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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과사전 / 김형진
내게는 사전이 참 많다. 여느 집 책꽂이에나 꽂혀 있을 법한 국어사전, 영한사전, 옥편, 고사성어사전 말고도 시사용어사전, 민족생활어사전, 한국속담활용사전, 문학비평용어사전, 한국문예사전 등이 있으며, 세계대백과사전 30권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7권은 따로 책꽂이를 맞추어 모셔놓았다. 이 중에는 필요할 때마다 열어 보아 손때 묻은 것도 있지만, 필요할 것 같아 구입은 했지만 몇 번 열어보고는 닫아 둔 채인 것도 있다. 그리고 내가 구입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서가에 있던 것을 업어온 것들도 있다.
세계대백과사전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원주인은 소설가 L 선생님이다. 한 10년 전쯤일 것이다. 이사를 하려는데 꼭 필요하지도 않은 책들이 짐이 되어 몇 군데 도서관에 연락을 했으나 선뜻 받아주겠다는 데가 없어, 어쩔 수 없이 폐지로 처분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했다. 그 중에서도 백과사전 57권은 무값을 들여 구입했을 때에는 바닥난 쌀독에 쌀을 그득 채운 듯 뿌듯했는데 책꽂이에 꽂아놓고 보니 별로 쓰임새가 없더란다. 낯선 어휘를 만나 잔뜩 기대를 하고 찾아보면 그 풀이가 시원치 않거나 아예 없는 일도 허다했다. 그러다 보니 크고 무거운 책을 펴는 일조차 거추장스러워 등을 돌리게 되었다. 졸부猝富의 거실을 장식한 책장으로 전락한 꼴이 된 지 10여 년, 이제는 처치 곤란한 애물단지가 되었다며 씁쓸한 표정이었다. L 선생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 책 내가 가져가겠다고 나섰다.
백과사전 57권을 방 안에 쌓아 놓고 보니 부자가 된 듯 뿌듯했다. 그러나 방바닥에 쌓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잡다한 책들이 선점한 책꽂이에는 자리를 내어줄 공간이 없었다. 궁리 끝에 따로 책꽂이를 마련하기로 했다. 책의 높이와 두께를 재어서 목공소를 찾아갔다. 3단 3칸으로 짜되 한 단에 20권씩 꽂을 수 있게 하고 밑에는 양쪽에 서랍을 달아 달라 주문했다.
책꽂이가 들어온 날, 책 한 권, 한 권을 마른 수건으로 닦아 꽂아 놓고 보니 겉보기에 흐뭇할 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지식이 다 내 방 안에 들어와 있는 듯 든든하기까지 했다. 그 뒤 얼마 동안은 책을 읽을 때는 물론 인터넷 서핑을 하거나 방송을 들을 때에도 생소하거나 긴가민가한 말이 나오면 일단 메모해 두었다가 백과사전에게 달려가 묻곤 했다. 그런데 더러는 달려가 노크를 해도 아예 문을 열어주지 않을 때가 있는가 하면, 문을 열어주긴 했는데 대답이 성에 차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배신감 비슷한 감정이 스멀스멀 일었다.
차츰 백과사전을 찾는 일이 뜸해갈 무렵 인터넷 사전 사용법을 익히게 되었다. 인터넷이라고 헤서 찾을 때마다 만족할 만한 해답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힘들여 책을 뽑아 페이지를 넘기며 찾는 수고를 덜 수 있어 요즈음에는 아예 백과사전을 가까이하지 않는다.
내 책을 넣어두는 방에는 그럴싸하게 격식을 갖춘 책장이 없다.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책꽂이를 구해다 썼기 때문이다. 그중 가장 낡고 얼추 격식을 갖춘 5단짜리 책장은 거무트름한 헌 책들이 차지하고 있다. 살 때는 새 책이던 것도 몇 권 있지만 대부분은 살 때부터 헌 책이던 것들이다.
학교에 다니던 시절 내가 주로 들르는 서점은 헌책방이었다. 책 사는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헌책방에서라야 만날 수 있는 책들 - 일제강점기에 출간된 문학서적, 월북 작가들의 작품집들을 펴볼 수 있고, 헐값에 사는 행운을 누릴 수도 있어서였다. 그 무렵 자주 들르는 헌책방에서 새 책이나 다름없는 국어대사전을 만났다. 소사전에 감질나 지내던 터라 이게 웬 행운인가 싶었다. 그러나 헌책방의 대사전 값도 내 호주머니 사정으로는 언감생심이었다.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돈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동분서주한 지 세 시간여 만에 겨우 책값을 챙겨 대사전을 품에 안았을 때, 그때에야 다리가 몹시 아팠다.
요즈음에는 종이 사전을 펴보는 일이 거의 없다. 목공소에서 책꽂이까지 짜 맞추어 꽂아 놓은 백과사전이 우리 집에 와서도 장식품이 되어 있다. 그런데도 57권 백과사전이 정연히 꽂혀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마음은 아직도 흐뭇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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