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뙤창 / 주인석
2009년 상반기 <수필세계> 신인상
오늘은 눈이 황소만 한 사람을 봤다. 어제는 어떤 남자가 주먹코를 들이대는 바람에 동굴 같은 구멍 속 코털까지 보고 말았다. 계속 이러다가 내일은 하마 같은 입을 만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십 년째 쓰던 홈오토메이션이 한 번씩 말썽을 부리더니 며칠 전부터 아예 먹통이다. 밖에서 누군가 현관문을 두들기면 아이들이 뛰어나가 바로 문을 열어 버리는 바람에 잡상인이 들어와 애를 먹은 적도 있다. 함부로 문을 열어 줬다가 나쁜 사람이면 어쩔 거냐고 문을 열기 전에 반드시 누군지 확인하라고 아이들에게 이르고 나니 씁쓸한 마음이 든다.
현관문에 달린 도어 뷰(DOOR VIEW)로 밖을 내다보니 왜곡된 모습이 눈에 보여 마음이 그다지 좋지가 않다. 온화하게 생긴 남편도 심술궂게 보이는가 하면 미남 아들도 비율이 안 맞는 추남으로 보이고, 예쁜 딸도 너무 못생긴 모습으로 비친다.
문을 열고 보면 정상인데 구멍으로 보이는 모습은 의심하는 마음처럼 휘어져 보이거나 한 부분이 확대되어 다가온다. 유리가 꾀를 쓰는 것 같아 얄밉상스럽다. 시대를 반영이라도 하듯 물건까지 영악한가 싶은 생각이 들자 민민한 마음이 앞선다.
홀연 기억 속에 감추어진 뙤창이 떠오른다. 지금은 박물관에나 가야 볼 수 있겠지만 친정의 허리 굽은 사랑채 세살문에 손때 묻은 안경으로 남아 있다. 그 작은 창으로 커다란 세상을 배웠던 유년이 그리워진다.
시골에서 사립문의 역할이야 그저 마당과 길의 경계일 뿐 누구나 열고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 은밀히 말하면 세살문이 안팎을 나눈다. 세살문은 문틀에 가로와 세로로 살을 대어 창호지를 바르는데, 세로 살은 같은 간격으로 심고 가로 살은 상중하로 나뉜다. 가로와 세로로 만난 문살은 정확히 정사각형이다. 세살문 중간 부분에 만들어진 정사각형 네 칸은 창호지를 뜯어내고 유리를 붙이는데, 이것이 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뙤창이다.
세살문의 뙤창 속에는 사계절이 산다. 손바닥만 한 유리지만 그 품이 얼마나 큰지 사시사철을 담아 그린다.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봄 뜰의 개나리와 골목길을 수놓는 뽀얀 벚꽃, 앞산의 분홍 진달래가 발그레 번지면 뙤창은 수채화가 된다. 파스텔 색에 눈이 호사를 누릴 즈음 뙤창은 뜨거운 햇볕 아래 초록으로 덧칠된 감나무를 한 폭 유화로 그려낸다. 탈곡기 돌아가는 소리, 콩 튀는 소리에 누웠던 빗자루도 엉덩이를 들썩거리면 뙤창은 콜라주로 매달렸던 가을을 똑똑 따낸다. 마른 가지, 텅 빈 겨울 마당의 여백을 수묵화로 그리는 뙤창은 계절의 캔버스고 화선지다.
홈오토메이션이 없었던 그 시절에 뙤창 밖을 내다보고 누가 오는지 확인하여 엄마께 말하는 것은 내 담당이었다. 마당에 발자국 소리가 들리면 얼른 뙤창에 두 눈을 갖다 붙인다. 시골이라 찾아올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으니 늘 그 사람이 그 사람이었다.
우편집배원이 마당에 바퀴로 둥근 원을 그리며 벨소리로 점을 찍는 날은 도시로 간 큰 언니 향내를 황토색 가방에 담아왔다. 왈칵 문을 열어 소포를 받아 안고 코를 킁킁거린다. 그 반가운 냄새는 세월이 흘러도 잊혀지지 않고 가슴에 남아있다. 뙤창으로만 전해지는 반가움이고 그리움이다.
오일장이 열리는 날이면, 장에 간 엄마가 돌아오나 싶어 바스락 소리에도 뙤창을 내다보곤 했다. 사립문 저 멀리 하얀 블라우스가 어른거리면 영락없이 엄마다. 회색 두루마기 고름이 날리면 틀림없이 아버지다. 기다림을 해갈하듯 뛰어나가 마루 끝에 위태롭게 깨금발로 서서 두 팔을 벌리면, 뙤창 속으로 빨려들 듯 아버지 가슴팍에 아옹하며 안긴다.
유년의 뙤창은 내 눈을 화가로 만들었고 아름다운 그림을 내 가슴에 남겼다. 나는 그림 속에서 그리움과 반가움, 믿음과 사랑을 알았다. 내 작은 가슴이 한없이 넓어지게 한 것은 정사각형 네 개에 붙은 작은 유리였다. 안쪽의 좁은 공간에서 넓은 밖의 세계를 보여준 웅심 깊은 뙤창은 부분보다는 전체를 보는 것을 가르쳐줬고, 작게 보여도 바르게 보는 것을 알려줬으며, 보이는 그대로를 반영하는 믿음을 심어줬다.
현관문이나 세살문이나 뙤창의 재료는 둘 다 유린데 마음의 감각은 영 딴판이다. 세월의 흐름 따라 사람의 겉모습이 변해가는 것처럼 물건도 사람을 닮아가나 보다. 사람의 본성이야 어디 갈 것인가. 겉모습에 날조되어 고운 속이 덮여진 것이리라. 현관문의 유리는 그런 가면을 쓰고 본 세계는 아니었을까.
면접관의 심각한 샛눈처럼 현관문 중앙에 자리한 유리는 얼마나 철저히 사람을 분석해서 보여주는지 외양은 물론 마음까지도 상상할 수 있도록 해준다. 원근에 따라서는 일부분이 확대되거나 축소되어 인상 좋은 사람도 괴이하게 보여 시시종종 추측을 하게 된다.
사람을 만날 때 의심의 마음으로 볼 때가 종종 있다. 어떤 때는 마음보다 눈이 먼저 사람을 평가할 때도 있다. 부모님께 받은 뙤창 같이 맑은 마음은 없어진 지 오래고, 세월 따라 도어 뷰로 갈아 끼우고 맑은 척 살아가지만 뙤창의 믿음이 그리운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예전에는 얇은 창호지 발린 세살문으로도 안과 밖을 나누기에 부족함이 없었고 작은 뙤창으로도 바깥세상을 다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두터운 철문의 경계도 모자라 감시카메라까지 달고 도어 뷰로 보이는 모습을 판단하는 군맹무상이다. 속내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이 사람을 결정하는 전부가 되었다.
너무 튼튼한 벽을 가지면 일반 유리를 끼우기가 힘이 들어 특수 유리를 끼워야 한다. 유리도 벽의 힘을 지탱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인들 다를 것인가. 경계가 심할수록 눈은 왜곡이 극심해진다. 마음에 숨구멍이 생길 때 눈에도 여유가 생기는 법이다.
내 눈이 쌀쌀맞은 도어 뷰라면 아이들의 눈은 여유 있는 뙤창이다. 도어 뷰로 왜곡된 모습을 일일이 내다보는 나와는 다르게 현관문을 활짝 열어 버리는 아이들이 아닌가. 아이들처럼 문을 활짝 열고 싶다가도 동전만 한 유리로 눈이 가는 나는 이 시대를 거스르지 못하는 마음의 소경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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