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버리고 또 버렸던' 법정스님의 생애
11일 입적한 법정(法頂)스님은 탁월한 문장력을 바탕으로 한 산문집을 통해 일반 국민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은 '스타' 스님이다. 불자나 스님들 사이에서도 1993년 열반한 성철 스님에 이어 인지도가 높은 스님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평생 불교의 가르침을 지키는 출가수행자로서의 본분을 잃지 않았고, 산문집의 제목처럼 '무소유'와 '버리고 떠나기'를 끊임없이 보여줬다. 스님은 자신이 창건한 길상사의 회주를 한동안 맡았을 뿐, 그 흔한 사찰 주지 한 번 지내지 않았다.
법정스님은 1990년대 초반 "나는 아마 전생에도 출가수행자였을 것이다.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직관적인 인식만이 아니라 금생에 내가 익히면서 받아들이는 일들로 미루어 능히 짐작할 수 있다"고 한 적이 있다.
1932년 10월8일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목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법정 스님은 한 핏줄끼리 총부리를 겨눈 한국전쟁을 경험하면서 인간 존재에 대한 물음 앞에서 고민한다. 그는 대학 재학중이던 1955년 마침내 입산 출가를 결심하고 싸락눈이 내리던 어느날 집을 나선다.
고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오대산으로 가기 위해 밤차로 서울에 내린 스님은 눈이 많이 내려 길이 막히자 서울의 안국동 선학원에서 당대의 선승 효봉스님(1888-1966, 1962년 조계종 통합종단이 출범한 후 초대 종정)을 만나 대화한 후 그 자리에서 머리를 깎는다.
"삭발하고 먹물옷으로 갈아입고 나니 훨훨 날아갈 것 같았다. 어찌나 기분이 좋던지 나는 그길로 밖에 나가 종로통을 한바퀴 돌았었다"
다음날 통영 미래사로 내려가 부목(負木.땔감을 담당하는 나무꾼)부터 시작해 행자 생활을 했다. 당시 환속하기 전의 고은 시인, 박완일 법사(전 조계종 전국신도회장) 등이 함께 공부했다.
법정스님은 이듬해 사미계를 받은 후 지리산 쌍계사에서 정진했다. 28세 되던 1959년 3월 양산 통도사에서 자운 율사를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고, 1959년 4월 해인사 전문강원에서 명봉스님을 강주로 대교과를 졸업했다.
1960년 봄부터 이듬해 여름까지 통도사에서 운허 스님과 함께 '불교사전' 편찬에 참여하다 4.19와 5.16을 겪은 스님은 1960년대 말 서울 봉은사 다래헌에서 운허 스님 등과 함께 동국역경원의 불교 경전 번역 작업에 참여했다.
이 시절 함석헌, 장준하, 김동길 등과 함께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결성과 유신 철폐운동에 참여했던 법정스님은 1975년 인혁당 사건으로 충격을 받은 후 반체제운동의 의미와 출가수행자로서의 자세를 고민하다 다시 걸망을 짊어진다.
출가 본사 송광사로 내려온 법정스님은 1975년 10월부터 송광사 뒷산에 불일암을 짓고 홀로 살기 시작했다. 1976년 산문집 '무소유'를 낸 후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지자 불일암 생활 17년째 되던 1992년 다시 출가하는 마음으로 불일암을 떠나 강원도 화전민이 살던 산골 오두막에서 지금까지 혼자 지내왔다.
스님은 건강이 나빠지면서 지난해 겨울은 제주도에서 보냈다가 건강상태가 악화하면서 삼성서울병원에 입원했지만, 의식을 또렷하게 유지하면서 "강원도 오두막에 가고 싶다"고 거듭 말했다는 것이 주변의 전언이다.
법정스님은 평소에는 강원도 산골에서 지냈지만 대중과의 소통도 계속했다. 특히 1996년 고급요정이던 성북동의 대원각을 시인 백석의 연인으로 유명했던 김영한 할머니(1999년 별세)로부터 아무 조건없이 기부받아 이듬해 12월 길상사로 탈바꿈시켜 창건한 후 회주로 주석하면서 1년에 여러차례 정기 법문을 들려줬다.
법정스님은 2003년 12월에는 길상사 회주 자리도 내놓았다. 하지만 정기법문은 계속하면서 시대의 잘못은 날카롭게 꾸짖고, 세상살이의 번뇌를 호소하는 대중들을 위로했다.
