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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쇄빙 / 주인석

부흐고비 2019. 10. 17. 10:16

쇄빙 / 주인석

소리가 너무 깊어 심연에 금이 간다. 얼음 아래 갇혀 출렁이던 소리가 뱃머리에서 부서진다. 눈부신 충돌, 오싹한 만남. 2월의 충주호는 유람선이 만들어낸 수천 개의 다이아몬드 잔혹사로 빛이 낭자하다. 빛과 빛이 부딪치는 소리가 귀를 타고 흘러들어와 심장에서 쩡!하고 울리자 온몸에 금이 간다.

얼음 깨지는 소리가 처음엔 신기하지만 나중엔 시끄러워서 거슬릴 것이라며 선장은 미리 죄송하다고 말했다.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소리는 소음의 차원을 넘어서 하나의 볼거리로 다가왔다. 소리가 귀에서 눈으로 서서히 전이되자 호수 위에는 부서진 정적만이 출렁거렸다. 소란스러움도 익숙해지면 고요함이 되는가 보다. 아무리 깊어도 싫지 않은 것이 있다면 시끄러움 속의 고요함이다.

유람선이 첫 번째 숨고르기를 한 곳은 '두향의 묘'다. 그녀 생전의 삶을 말해주듯 묘는 만수위 표시선과 아슬아슬하게 맞닿아 잇는 듯 하면서도 비껴있었다.

"저 매화분에 물을 주어라."

이처럼 짧고 간단한 말로 깊은 사랑을 표현한 사람은 퇴계 선생이다. 48세의 퇴계 선생이 단양군수로 있을 때, 18세의 기생 두향과 9개월 동안 짧았으나 깊은 사랑에 빠졌다. 선생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두향이가 준 매화분을 곁에 두고 정성들여 키웠고, 두향은 선생과 자주 갔던 남한강가에 움막을 치고 평생을 살았다.

'사랑한다'는 그 흔한 말 한마디 기록에 없지만 세상은 그들의 사랑을 공식화했고 이제는 관광 상품이 되었다. 이러다보니 그들의 사랑을 두고 왈가왈부할 여지는 많아졌다. 신분의 차이가 분명했던 시대에 군수와 기생, 아버지와 딸 뻘 되는 두 사람의 사랑이 곱게만 보이지 않는 것은 속 좁은 범인凡人이기 때문일까. 그때 내 눈에 한 편의 시가 새처럼 내려앉았다.

"이별이 하도 설워 잔 들고 슬피 울며, 어느덧 술 다 하고 님마저 가는 구나. 꽃 지고 새 우는 봄날을 어이할까 하노라"

두향이 마지막 날 밤에 선생 앞에서 직접 쓴 시다. 두향은 시와 서 그리고 가야금에 능했고 매화를 무척 좋아했다. 두 사람은 인문학 정서가 딱 맞았던 것이다. 선생이 쓴 백 편의 매화시가 두향에게 남긴 백 편의 연애편지라고 생각하니 내 안에 오랫동안 얼어있었던 관점 하나,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유람선이 천천히 움직이자 물 위에 뜬 별들이 와르르 부딪치는 소리를 낸다. 저것들의 이름이 지상에서는 얼음이지만 천상에서는 별이라고 불리지 않을까. 맑은 물을 볼 때마다 별은 물에서 태어났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수많은 물고기들이 흘린 눈물은 다 어디로 갔을까. 물고기의 눈물이 물에 섞여 알그락거리다가 추운 겨울엔 꽁꽁 얼어서 다이아몬드처럼 빛을 내는 별이 되는 것이라고. 호수의 어디에선가는 물고기와 거북이 겨울이면 더 많은 별을 낳고 있을지 모른다.

조각조각 별들을 가르며 나아가던 유람선이 두 번째로 멈춘 곳은 구담봉이다. 위를 쳐다보니 석벽 위에 바위 하나 보인다. 해설사는 봉우리 위에 거북이가 있다며 찾아보라고 한다. 바위 모습이 거북을 닮았다고 하여 구봉이라 하고, 강물 속에 비친 바위에 거북 문양이 보인다하여 구담이라고도 부른다.

