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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물려준 화로


우리 집에 작은 흙 화로 둘이 있는데, 돌아가신 조부와 부친께서 사용하시던 것으로 우리 형제에게 전해진 것이다. 우리 형제가 지극한 보물처럼 아껴서 두꺼운 누런 종이로 해마다 한 번씩 덧입혀 화로 두께가 몇 치에 이르렀고 붙인 종이가 흙보다 많아졌다. 덧입혔기 때문에 늘 새 것 같았고 두껍게 되었기 때문에 오래갈 수 있었다. 어떤 이가 말하였다.

“흙 화로가 귀한 것이 아닌데 삼대에 걸쳐 전해졌소. 그대들 형제가 또 이처럼 아끼니 너무 인색한 것이 아니겠소?”

내가 탄식하였다.

“아, 당신은 이 화로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몰라서 그러는 것이오. 이는 우리 어르신의 덕이 깃든 것이라오. 예전 우리 조부께서 숨어사시면서 도를 즐겨 인왕산(仁王山) 아래 집을 짓고서, 집에 들어가면 도서와 사적, 시와 예학을 즐기시고 집을 나서면 소나무와 대나무, 꽃나무 아래에서 노니셨소. 맑은 얼굴에 하얗게 센 머리로 매일 집과 동산 사이에서 지팡이를 끌고 다니셨소. 그러면 선친께서 반드시 이 두 화로를 가지고 뒤를 따르셨는데, 한번도 꺼지게 한 적이 없었지요. 노비 이강(二江)이란 놈이 그 뜻을 받들어 늘 숯을 사서 떨어지지 않게 하여 술이나 국을 따뜻하게 데웠고 차를 끓이거나 밤을 굽기도 하였지요. 선친께서는 꼭 손수 밤을 꺼내 입으로 재를 불어 털고 직접 조부님께 올렸다오. 조부님께서 늘 화로 앞에서 즐거워하셨소. 병구완을 할 때도 이 두 화로를 버리지 않았다오. 날씨가 차고 눈이 많이 내리면 밤에 화롯가에 앉아서 약을 달였는데, 혹 가다 날을 새기도 하였다오.

모든 우리 집에 있는 소반이나 사발, 광주리, 술병, 술통 등 맛난 음식을 담는 그릇, 그리고 자루와 돗자리, 저울, 거적, 빗자루, 신발, 세숫대야, 주전자, 옷걸이 등 아침저녁 필요한 살림살이, 거문고 자루, 붓통, 대나무 의자, 매화 감실(龕室), 종려나무 지팡이, 화초를 아로새긴 벼루, 삼인도(三寅刀), 녹각 베개, 고래수염으로 만든 젓가락1, 비백(飛白)의 서체로 쓴 족자, 산수화를 그린 병풍 등 마음을 즐겁게 하고 낯빛을 기쁘게 하는 물건들이 어느 하나 선친께서 어버이를 모시던 도구가 아닌 것이 없었다오. 시종 가지고 다니며 어버이를 모시기 위한 용도로 써서 정성을 다해 봉양하고 극진히 섬긴 어버이에 대한 효심을 지금까지도 아련히 볼 수 있는 것으로 말한다면, 이 두 화로에서 그중 많이 볼 수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우리 형제가 이제 어버이를 잃어 외로운 처지가 된 후 이 화로를 마주하노라면 문득 눈물이 줄줄 흐른다오. 어찌 차마 천시하여 없애버림으로써 정이 깃든 물건을 영원히 인멸시킬 수 있겠소? 저 범씨(范氏)의 묵장(墨帳)이나 한씨(韓氏)의 낡은 궤안, 왕씨(王氏)의 청전(靑氈)2 등이 모두 깃든 바가 있지요. 이 때문에 자손들이 보호하여 가지고 있으면서 바꾸지 않았던 것이오. 어버이의 정이 깃든 것을 보배로 여긴다면 어찌 물건의 귀천을 따지겠소? 흙 또한 금이나 옥과 가치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것이라오. 당신은 화로를 흙으로 만들었다고 하여 귀하게 여기려 들지 않으니, 당신 말대로라면 오직 산예로(狻猊爐)나 박산로(博山爐)3 같은 세상에서 보배라 일컬어지는 화로라야 비로소 귀하게 여겨 대대로 전하겠소? 어찌 비루한 생각이 아니겠소?”

