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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과 함께 한 온양온천
옛날 백성은 병이 나도 의원을 찾기 어려웠다. 그저 인근에 온천이 있으면 몸을 담가 병을 치유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름난 온천이면 왕과 귀족들의 전유물이 되어 얼씬하기 어려웠다. 조선시대 왕실에서 가장 애호하던 온천이 온양에 있었다. 영조는 이 온천을 백성에게 개방하였다. 이에 온천은 사람들로 메워졌다. 조수삼(趙秀三)은 온천욕에 대한 글을 남겨 사람들의 경계로 삼게 하였다.
온천의 밑에 유황이 있으므로 그 물맛이 떫고 성질이 따스하다. 여석(礜石)에서 분출하는 것은 세고 뜨겁지만 병을 치료하는 데는 유황에서 분출하는 것보다 낫다. 단사(丹砂)에서 분출하는 것은 맛이 달고 냄새가 나지 않아 수명을 연장하고 양생하는 데 도움이 된다.1 단사 온천은 천하에서 오직 여산(驪山)에서만 나는데 한나라의 감천궁(甘泉宮)과 당나라의 화청궁(華淸宮)이 그러 한 예이다.2 여석 온천 또한 백 개나 천 개 중 하나 정도로 귀하다. 유황 온천은 곳곳에 흔하게 있는데, 일체의 종기나 습종(濕腫), 마비 증세 등을 귀신같이 치료한다. 이러한 것은 옛사람들이 지은 글에 나온다.
내가 어릴 때부터 병이 많아 온천욕을 좋아하였다. 중국의 여산은 내가 본 적이 없지만 계주(薊州)의 행궁(行宮)이나 봉성(鳳城)의 탕점(湯站),3 그리고 우리나라 선천(宣川)과 희천(煕川), 평산(平山), 명천(明川) 등의 온천은 한두 번 가보았다. 그러나 하나같이 유황온천이었다. 오직 평산의 온천은 뜨겁고 세며 물이 한 자 정도의 높이로 솟구쳐 나오는데, 또 야채를 데치거나 닭과 돼지를 삶을 수도 있다고 한다. 아마도 여석에서 나오는 온천이 아닌가 싶다.
온양온천은 고려 때부터 우리나라에서 명성을 날렸고 우리 역대 임금님들이 여러 번 나들이를 하셨다. 지금 온천 곁에 행궁이 있으며 온천 위쪽에 욕실 전각이 있다. 행궁 동쪽에 쓰지 않는 온정이 둘 있다. 예전 목욕간이라 하는데 담장을 두르고 궐문이 만들어져 있다. 안쪽으로는 시중드는 궁녀와 내시들의 처소, 바깥쪽으로는 호종한 신하들의 숙소가 두루 잘 갖추어져 총총히 늘어서 있다. 대부분 기울어지고 무너졌지만, 휘장이나 발, 병풍, 서안 등 여러 가지 임금께 올리던 기물들은 먼지 속에 버려진 채 쌓여 있어도 아직은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못쓰게 되지는 않았다. 대개 영조 경오년(1750) 이후 거둥이 없었으니 지금까지 85년이 되었다. 부로들도 남아 있는 이가 없어, 당시의 일을 얻어 들을 데가 없으니, 탄식할 만하다. 우리 임금님은 질환이 없는 듯하니, 이것이 진실로 우리 백성들이 기뻐하고 다행으로 여기는 것이다.
욕실 전각은 남북 방향으로 기둥이 다섯이고 동서 방향으로 기둥이 넷이다. 옥돌로 함 가운데를 빙둘러 붙여서 두개의 온정을 만들었다. 마치 한 방인 것 같지만 가운데를 막아 놓았다. 온정의 깊이는 6자 정도인데 세로는 16자가 되고 가로는 8자가 된다. 그 곁에 세 개의 구멍이 나 있어 그곳에서 고인 물이 흘러나온다. 전각의 벽 밑으로 나오기 때문에 안쪽의 두 온정을 상탕(上湯), 중탕(中湯)이라 하고 바깥으로 나오는 것을 하탕(下湯)이라 한다. 온천수가 상탕 서북쪽에서 분출되어 동쪽으로 꺾여 중탕으로 들어가 분출되고 다시 남쪽으로 꺾어지면 바깥으로 나와 하탕이 된다.
