵은 먹 수십 정(丁)이 있는데 자기로 만든 항아리에 넣어서 단단히 봉해 두었다. 이 먹은 우리 증조할아버지께서 옥천(沃川) 원님으로 계실 때 만드신 물건이다. 이제 백여 년이 지난 물건인데 내가 한 정을 가져다 쓰면서, 해가 너무 오래 지나 분명히 색이 거무튀튀하게 바뀌리라고 지레 짐작했다.

그런데 몇 푼(分)쯤 갈자 광택과 색깔이 번쩍여서 어린아이 눈동자처럼 맑고 옻칠한 듯 짙어 검었다. 검은 먹물이 기묘하여 비교할 상대가 없었다. 그래서 새로 나온 해주(海州) 먹과 중국, 일본의 진귀하고 좋은 먹을 함께 갈아서 살펴보았더니 모두 그 먹에는 미치지 못했다. 기이하고도 기이한 일이었다.

증조부께서는 글과 글씨에 고질병이 있으셨고, 글씨는 송설체(松雪體)를 모범으로 삼으셨다. 자손들 가운데 증조부의 글씨를 보물처럼 보관하는 분도 있다. 고을 원님이 되어 먹을 만드실 때 혹시라도 특별한 비방이 있어서 먹이 오래 묵어도 색이 변하지 않는 것일까?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당(唐)과 송(宋) 나라 이래로 문인학사(文人學士)들 가운데 먹을 아끼는 고질병을 가진 분이 많았다. 진품(珍品)의 옛 먹을 얻으면 차마 갈아 쓰지 못하는 분도 있었다. 그래서 이정규(李廷珪)가 만든 먹을 소장한 이공택(李公擇)이, 자신도 그 먹을 갈지 않고 남이 가는 것도 허락하지 않은 짓을 소동파(蘇東坡)는 비웃었다. 이공택이 죽은 뒤에 이정규 먹은 여전히 남아 있었는데 그 때문에 소동파가 ‘사람이 먹을 가는 것이 아니라 먹이 사람을 간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는 먹을 아끼는 고질병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없다. 게다가 마유묵(麻油墨)을 만들 때 사향 재료를 쓰지 않기 때문에 많은 세월을 보내면 색이 변하여 쓸 수 없다. 오래 묵을수록 더욱 좋아지는 중국 먹과는 다르다. 이 먹도 마유(麻油)로 만든 물건인 듯한데 백여 년을 지내고도 색과 광택이 오히려 이와 같은 까닭은 무엇일까?

어떤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먹을 보관하는 법을 잘 몰라서 그렇다고 말한다. 먹을 감싸서 습기가 차거나 건조한 곳에 놓아두기 때문에 오래 지나지 않아서 색이 변한다. 자기 항아리에 넣어서 두는 것이 먹을 잘 보관하는 법이라고 한다. 정말 이 때문일까?

이 먹이 이제 오대(五代)를 전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쓰기에 좋다면, 앞으로 분명히 십대(十代)를 전해 내려가도 좋으리라. 나는 일찍이 북경 시장에 오가는 사람으로부터 수백 냥의 돈으로 이정규가 만든 먹 한 덩이를 사는 사람이 있다고 들은 적이 있다. 그렇지만 이 먹의 진귀하고 특이함은 이정규 먹에 비교해서 덜하지 않다. 기꺼이 일백 냥의 돈으로 이 먹을 바꿔가는 사람이 설마 우리나라에 있을까? 그저 자손들이 전해가며 보물로 여기는 것이 옳으리라.

김상숙(金相肅,1717∼1792, 서예가),

                      <고장묵제발(古藏墨題跋)>,《배와시문필적(坯窩詩文筆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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