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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인 수녀] 법정 스님께
언제 한번 스님을 꼭 뵈어야겠다고 벼르는 사이 저도 많이 아프게 되었고 스님도 많이 편찮으시다더니 기어이 이렇게 먼저 먼 길을 떠나셨네요.
2월 중순, 스님의 조카스님으로부터 스님께서 많이 야위셨다는 말씀을 듣고 제 슬픔은 한층 더 깊고 무거워졌더랬습니다. 평소에 스님을 직접 뵙진 못해도 스님의 청정한 글들을 통해 우리는 얼마나 큰 기쁨을 누렸는지요!
우리나라 온 국민이 다 스님의 글로 위로 받고 평화를 누리며 행복해했습니다. 웬만한 집에는 다 스님의 책이 꽂혀 있고 개인적 친분이 있는 분들은 스님의 글씨를 표구하여 걸어놓곤 했습니다.
이제 다시는 스님의 그 모습을 뵐 수 없음을, 새로운 글을 만날 수 없음을 슬퍼합니다.
'야단맞고 싶으면 언제라도 나에게 오라'고 하시던 스님. 스님의 표현대로 '현품대조'한 지 꽤나 오래되었다고 하시던 스님. 때로는 다정한 삼촌처럼, 때로는 엄격한 오라버님처럼 늘 제 곁에 가까이 계셨던 스님. 감정을 절제해야 하는 수행자라지만 이별의 인간적인 슬픔은 감당이 잘 안 되네요. 어떤 말로도 마음의 빛깔을 표현하기 힘드네요.
사실 그동안 여러 가지로 조심스러워 편지도 안 하고 뵐 수 있는 기회도 일부러 피하면서 살았던 저입니다. 아주 오래전 고 정채봉 님과의 TV 대담에서 스님은 '어느 산길에서 만난 한 수녀님'이 잠시 마음을 흔들던 젊은 시절이 있었다는 고백을 하신 일이 있었지요. 전 그 시절 스님을 알지도 못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수녀님 아니냐며 항의 아닌 항의를 하는 불자들도 있었고 암튼 저로서는 억울한 오해를 더러 받았답니다.
1977년 여름 스님께서 제게 보내주신 구름모음 그림책도 다시 들여다봅니다. 오래전 스님과 함께 광안리 바닷가에서 조가비를 줍던 기억도, 단감 20개를 사 들고 저의 언니 수녀님이 계신 가르멜수녀원을 방문했던 기억도 새롭습니다.
어린왕자의 촌수로 따지면 우리는 친구입니다. '민들레의 영토'를 읽으신 스님의 편지를 받은 그 이후 우리는 나이 차를 뛰어넘어 그저 물처럼 구름처럼 바람처럼 담백하고도 아름답고 정겨운 도반이었습니다. 주로 자연과 음악과 좋은 책에 대한 의견을 많이 나누는 벗이었습니다.
'…구름 수녀님 올해는 스님들이 많이 떠나는데 언젠가 내 차례도 올 것입니다. 죽음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생명현상이기 때문에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날그날 헛되이 살지 않으면 좋은 삶이 될 것입니다…한밤중에 일어나(기침이 아니면 누가 이런 시각에 나를 깨워주겠어요) 벽에 기대어 얼음 풀린 개울물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이 자리가 곧 정토요 별천지임을 그때마다 고맙게 누립니다…'
2003년에 제게 주신 글을 다시 읽어봅니다. 어쩌다 산으로 새 우표를 보내 드리면 마음이 푸른 하늘처럼 부풀어 오른다며 즐거워하셨지요. 바다가 그립다고 하셨지요. 수녀의 조촐한 정성을 늘 받기만 하는 것 같아 미안하다고도 하셨습니다. 누군가 중간 역할을 잘못한 일로 제게 편지로 크게 역정을 내시어 저도 항의편지를 보냈더니 미안하다 하시며 그런 일을 통해 우리의 우정이 더 튼튼해지길 바란다고, 가까이 있으면 가볍게 안아주며 상처 받은 맘을 토닥이고 싶다고, 언제 같이 달맞이꽃 피는 모습을 보게 불일암에서 꼭 만나자고 하셨습니다.
이젠 어디로 갈까요, 스님. 스님을 못 잊고 그리워하는 이들의 가슴속에 자비의 하얀 연꽃으로 피어나십시오. 부처님의 미소를 닮은 둥근달로 떠오르십시오.