온천수는 그다지 뜨겁지는 않아 처음에는 뜨겁지만 한참 앉아 있으면 따뜻하여 좋아할 만하다. 만약 분출되는 구멍을 막아 물을 고이게 해놓으면 밥 한 끼 먹을 정도의 시간에 두 온정에 몇 자 높이로 찬다. 가물다거나 아니면 겨울이나 여름이라 하여 수량이 줄어들거나 수온이 변화하지는 않는다. 상탕에서 하탕까지의 거리는 적어도 10여 보는 족히 될 듯하다. 그 땅 크기만큼 큰 솥을 만들고 땔감을 준비하여 물을 덥히고자 한다면 날마다 천 명의 젊은이들이 손에 굳은살이 배도록 일을 하더라도 온천에서 끊임없이 뜨거운 물이 나오는 것처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 참으로 기이하다.
온정에는 여산(驪山)이나 계주(薊州)와 같이4 거북이나 물고기, 게와 같은 동물이나 연꽃과 마름과 같은 물풀도 없고 완상할 만한 보옥이나 기교있게 아로새긴 치장도 없지만, 돌의 재질이 뛰어나고 제작이 완벽하고 치밀하다. 조종(祖宗)의 태평성세에 공업이 위대하고 화려하며 규모가 굉장하면서도 질박하였다는 것을 우러러 살필 수 있다. 정말 요즘 사람들이 사모하여 비슷하게나마 본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선비나 서민들은 감히 상탕에서 목욕을 하지 않는 것이 예의다. 그런데 오직 우리 돌아가신 선왕께서 하교하시기를 “나에게 온정에 가라고들 하는데, 백성들도 병을 치유해야 한다. 내가 목욕을 하지 않을 때는 백성에게 주어라. 게다가 매일 사용하는 것도 아니고 예비용으로 둔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이제부터 영원히 두 온정의 출입을 금지하는 규정을 풀어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하늘의 은혜로운 물에 함께 목욕을 하여 모두 태평성대에서 천수를 누리게 하라.” 하셨다. 위대하도다, 대왕의 말씀이여. 이는 성덕(聖德)의 일이다.
이에 귀가 먹은 자, 말을 못하는 자, 다리를 저는 자, 종기나 부스럼이 난 자 등이 지팡이를 짚고 들 것에 실리고 등에 업히고 수레에 실려서 줄줄이 길을 메우며 찾아와 사시사철 빈 날이 없게 되었다. 비록 병이 심한 자라 하더라도 열흘이 되지 않아 누워서 왔다가 걸어서 돌아가게 되었고 신음하면서 들어왔다가 노래를 부르면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아아, 온천의 영험함이 이런 정도라니!
갑오년(1834) 8월 내가 옴이 걸려 온천에 목욕하러 왔는데, 머문 지 며칠만에 나았다. 온천의 물을 마셔보았더니 달콤하고 또 약간 유황 냄새가 났다. 이른바 단사에서 분출하는 온천이 아니겠는가? 어떤 사람은 이 온천에서 목욕을 하면 병이 낫지만, 오래 목욕을 하지 않으면 병이 재발한다고 한다. 아, 이 어찌 온천 때문이겠는가? 병이 들어 온천에서 목욕을 하는 사람은 모두 바깥으로부터 육기(六氣)5의 병증에 걸리고 칠정(七情)이 그 마음을 손상시켜 음침한 기운이 굳게 엉겨 오래되면 병이 생긴다. 이를 치료하자면 또한 적셔주고 걸러주며 씻어줄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음침한 것은 씻어내고 엉긴 것은 풀어준 다음에야 비로소 병이 사라지게 된다. 그러니 어찌 갑작스럽게 이르는 병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저 살갗에 조금 차도가 있는 것만 보고 마치 오래 있으면 몸이 더럽혀질까 재빨리 가버렸다가, 조금 있다가 질병이 다시 도지게 되면, ‘온천 때문이다’, ‘온천 때문이다’ 하니, 어찌 심히 어리석은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듣자니, 광동(廣東)에 도화천(桃花泉)이 있는데, 북쪽에서 온 등짐장사들이 한번 그곳 사람과 정을 통하게 되면, 돌아가는 길에 반도 못 가서 큰 종기가 생겨난다고 한다. 백약이 무효라서, 부득이 도화천으로 되돌아와 물을 마시면 하루도 되지 않아 정상이 되고 이 때문에 그 땅에서 늙어가는 사람이 대부분이라 한다. 또 온천수를 마시더라도 남녀관계를 맺지 않은 사람은 아무 탈 없이 돌아간다고 한다. 나는 그 말이 사실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사실이라도 그 사람이 자초한 일일 뿐이니, 어찌 도화천이 그렇게 한 것이라 하겠는가?
내가 장차 돌아가려 할 때 어떤 사람의 말을 기록하여 온천의 입장을 밝히고, 겸하여 목욕하러 오는 사람을 경계한다.
