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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지진의 발생과 대응
2011년 3월 11일 일본을 강타한 진도 9의 강진과 쓰나미는 일본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과학과 문명이 최첨단으로 발전한 21세기에도 거대한 자연 재해 앞에서 인간의 대응은 무기력하게 느껴진다. 다행히 한반도 지역은 지진의 피해에서 조금은 벗어나 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안전지대만은 아니었다. 이것은 역사 기록에서도 증명되고 있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역사서인 『삼국사기』는 물론이고, 『조선왕조실록』에 1,900여 건이나 등장하는 지진 관련 기록은 한반도 역시 지진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곳임을 입증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중종대인 16세기 초반 큰 지진이 일어났다. 조광조가 신진 사림파의 핵심으로 등장하여 개혁정치가 적극 추진되던 1518년(중종 13) 5월 15일의 일이었다. 실록에서는 당시 지진 발생이 매우 심각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유시(酉時:오후 6시경)에 세 차례 크게 지진이 있었다. 그 소리가 마치 성난 우레 소리처럼 커서 인마(人馬)가 모두 피하고, 담장과 집들이 무너지고, 성첩(城堞)이 떨어져서, 도성 안 사람들이 모두 놀라 당황하여 안색을 잃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밤새도록 노숙하며 제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니, 고로(故老)들이 모두 옛날에는 없던 일이라 하였다. 팔도가 다 마찬가지였다.[酉時 地大震凡三度 其聲殷殷如怒雷 人馬辟易 墻屋壓頹 城堞墜落 都中之人 皆驚惶失色 罔知攸爲 終夜露宿 不敢入處其家 故老皆以爲古所無也 八道皆同]」
조정에서는 급히 대책회의가 열렸다. 중종은 즉각 대신들을 소집하였다. 예조판서 남곤 등이 입시하자 중종은 지진 발생의 원인을 대신들에게 물었다. 당시 중종과 신하들이 주고받은 대화들을 보자.
「상이 이르기를, “요즈음 한재가 심한데 이제 또 지진이 있으니 매우 놀라운 일이다. 재앙은 헛되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요 반드시 연유가 있는 것인데, 내가 어둡고 미련해서 그 연유를 알지 못하겠노라.”하니, 남곤이 아뢰기를, “신이 처음 들을 때에 심신이 놀랐다가 한참 만에 가라앉았으니, 상의 뜻에 놀랍고 두려우실 것은 더구나 말할 것이 없습니다. 요즈음 경상·충청 두 도(道)의 서장(書狀)을 보니 모두 지진이 있었다고 보고하였는데, 서울의 지진이 이렇게 심한 것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옛날 사서(史書)를 보면 한(漢)나라 때 농서(隴西)에 지진이 일어나 1만여 인이 깔려 죽은 일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늘 큰 변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번 지진도 가옥을 무너뜨린 일이 있지 않습니까? 땅은 고요한 물건인데, 그 고요함을 지키지 못하고 진동하니 이보다 큰 변괴가 없습니다. 상께서 즉위하신 뒤로 사냥이나 토목 공사나 성색(聲色)에 빠진 일이 없고, 아랫사람이 또한 성의(聖意)를 받들고 모두 국사에 마음과 힘을 다하여 ‘태평 시대’라고는 할 수 없어도 ‘소강(小康)’이라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재변이 하루하루 더 심각하니, 신은 고금과 학문에 널리 통하지 못하여 재변이 일어나는 원인을 알 수 없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늘의 변괴는 더욱 놀랍고 두렵다. 항상 사람을 쓰는 데 잘못이 있을까 두려워하고 있는데, 친정(親政)이 겨우 끝나자 곧 큰 변이 일어났고 또 오늘의 친정은 보통 때의 친정과는 다른데도 재변이 이와 같으니 이 때문에 더욱 두려운 것이다.”라 하였다. [上曰 近者旱災已甚 今又地震, 甚可驚焉 災不虛生 必有所召. 予之暗昧 罔知厥由 南袞曰 “臣初聞之 心神飛越 久之乃定 況上意驚懼 固不可言 近見慶尙忠淸二道書狀 皆報以地震 不意京師地震 若此之甚. 竊觀古史 漢時隴西地震 萬餘人壓死 常以爲大變. 今日之地震 無奈亦有傾毁家舍乎? 夫地 靜物 不能守靜而震動 爲變莫大焉. 自上卽位之後 無遊佃土木聲色之失 在下之承奉聖意 亦皆盡心國事 雖不可謂太平 亦可謂少康 而災變之來 日深一日 臣非博通 未知致災之根本也 上曰 今日之變 尤爲惕懼 常恐用人失當 而親政纔畢 仍致大變 且今日之親政 又非如尋常之親政 而致變如此 尤爲惕懼者此也]」