그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옷깃을 여미고 일어나 말하였다.

“그러하군요. 그대들 형제가 이 화로를 아끼는 것은 당연합니다. 나는 이제 이를 비로소 알았습니다. 그대들 형제나 자손뿐만 아니라 그대 집을 지나는 모든 사람들이 이 화로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를 알게 되면 효심이 샘솟듯 솟아나지 않겠습니까?”

그 사람이 나가고 나서 이를 설로 지었다.

박준원(朴準源),〈아버지의 질화로[土爐說]〉《금석집(錦石集)》

 

조선후기 문방도


 

[해설] - 이종묵(서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박준원 집안은 조부 박필리(朴弼履) 때부터 인왕산 자락 세심대(洗心臺)에 집을 정하였다. 세심대는 풍광이 사계절 아름다운 곳이었다. 봄이면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고 고운 풀이 무성하며 여름철 해당화가 필 때면 꾀꼬리 소리가 들렸다. 가을철 벽오동 푸른 잎이 떨어지면 서릿발처럼 흰 달빛이 뜰에 가득하고 겨울이면 푸른 소나무가 꼿꼿하게 서서 바람이 불면 용이 울음우는 소리를 내었다. 봄철마다 부친 박사석(朴師錫)은 마을 사람들을 불러 꽃구경하는 모임을 만들고 집에 소국주(少麴酒)를 담아 사람들을 대접하였다. 또 여름에는 그의 집이 시원하여 사람들이 피서를 왔다. 위의 글에도 나오는 하인 이강(二江)이 접붙이는 데 재주가 있어 정원에는 과실나무가 매우 풍성하여 제수용으로 하기에 충분하였다. 밭에는 오이와 무가 자라 자급할 만하였다. 박윤원(朴胤源)과 박준원 형제에게는 세심대 집이 이러한 추억이 어린 곳이었다. 박윤원은〈세심대유거기(洗心臺幽居記)〉를 지어 이런 사실을 자랑한 바 있다.

이 집에는 오래된 질화로가 있었다. 그다지 값나가는 것이 아님에도 애지중지하였으니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긴 모양이다. 이에 대해 박준원은 잔잔한 어투로 조부와 부친과의 추억을 말하면서 어버이의 정이 깃든 물건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하였다. 부친이 손수 화로에 밤을 구워 조부께 바치거나, 조부가 병환이 났을 때 부친이 하인을 데리고 밤새 약을 달인 일화를 말하여, 질화로가 효의 상징임을 증명하였다.

조선시대 선비는 이처럼 부모가 물려준 기물을 효의 상징으로 받들었다. 이 집에는 창강경(滄江鏡)이라는 거울도 하나 있었다. 창강(滄江) 조속(趙涑)이 사용하던 거울인데, 창강은 이를 대대로 딸에게 전하게 하였다. 박윤원의 조모가 그 집안의 딸이었기에 이 거울을 물려받게 되었는데 나중에 이를 아들 박사석에서 주었다. 박사석은 어머니가 물려받은 이 거울을 애지중지하였다. 그러나 워낙 오래된 것이라 자루가 부러졌기에 나무로 갑을 만들어 칠을 한 후 보관하였고, 나중에 이를 장남 박윤원에게 물려주었다. 박윤원은 이를 역시 애지중지하고는 그 사연은 명(銘)으로 지은 바 있다. 어버이가 물려준 것은 물질적인 재산이 아니라 효였던 것이다.

  1. 고래의 입 근처에 나 있는 수염은 부드러우면서도 강하여 여러 가지 물건을 만들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2. 범중엄(范仲淹)은 검은 휘장을 사용하였는데, 며느리가 시집오면서 비단 휘장을 가져오자 이를 꾸짖고 불태웠다는 고사가 있다. 진(晉) 한백(韓伯)의 모친은 늘 오래된 궤안에 기대었는데 궤안이 낡아 외손자가 바꾸려 할 때 이를 말렸다는 고사가 있다. 진(晉) 왕헌지(王獻之)는 도둑이 들자 푸른 담요(靑氈)는 대대로 전해온 물건이므로 그것만 빼고 가라고 한 고사가 있다. [본문으로]
  3. 산예로는 도자기로 만든 사자 모양의 향로. 박산로는 박산이라는 바다 속의 산 형상을 본떠서 만든 연꽃 모양의 향로.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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