조수삼(趙秀三),〈온정기(溫井記)〉《추재집(秋齋集)》
영괴첩 중 [온양온천행궁도]_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해설 - 이종묵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우리나라에 이름난 온천이 많았다. 이수광(李睟光)은 《지봉유설》에서 우리나라 도처에 온천이 있는데 평산(平山),연안(延安),온양(溫陽),이천(伊川),고성(高城),동래(東萊)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데 그 중 이천의 갈산(葛山)이 가장 최고라 하였다. 또 이규경(李圭景)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온양의 온천은 한 온정에서 찬 물과 뜨거운 물이 동시에 나온다고 하였고 길주(吉州)의 온수평(溫水坪)에는 길가의 개울에 온천수가 거세게 분출하여 한겨울 눈 속에서도 김이 몇 리에 걸쳐 자욱하다고 하였다. 또 울진과 삼척 경계의 온천은 바위에서 물이 나와 폭포를 이룬다고 하였다.
우리나라에 이러한 기이한 온천이 많았다. 그 중에서 왕실에서 자주 이용하던 온천이 바로 온양에 있었다. 온양온천은 세종과 세조가 자주 찾았고 그 이후에도 꾸준히 왕실에서 애용하였던 듯하다. 아예 그곳에 행궁을 세웠는데 위의 글에서 보듯 상당히 화려한 시설을 갖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온양온천은 임금이 사용하는 온정과 백성들이 사용하는 온정이 따로 있었다. 제일 위쪽 상탕은 임금이 이용하고 하탕은 백성이 이용할 수 있게 배려하였다. 이러한 전통은 세조 때 이미 확립되어 임금이 직접 사용하는 온정 외에는 일반 백성도 자유롭게 사용하게 조처하여 여민동락(與民同樂)의 정신을 잊지 않았다. 영조는 여기에 더하여 상탕과 중탕 모두를 백성들이 사용할 수 있게 허락하였다.
금제가 풀리자 사람들이 온양온천으로 몰려들었다. 들것에 실려 온 자는 걸어서 가고 신음하면서 온 자는 노래하면서 돌아갔다니, 병이 나은 백성들은 영조의 성덕을 노래하였음직하다.
그러나 온천이 만병통치의 효험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온천에 와서 몸을 씻으면 병이 낫기는 하지만 한참 지나면 다시 병이 도진다고 불평을 하였다. 조수삼은 병이 갑자기 이르는 것이 아니요 또 한꺼번에 낫는 것이 아니므로, 온천욕을 만병통치의 약으로 여겨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전설에 나오는 도화천을 예로 들었다. 도화천에 온천욕을 온 이가 그곳 사람과 정을 통하면 창병이 생겨 온천욕을 하여야만 병이 나았다. 결국 병 때문에 그곳을 떠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조수삼은 온천욕에 매달리는 것이 도화천의 정사와 같다고 하였다.
온양온천은 온천욕을 위한 공간이지만 역사가 서려 있는 문화의 공간이기도 하다. 정조는 온양온천에 느티나무를 세 그루 심었는데 사도세자가 이곳을 찾은 것을 기념해서다. 그리고 비를 세웠는데 바로 영괴대비(靈槐臺碑)다.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영괴대기(靈槐臺記)》에 온양온천의 행궁 그림이 채색으로 그려져 있다. 지금 그곳에는 온양관광호텔이 들어섰다. 서민이 이용하기 어려우니 세조나 영조의 여민동락의 뜻이 근대에 다시 퇴색한 것이라 하겠다.
* 온양온천의 역사에 대해서는 김남기, 「조선왕실과 온양온천」 (《문헌과해석》 23호, 2003년 여름)에 자세하다.
* 아산시 홈페이지/온양온천 http://www.asan.go.kr/tour/spa_1.asp
- 오잡조(五雜組)》에 따르면 온천수 아래에는 주사나 유황, 여석이 있다고 하였는데 여석은 독성이 매우 강한 물질이다. [본문으로]
- 여산에 있는 감천궁(甘泉宮)은 한무제(漢武帝) 때의 피서궁이며 화청궁(華淸宮)은 당명황(唐明皇)이 지은 별궁(別宮)으로 양귀비(楊貴妃)와 온천욕을 즐기던 곳이다. 감천궁에 온천이 있다는 기록은 확인하지 못하였다. [본문으로]
- 모두 중국으로 사신 갈 때 행로에 있어 들르던 곳으로 온천이 있었다. [본문으로]
- 여산(驪山)에 당 현종(玄宗)의 별궁 화청궁(華淸宮)이 있는데, 매년 10월 1일 양귀비(楊貴妃)를 데리고 가서 온천욕하고 놀았다. 계주(薊州)의 행궁(行宮)에 온천이 있고 그곳이 화려하였다. [본문으로]
- 한의학에서 한(寒), 열(熱), 조(燥), 습(濕), 풍(風), 화(火)의 여섯 가지 병증(病症)을 말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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