▲조선왕조실록_중종 13년 5월 15일 기사_부분
위의 기록에서 중국 역대의 대지진을 언급한 것과, 지진 발생 원인을 정치에서 찾으려 한 점이 주목된다. 남곤의 보고에 대해 중종이 “오늘의 변괴는 더욱 놀랍고 두렵다. 항상 사람을 쓰는 데 잘못이 있을까 두려워하고 있는데, 친정(親政)이 겨우 끝나자 곧 큰 변이 일어났고 또 오늘의 친정은 보통 때의 친정과는 다른데도 재변이 이와 같으니 이 때문에 더욱 두려운 것이다.”라고 한 부분이 대표적이다. 훗날 임진왜란 중인 1594년 서울에 지진이 일어나자 당시 임금인 선조도 왕세자인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줄 뜻을 비친 적이 있었다. 선조 또한 지진의 원인을 자신의 부덕의 소치라고 생각하고 하늘의 꾸짖음으로 받아들이려 했던 것이다. 지진을 과학적인 기준보다 도덕적인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이 조선시대의 지진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중종대 당시 발생한 지진의 규모가 매우 컸음은 중종과 신하들이 회의하는 전각 곳곳의 건물이 흔들렸다는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가 있다.
「얼마 있다가 또 처음과 같이 지진이 크게 일어나 전우(殿宇)가 흔들렸다. 상이 앉아 있는 용상은 마치 사람의 손으로 밀고 당기는 것처럼 흔들렸다. 첫 번부터 이때까지 무릇 세 차례 지진이 있었는데 그 여세가 그대로 남아 있다가 한참만에야 가라앉았다. 이때 부름을 받은 대신들은 집이 먼 사람도 있고 가까운 사람도 있어서, 도착하는 시각이 각각 선후(先後)가 있었으나 오는 대로 곧 입시하였다. 영의정 정광필이 아뢰기를, “지진은 전에도 있었지마는 오늘처럼 심한 적은 없었습니다. 이것은 신 등이 재직하여 해야 할 일을 모르기 때문에 이와 같은 것입니다.”[未幾 地又大震如初 殿宇掀振 上之所御龍床 如人以手 或引或推而掀撼 自初至此 凡三震 而其餘氣未絶 俄而復定 時承召大臣等 以家遠近 來有先後 而來卽入侍 領議政鄭光弼曰 地震前亦有之 然未有如今日之甚者 此臣輩在職 未知所爲而若是也]」
실록뿐만 아니라 조광조의 문집인 『정압집』에도 ‘(1513년) 5월 16일에 상이 친히 정사를 보는데 지진이 세 번 일어났다. 전각 지붕이 요동을 쳤다.’고 하여 이날의 지진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조광조라는 개인의 문집에 지진 상황이 기록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당시의 지진이 사회적으로 심각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1392년(태조 1)부터 1863년(철종15)까지 472년간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지진 건수는 무려 1,900여 건에 이른다. 대략 1년에 4회 꼴로 삼국시대나 고려시대보다는 지진의 빈도가 훨씬 높다. 이것은 조선시대에 지진 발생이 비약적으로 증가했다기보다는 지진에 대한 관측이 정밀해지고 보고 체계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중앙에 천문 현상과 지변을 관측하는 관상감이라는 관청을 두었고, 관상감에는 천재지변에 관한 사항을 정리하여 『관상감일기』를 남겼다. 실록을 편찬할 때는 사관들이 쓴 사초(史草)와 함께 각 관청의 업무 일지인 시정기를 참고하였는데, 시정기인 『관상감일기』에 기록된 지진 관련 내용이 실록에 포함되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지진은 일본의 사례에서도 보듯이 원자력 발전소의 파괴와 이에 따르는 인명 피해를 수반하는 경우도 많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지진 관련 기록을 잘 활용하여, 향후 원자력 발전소 설치 장소 선정 등에도 참고해야 할 것이다.
글쓴이 : 신병주(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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