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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 강둑에 심은 버드나무

공주성(孔州城, 경흥의 옛이름) 동북쪽은 두만강을 임하고 있다. 강 너머는 모두 산으로 숲과 맹수가 많으니, 바로 예전 생여진(生女眞)의 터전이다. 강 안쪽은 모두 평야인데 수목이 없다. 백성들은 척박한 언덕에서 밭을 가는데 매번 여름 홍수가 나면 강둑이 잘 무너져 땅이 날로 줄어들었다. 얼음이 얼게 되면 백성들이 혹 강을 건너가서 나무를 해오기도 하는데 발각되면 죽게 된다. 이곳은 큰 바람이 자주 불어 종종 지붕을 뽑고 기와를 날려버린다.

정유년 겨울 내가 죄를 받아 공주로 폄적되었다. 추위로 감히 바깥출입을 하지 못하다가 이듬해 3월에 얼음이 비로소 녹자 이에 가마를 타고 강가를 순회하였다. 두만강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대략 8백여 보가 되는데, 성 인근의 장정 7천 5백 명을 선발하여 한 사람당 버들가지 다섯 개씩 가지고 가서 강가에 줄지어 심게 하였다. 1보에 4그루를 심어 목책처럼 빽빽하게 하였다.

어떤 객이 나에게 말하였다.

“이는 그다지 급한 일이 아닌 듯하오. 백성들이 너무 고생하지 않소? 옛말에 10년 머물려 하면 나무를 심는다 하였는데, 이제 당신이 이 고을에 머물 날이 짧으면 반년이요 길게 잡아도 1년 정도일 터인데, 무슨 일로 나무를 심으시는가요?”

내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저 변방이라는 새(塞)는 막는다는 색(塞)의 뜻이라오. 안과 바깥을 격리시키는 곳이라는 말이지요. 따라서 예전에는 느릅나무를 심은 유새(楡塞)니 버들을 심은 유성(柳城)이라는 이름이 생긴 것이라오. 지금 우리는 여진과 강 하나를 끼고 살아가고 있어 말을 타고 사냥하는 저들이 아침저녁 강 언덕 아래까지 이르고 있소. 대개 우리가 기거하면서 먹고 마시는 모습이 저들의 눈에 보이지요. 어찌 하루라도 평안할 수 있겠소?

이제 내가 버드나무를 심은 것은 다섯 가지 이로움이 있지요. 첫째는 우리 강역을 은폐하기 위한 것이요, 둘째는 말을 타고 돌격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요, 셋째는 강둑이 물살에 파먹히는 것을 대비하기 위한 것이요, 넷째는 땔감용 나무를 대기 위한 것이요, 다섯째는 바람을 막기 위한 것이지요. 하나의 이로움을 생기게 하면 하나의 해로움을 제거하게 된다오. 이 때문에 백성들에게 노역을 시키는 것이지 백성을 골병들게 하려는 것은 아니지요. 게다가 한 번 일을 하여 다섯 가지 이익이 함께 이르게 되니 어찌 급하지 않다 하겠소?

내가 비록 이곳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를 이어서 오는 사람이 도끼질을 하고 불살라 버리지 않는다면 몇 년이 되지 않아 백성들이 그 이익을 누릴 수 있지 않겠소? 어찌 길게 10년까지 기다릴 것이 있겠소? 백성들이 정말 이롭다면 온 고을 사람들이 이를 보호하게 되겠지요. 비록 백 년 천 년이라도 그렇게 될 터이니, 어찌 10년 계획으로 그칠 뿐이겠소? 공자(孔子)는 ‘사람이 멀리 생각함이 없으면 가까운 근심이 반드시 생긴다.’고 하였소. 가까운 공효만을 급하게 여기지 말고 먼 일을 도모하여야 할 것이오. 그러니 이 일이 바로 급한 것이라 하지 않겠소?

마침내 이 글을 관아의 벽에다 써서 훗날의 군자를 기다린다.

홍양호,〈두만강에 버드나무를 심은 뜻(豆滿江植柳記)〉《이계집(耳溪集)》

☜홍양호의 글씨 탑본《만류제비(萬柳堤碑)》인용_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해 설 - 이종묵(서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홍양호는 시련을 맞게 된다. 1774년 도승지와 대사성에 올라 청운의 꿈을 펼쳐가던 홍양호는 정조가 즉위하자 정조의 등극을 방해한 정후겸(鄭厚謙)의 앞잡이로 몰렸다. 조정에 더 이상 발을 붙이지 못하여 1776년 10월, 겨울을 앞둔 날 함경도 경흥의 부사로 먼 길을 떠났다.

홍양호는 자신의 앞날이 어떻게 될지 몰라 불안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홍양호는 황량한 두만강 강둑에 버드나무를 심었다. 홍양호는 7천 5백 명에게 5그루씩 강둑에 심게 하였다. 그리하여 도합 3만여 그루의 버드나무를 심게 된 것이다. 이런 거대한 역사를 일으켰기에 사람들은 이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말을 해대었다. 이에 대해 홍양호는 다섯 가지 이점을 들었다. 적대적인 여진으로부터 우리나라의 실정이 드러나지 않게 하고 강성한 기마병이 돌진하는 것을 막기 위한 국방정책의 일환이 될 수 있다고 하고, 또 홍수 때 토지의 유실을 방지하고 풍해로부터 민가를 보호하며 땔감용 목재를 확보한다는 백성의 편의를 들었다.

홍양호는 일찍부터 제방의 중요성을 인식하였다. 강동현(江東縣) 남쪽의 시냇물이 해마다 범람하여 백성들을 괴롭히자 강동현감으로 부임한 홍양호는 1759년에 백성들과 제방을 쌓고 버드나무를 심은 다음 그 이름을 만류제(萬柳堤)라 하고 이를 기념하는 비를 세웠다. 그 탁본이 지금도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홍양호에게 경흥은 참으로 의미 있는 땅이었다. 도성에서 먼 변방으로 물러나 있었지만 좌절하지 않았다. 목민의 뜻을 잊지 않아 제방에 나무를 심었고 또 목민의 정신으로 48수의〈북새잡요(北塞雜謠)〉를 지어 두만강 일대의 풍속을 노래로 기록하였다. 이와 함께 홍양호는 호고(好古)의 취미가 있었기에 옛 숙신(肅愼)의 땅인 경흥에서 석노(石砮)와 석부(石斧), 그리고 황송통보(皇宋通寶), 경덕원보(景德元寶), 원풍통보(元豊通寶), 원우통보(元祐通寶) 등 중국의 오래된 동전을 구하여, 서울로 돌아온 후 자신의 집 사의당(四宜堂)을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로 채울 수 있었다.

옛말에 “일 년의 계책은 곡식을 심는 일이요, 십 년의 계책은 나무를 심는 일이다.(一年之計, 樹之以穀, 十年之計, 樹之以木.)”라는 말이 있다. 10년을 살 계획이 있어야 나무를 심겠지만, 홍양호는 햇수를 따지지 않고 자신의 영리가 아니라 백성을 위하여 나무를 심었다. 두만강 하구에서 북한 땅을 바라보는 이는, 혹 그곳에 아직 남은 버드나무를 보게 된다면 그 나무가 바로 홍양호가 심은 버들의 자손임을 기억하고 불우한 시절에도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기억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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