산문인으로서 법정스님은 뛰어난 필력을 바탕으로 우리 출판계 역사에도 기록될 베스트셀러를 숱하게 남겼다.
스님은 해인사에 살 당시 팔만대장경이 있는 장경각을 가리켜 "빨래판같이 생긴 것이요?"라고 묻던 아주머니의 말을 듣고 아무리 뛰어난 지혜와 자비의 가르침이라도 알아볼 수 없는 글자로 남아있는 한 한낱 빨래판에 지나지 않으며, 부처의 가르침을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쉬운 말과 글로 옮겨 전할 방법을 고민했다.
또 "종교의 본질이 무엇인지 망각한 채 전통과 타성에 젖어 지극히 관념적이고 형식적이며 맹목적인 수도생활에 선뜻 용해되고 싶지 않았다"고 회고한 적도 있다.
스님의 이런 원력은 스님의 이름과 동의어처럼 불리는 산문집 '무소유'의 모습으로 꽃을 피운다. '무소유'는 1976년 4월 출간된 후 지금까지 34년간 약 180쇄를 찍은 우리 시대의 대표적 베스트셀러다.
법정스님은 다른 종교와도 벽을 허물었던 것으로도 큰 발자취를 남겼다. 법정스님은 길상사 마당의 관음보살상을 독실한 천주교신자 조각가인 최종태 전 서울대교수에게 맡겨 화제를 모았고, 1997년 12월 길상사 개원법회에는 김수환 추기경이 방문했다. 법정스님은 이에 대한 화답으로 이듬해 명동성당에서 특별 강론을 하기도 했다.
법정스님은 이밖에 조계종단과 사회를 위한 활동도 활발히 했다. 법정스님은 대한불교 조계종 기관지인 불교신문 편집국장, 송광사 수련원장, 보조사상연구원장 등을 지냈고 1994년부터는 환경보호와 생명사랑을 실천하는 시민운동단체인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를 만들어 이끌어왔다.
"우리는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마음을 쓰게 된다. 따라서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이는 것,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얽혀있다는 뜻이다"('무소유' 중에서)
법정스님하면 떠오르는 단어 '무소유'. 법정스님이 1970년대 초반부터 쓴 글을 모아 1976년 펴낸 대표적인 산문집 '무소유(범우사)'를 비롯해 수십권의 책에서 한결같이 설파한 무소유의 정신은 무한경쟁과 탐욕의 시대에 우리가 지녀야 할 마음의 등불이다.
법정스님의 여러 산문집은 스님 특유의 담백하면서도 격조 있는 필치로 고된 일상에 지친 일반인을 위로했고, 불교의 가르침을 널리 알리는데도 크게 기여했다.
스님이 말한 '무소유'는 불교의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즉 이 세상에 태어날 때 가지고 온 것도 없고 세상을 하직할 때 가져가는 것도 없다는 가르침에서 비롯됐다.
이런 청백가풍(淸白家風)의 무소유의 정신을 일상에서 실천하라고 권한 스님의 글은 종교를 불문하고 많은 사람에게 호응을 얻었다.
산문집 '무소유'에 수록된 1971년의 글 '무소유'에는 법정스님이 평생 수십권의 책을 통해 반복해 강조했던 무소유의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당시 3년 째 난초 화분 둘을 애지중지 길렀다는 스님은 장마 후 쏟아지는 햇볕 아래 화분을 놓고 왔다는 생각에 허둥지둥 거처로 돌아간 일화를 소개하며 자신의 집착을 뉘우친다.
"나는 하루 한 가지씩 버려야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다. 난을 통해 무소유(無所有)의 의미 같은 걸 터득하게 됐다고나 할까. 인간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소유사(所有史)처럼 느껴진다. 보다 많은 자기네 몫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고 있다. 소유욕에는 한정도 없고 휴일도 없다. 그저 하나라도 더 많이 갖고자 하는 일념으로 출렁거리고 있다. 물건만으로는 성에 차질 않아 사람까지 소유하려 든다. 그 사람이 제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는 끔찍한 비극도 불사하면서. 제정신도 갖지 못한 처지에 남을 가지려 하는 것이다"
스님은 "나는 가난한 탁발승이오. 내가 가진 거라고는 물레와 교도소에서 쓰던 밥그릇과 염소젖 한 깡통, 허름한 담요 여섯 장, 수건 그리고 대단치도 않은 평판, 이것뿐이요"라고 했던 마하트마 간디의 어록에서 크게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쓴다.