[소설가 정찬주] 수행자가 가야 하는 길 보여주신 스님,
열반으로 가시는 발걸음 가벼우소서
눈앞이 막막합니다. 무엇이 바빠 스님께서 좋아하시는 연둣빛 봄날을 마다하시고 가십니까. 영혼의 모음 같다던 뻐꾸기 소리를 더 듣지 않으시고 가십니까. 스님의 속가 외사촌 조카인 현장 스님께서 전화를 주셨습니다. 스님을 길상사로 모시고 있으니 상경한다고 말씀했습니다. 현장 스님도 목이 메고 저도 목이 멨습니다. 잠시 후 스님은 이승의 옷을 벗고 내생의 새 옷을 입으셨습니다.
스님.
찻물 올리고 향을 사르며 스님의 명복을 빕니다. 죽음은 생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생의 시작이라는 스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스님께서는 ‘온 몸으로 살고, 온 몸으로 죽어라’는 어느 중국 선사의 말씀을 참 좋아하셨습니다. 스님의 일생이 그러합니다.
스님은 초등학교 때 등대지기가 되겠다는 꿈도 꾸어 보고, 청년기에는 인간 실존에 대해서 괴로워합니다. 동족끼리 피 흘린 6ㆍ25전쟁은 스님을 더욱 고통스럽게 합니다. 세속은 스님이 살아야 하는 번지수가 아니었습니다. 스님은 출가하여 효봉 선사의 제자가 됩니다. 해인사 선방 시절에는 한 아주머니가 장경각의 고려대장경판을 ‘빨래판 같은 것’이라고 말하여 스님은 한글 역경의 중요성을 절감합니다. 이후 강원을 마치고 운허 스님을 도와 ‘불교사전’을 편찬합니다. 그 인연으로 서울에 올라와 봉은사 다래헌에서 사십니다. 현대문학에 ‘무소유’를 발표하시어 문명을 떨치시기도 하고, 장준하 함석헌 선생 등과 반독재투쟁에도 간여합니다. 그런데 인혁당 사건은 스님을 몇 달 동안 잠 못 이루게 합니다. 한 무리의 젊은이가 죄없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만행을 보면서 증오심과 적개심을 품습니다. 그러면서도 수행자로서 깊이 자책합니다. 어떤 운동도 인격 형성의 길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무의미하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스님은 송광사로 내려가 불일암을 짓고 텅 빈 충만의 시절을 보냅니다. 그러나 불일암마저 번다해지자 강원도 산중 오두막으로 가 정진하시는 한편, ‘맑고 향기롭게 근본 도량’인 길상사를 창건하시어 가난하고 힘든 이들의 의지처가 되게 하였습니다.
스님.
저는 스님의 내면을 조금 보았습니다. 스님께서는 영화 ‘서편제’ 조조 프로를 보시면서 맑은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스님께서는 소년기부터 감내할 수 없을 정도의 고독을 견디신 분입니다. 그러나 그 고독을 거름 삼아 깨달음의 꽃을 피우신 분입니다. 중학교 때 납부금을 내지 못하여 울면서 배를 타고 목포로 갔던 스님. 진도 쌍계사로 수학여행을 가서 절을 떠나기가 아쉬워 울었던 스님. 효봉 스님을 시봉할 때 고방 호롱불로 ‘주홍글씨’를 읽다가 야단 맞고 유난히 좋아했던 책을 아궁이에 태워버렸던 스님.
사람들은 더러 스님을 수필 쓰는 문인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스님에게 글은 세상과 소통하는 수단일 뿐이라고 여깁니다. 세상 사람들은 스님께서 하루에 한두 시간 글 쓰고 나머지 모든 시간을 수행자로서 정진한다는 것을 모릅니다. 관념적이고 맹목적인 선(禪)을 거부하시고 선방 울타리를 벗어나 ‘내 손발이 상좌’라며 홀로 수행하신다는 것을 모릅니다. 저는 스님이야말로 한국의 수행자가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를 말없이 보여준 분이라고 믿습니다. 스님께서 보여주신 맑은 모습 속에 한국불교가 다시 태어나는 길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스님.
저는 스님의 부끄러운 제자입니다. 다만, 스님께서 원하시는 제자의 모습을 보여 스님의 가시는 발걸음이 가볍도록 발원하겠습니다. 그것이 스님을 떠나보내는 제자들의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스님께서 40대에 미리 써놓았던 유서 한 대목을 읽으며 기도하겠습니다. 스님께서는 내생에도 다시 한반도에 태어나 모국어를 더 사랑하고 출가 사문이 되어 못 다한 일들을 하고 싶다고 하십니다. 스님! 가시는 발걸음 부디 가벼우소서. 화엄경의 선재 동자도 만나시고, 어린왕자가 사는 별나라에 가시어 원(願)을 이루소서. 한반도에 다시 오시어 못 다한 일들 이루소서.
정찬주 합장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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