거북을 발견하면 200살까지 장수한다는 말에 너도 나도 거북 찾기에 왁자하다. 보는 사람에 따라 달리 보이는 것을 하나의 형상으로 쫓아가는 데는 '장수'라는 한 마디면 충분했다. 묘하게도 장수의 반대는 단명 같이 느껴졌다. 애써 찾고 싶지 않았지만 수명언어는 내 머릿속을 온통 거북형상으로 채워 끌고 가고 있었다. 행여 찾지 못하면 어쩌나 조바심까지 생기는 것을 보면 영원히 풀지 못하는 인간의 숙제는 삶이 아니라 죽음인 것이다.

삶이 깊은 이유는 죽음이 낯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예사로 보아 넘길 바위 하나에도 깊이 끌리는 것은 점점 더 죽음에 다가가고 있음을 몸이 먼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삶의 깊이는 나이와는 무관하다. 스물에도 마흔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여든에도 마흔 같은 사람이 있다.

거북처럼 깊고 느리게 걸어도 조급하지 않은 사람이 있고, 맹수처럼 얕고 빠르게 달리면서도 허덕이는 사람이 있다. 거북의 수명이 200년이고 호랑이의 수명이 20년인 것을 볼 때, 우리의 수명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길이와 넓이보다는 깊이와 무게로 살아내고 있는 것들의 장수비결이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닐까. 100세 시대는 의학이 깨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 깨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 안에 굳건히 자리 잡았던 수명에 대한 관념 하나가 또 깨지고 있었다.

장수 티켓을 한 장씩 거머쥔 사람들을 태운 유람선이 향한 곳은 옥순봉이다. 우뚝우뚝 몸을 세운 봉우리 앞에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말았다. 땅을 뚫고 금방 솟아오른 싱싱한 죽순이다. 우후죽순이다. 학문의 비를 맞은 수많은 선비들이 신선의 땅으로 들어가는 단구동문을 막 지나 한자리에 모인 듯하다. 땅을 밀고 올라온다고 하여 다 솟아오른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밀어 올리는 데도 격식이 있고 절도가 있다. 높게 일어나되 마디를 두어 쉬어간다. 깊게 배우고 두루 듣는 학문의 경지가 이와 같지 않을까.

선비의 몸에 학學이 스며들면 문問이 열리듯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깊이가 죽순처럼 솟아오른다. 가장 높은 것은 가장 깊은 곳에서 출발한다. 옥순봉이 되기까지 수많은 시간을 땅 속에서 보내며 얼마나 많은 융기를 꿈꾸었을까. 반평생을 땅 속 줄기로 살다가 지상에 올라온 죽순은 영겁의 세월을 옥순봉으로 살아간다.

삶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우리의 인생 전반기는 학문을 위한 학문을 해 왔다. 이제는 삶을 위한 학문, 삶과 조우하는 학문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 50년간 익힌 학문을 넘어서야 할 때다. 참 공부는 나이를 깨는 것이고, 나이를 깨는 것이 나를 깨는 것이다. 깸으로써 얻는 관념의 이름, 이제는 나의 옥순봉으로 우뚝 서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마음을 반으로 갈라 머무는 곳과 떠나는 곳을 이어 묶는다.

멈춤과 움직임의 경계에는 쇄빙된 것들로 빛이 난다. 사랑의 나이를 깨고, 삶과 죽음의 나이를 깨고, 학문의 나이를 깨고 보니 깬다는 것은 깨달음이었다. 깨고 나면 부드럽고 유연하다. 젊은 시절은 호수의 넓은 표면과 소리에 매료되었다면 지금은 호수의 깊은 내면과 고요함에 매혹된다. 깨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그런 깨달음. 부딪쳐서 상처가 나고, 멍이 들고, 피가 나는 것은 시끄러운 소리에 불과하고 깨달음의 껍데기에 불과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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