1992년 모든 것을 버리고 다시 한번 출가하는 마음으로 강원도 화전민이 버리고 떠난 산골 오두막으로 들어간 스님은 1995년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에 이어 새천년을 앞둔 1999년 12월에 수상집 '오두막 편지'를 내놓는다.
'오두막 편지'에서 스님은 "현재 내가 몸담아 사는 산중 오두막은 여러가지로 불편한 환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곳에서 단순하고 간소하게 내 식대로 살 수 있기 때문에 일곱 해째 기대고 있다. 어디를 가보아도 내 그릇과 분수로는 넘치는 것을 감당할 수 없어, 나는 이 오두막을 거처로 삼고 있다"고 썼다.
또 "'소욕지족(少慾知足)', 작은 것과 적은 것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작은 것과 적은 것 속에 삶의 향기인 아름다움과 고마움이 깃들어 있다"고 가르치기도 했다.
스님은 강원도 산골 생활 17년째가 되던 2008년 11월에는 길상사 소식지 '맑고 향기롭게'에 기고했던 수필을 모아 '아름다운 마무리'를 펴내 삶의 마지막에 선 노승의 마음을 담담하게 털어놓는다. 스님은 2007년 한차례 병으로 입원하면서 이미 많이 쇠약해진 상태였다.
"길상사를 드나들면서 나는 너무나 많은 것을 얻어간다. 그때마다 마음이 개운치 않고 아주 무겁다. 말로는 무소유를 떠벌리면서 얻어 가는 것이 너무 많아 부끄럽고 아주 부담스러웠다. 늙은 중이 욕심 사납게 주는대로 꾸역꾸역 가지고 가는 꼴을 이만치서 바라보고 있으면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
그러면서 스님은 "놓아두고 가기! 때가 되면, 삶의 종점인 섣달 그믐날이 되면, 누구나 자신이 지녔던 것을 모두 놓아두고 가게 마련이다. 우리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나그네이기 때문이다. 미리부터 이런 연습을 해두면 떠나는 길이 훨씬 홀가분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스님이 말하는 '아름다운 마무리' 는 역시 "스스로 가난과 간소함을 선택해 소유의 비좁은 감옥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언제든 떠날 채비를 갖춘다. 그 어디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순례자나 여행자의 모습으로 산다. 우리 앞에 놓은 이 많은 우주의 선물도 그저 감사히 받아 쓸 뿐, 언제든 빈손으로 두고 떠날 수 있도록 준비한다…아름다운 마무리는 낡은 생각, 낡은 습관을 미련없이 떨쳐 버리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마무리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법정스님의 첫 법문집인 '일기일회(一期一會, 2009년 6월 출간)'에도 무소유의 마음이 잘 나타나있다. 스님은 2008년 5월24일 여름안거 결제를 맞아 했던 법문에서도 '버리고 떠나기'를 강조했다.
"모든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것도 소유하지 않아야한다. 모든 것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것도 되지 않아야한다. 모든 것을 가지려면 어떤 것도 필요로 함 없이 그것을 가져야한다. 버렸더라도 버렸다는 관념에서조차 벗어나라. 선한 일을 했다고 해서 그 일에 묶여 있지 말라. 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치고 지나가듯 그렇게 지나가라"
한때 밀실 정치의 현장이었던 요정 대원각이 법정스님에 의해 길상사로 변신하게 된 데는 법정스님의 대표 산문집 '무소유'가 다리 역할을 했다.
대원각 소유주였던 김영한(1916-1999)씨는 16살 때 조선권번에서 궁중아악과 가무를 가르친 금하 하규일의 문하에 들어가 진향이라는 이름의 기생이 됐다. 월북시인 백석(1912-1995)과 사랑에 빠져 백석으로부터 자야(子夜)라는 아명으로 불린 그는 한국전쟁 이후인 1953년 중앙대 영문과를 졸업해 '백석, 내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내 사랑 백석' 등의 책을 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가 지금의 길상사 자리를 사들여 운영하던 청암장이라는 한식당은 제3공화국 시절 대형 요정 대원각이 됐다.
김영한씨와 법정스님의 인연은 198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큰 감명을 받은 김씨는 1987년 미국에 체류할 당시 설법 차 로스앤젤레스에 들른 법정스님을 만나 대원각 7천여평(당시 시가 1천억원)을 시주하겠으니 절로 만들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법정스님은 줄곧 시주를 받을 수 없다고 사양하다가 1995년 마침내 청을 받아들여 법정스님의 출가본사인 송광사 말사로 조계종에 '대법사'를 등록한다. 이후 1997년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로 이름을 바꿔 12월14일 창건법회를 갖는다.
길상사 창건법회 날 김영한씨는 법정스님으로부터 염주 하나와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을 받았다. 당시 그는 수천 대중 앞에서 "저는 죄 많은 여자입니다. 저는 불교를 잘 모릅니다만… 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는 곳이었습니다. 저의 소원은 저곳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김씨는 1999년 11월14일 세상을 떠나기 하루 전날 목욕재계 후 절에 와서 참배하고 길상헌에서 마지막 밤을 보냈고, 유골은 49재 후 유언대로 길상헌 뒤쪽 언덕에 뿌려졌다.
길상사는 유골이 뿌려진 자리에 조그만 돌로 소박한 공덕비를 세우고 매년 음력 10월7일 기재를 지낸다. 길상사의 시민모임 '맑고 향기롭게'는 '맑고 향기롭게 길상화 장학금'을 만들어 매년 고교생들에게 학비를 지원하고 있다.
길상사는 현재 프랑스 파리에 분원을 두고 있고, 헝가리 원광사, 인도 천축선원, 호주 정혜사를 자매도량으로 삼고 있다.
법정스님은 길상사 창건 후 회주(법회를 이끄는 어른스님)를 맡아 정기법회에서 법문을 들려줬으나, 2003년 12월 회주 자리도 내놓았다. 하지만 법정스님은 그후에도 길상사에서 열리는 대중법회에 참석해 법문을 해왔고, 이번 생의 마지막 시간도 길상사에서 보냈다.
출처 : 연합뉴스 2010.03.11
법정스님의 유언장 전문
◇남기는 말
1. 모든 분들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어리석은 탓으로 제가 저지른 허물은 앞으로도 계속 참회하겠습니다.
2. 내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있다면 모두 ‘사단법인 맑고향기롭게’에 주어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토록 하여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으려 하니, 부디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주십시오.
3. 감사합니다.
모두 성불하십시오.
2010년 2월 24일 법정 속명 박재철
◇상좌들 보아라
1. 인연이 있어 신뢰와 믿음으로 만나게 된 것을 감사한다. 괴팍한 나의 성품으로 남긴 상처들은 마지막 여행길에 모두 거두어가려 하니 무심한 강물에 흘려보내주면 고맙겠다. 모두들 스스로 깨닫도록 열과 성을 다해서 거들지 못하고 떠나게 되어 미안한 마음 그지없다. 내가 떠나더라도 마음 속에 있는 스승을 따라 청정수행에 매진하여 자신 안에 있는 불성을 드러내기 바란다.
2. 덕조는 맏상좌로서 다른 생각하지 말고 결제 중에는 제방선원에서 해제 중에는 불일암에서 10년간 오로지 수행에만 매진한 후 사제들로부터 맏사형으로 존중을 받으면서 사제들을 잘 이끌어주기 바란다.
3. 덕인, 덕문, 덕현, 덕운, 덕진과 덕일은 덕조가 맏사형으로서 존중을 받을 수 있도록 수행을 마칠 때까지는 물론, 그 후에도 신의와 예의로 서로 존중하고 합심하여 맑고 향기로운 도량을 이루고 수행하기 바란다.
4. 덕진은 머리맡에 남아있는 책을 나에게 신문을 배달한 사람에게 전하여 주면 고맙겠다.
5. 내가 떠나는 경우 내 이름으로 번거롭고 부질없는 검은 의식을 행하지 말고, 사리를 찾으려고 하지도 말며, 관과 수의를 마련하지 말고, 편리하고 이웃에 방해되지 않는 곳에서 지체없이 평소의 승복을 입은 상태로 다비하여 주기 바란다.
2010년 2월 24일 법정 박재철
'습득 코너'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포르노와 연애소설 (0) | 2010.03.16 |
---|---|
법정 스님 추도사 (0) | 2010.03.11 |
말년에 여복 누리려면… (0) | 2010.03.10 |
필살기를 하나 가져라 (0) | 2010.03.09 |
[수암칼럼] 대통령의 충고 (0) | 2010.03.08 |
- Total
- Today
-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