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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서적굴 디딜방아 / 허세욱

부흐고비 2019. 10. 22. 14:46

서적굴 디딜방아 / 허세욱



사나흘쯤 눈이 내리다 그치면 온 천지가 교교했다.

백두대간 그 길고 앙칼진 등짝에서 갈비뼈 하나를 얻어 서남쪽 황해 바다로 줄기차게 달리는 노령산맥, 그 작은 가지 하나가 우리 마을로 맴을 돌면서 병풍을 이루었다. 이름하여 노산이다. 그러니까 모갈 노산은 백두대간의 손주 뻘이요. 노령산맥의 작은아들 뻘쯤 된다.

온종일 글방에서 숙지황 되었다가 석양에 풀려나 뒤뜰 몽실몽실한 논두렁에서 기지개를 펴면 맨 먼저 가슴을 후비는 것은 노산으로부터 피어나는 파란 안개 자락이었다. 서적굴에서 흘러온 안개는 달빛 같기도 하고 아지랑이 같기도 해서 고추바람 물결에도 너울너울 머리 풀다가 천천히 사라졌다. 그 안개가 사라지면 노산의 검푸른 등허리가 드러나면서 서적굴 옴폭한 잔등이 다가왔다. 그리고 귀를 모으면 꿈결인 듯 쿵! 쿵! 쿵더쿵! 디딜방아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 아연하게 울려 퍼지면 모갈의 초가지붕조차 정적에 눌리었다.

서적굴은 노산이라는 푸른 바다 그 가슴에 안긴 작은 섬이었다. 뒤로는 돌올한 노산의 주봉, 앞으로 빼꼼히 보이는 모갈은 불과 1킬로미터의 지척지간이다. 한밤중 호롱불 두 개만 끄면 칠흑의 첩첩산중이다. 해바라지게 옆으로 스쳐 가는 신작로나 작은 주막도 얼씬하지 않는다. 어쩌면 안방 아랫목 위에 은밀하게 가설한 벽장일지도 모른다.

임실 서적굴은 아직 아무도 몰래 숨어 산다. 이태李泰가 쓴 ≪남부군≫에 나오지만 그것도 빨치산이 순창 회문산에서 무주 덕유산으로 이동하는 비밀 루트의 한 지점에 불과했다. 요즘 라디오나 텔레비젼에 가끔 들먹거리는 임실은 무슨 산업단지나 관광승지로서가 아니라 높은 적설량으로 이름을 얻는다. 때로는 강원도나 전방을 제치고 건방지게 앞자릴 차지하곤 했다. 말하자면 그만큼 쓸모없는 두메인 것이다.

그 서적굴에는 겨우 집 두 채만 있을 뿐이다. 한 채는 노양재요 한 채는 산지기 집이다. 노양재는 이름 그대로 노산의 양지에 모신 재실이라 5칸 겹집의 넓이에 까만 기와를 더덩실 올렸다.

모갈은 나의 9대조 할아버지께서 서울로부터 낙향, 이곳에 기둥을 박고 척박한 땅을 갈고 심기 벌써 270여년. 시쳇말로 그분은 우리들의 파이어니어이거늘 그분을 배향하는 이만한 제각이 있을 법했다.

제각이 시제를 모시는 일 말고도 작은 서원 노릇을 겸했었다. 조선이 오백 년 왕조를 거둘 무렵 내 조부께선 그 재종제와 함께 여기다 서원을 차리시고 그 고을 후학과 영재들에게 한문과 경학을 가르치시다가 한 ·일 합방 후 별 수 없이 문을 닫았었다. 서원을 거둔 뒤로는 내 종조부께서 옛날의 한적을 방마다 천장에 닿도록 수장하곤 아예 여기서 기거를 시작하셨다. 한말의 마지막 과거에 급제하신 조선 선비답게 세상의 속진을 멀리 한 채 은거했었다.

6·25전쟁이 터지자 선친께선 나를 꼼짝 못하게 잡아 놓으셨다. 노루처럼 벌떡벌떡 뛰고 다닐 고1짜리를 우리집 사랑에 차린 서당이란 고빼에 매놓곤, 어처구니없게도 "난세에는 진서를 읽어야 사느니라"고 주술처럼 말씀하셨다. 하는 수 없이 학교의 책들을 묶어 두곤 ≪동몽선습≫ 이나 ≪격몽요결≫ 같은 한학의 입문서를 읽기에 허구한 날을 보냈다. 그 기초가 끝나자 ≪논어≫ 나 ≪맹자≫ ≪고문진보≫ 등을 가르치더니만 그 이듬해엔≪시경≫ 이나 ≪서경≫ 등 남루한 책가위에 덧입힌 그 고리타분한 책에 매달려 날마다 지루한 턱걸이를 해야 했었다.

나는 서당방 서동일 때, 서적굴 심부름을 좋아했다. 첫째는 답답한 그 서당방을 탈출해서 좋았고, 둘째는 그 한 마장 거리에 철 따라 널려 있는 산딸기나 머루 등이 주전부리에 좋았고, 셋째는 작은 할아버지 서실의 그 썰렁하면서도 고전적인 분위기가 좋았고, 넷째 그 산지기 집 디딜방아를 온몸으로 밟는 것도 신나는 일이어서 그랬다.

종조부의 서실은 늘 썰렁했었다. 옛날 고조할아버지 때부터 수장했다는 그 고풍스런 책들을 병풍처럼 둘러 세웠지만 부연 불씨가 깜박이는 질화로에는 때로 노란 인절미가 까맣게 탄 채로 인두 위에 달랑 올려 있거나 조그만 연둣빛 찬합에 그림처럼 은백의 족편이 단정하게 잘려 있었다. 나는 일부러 질문을 만들었다. 빙긋이 웃으시며 한 글자 한 글자 속에 박히도록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 칭찬과 그 인절미 한 토막, 족편 한 조각이 내게는 모두 꿀물 같았었다.

그러니까 종조부의 서실은 내게 사원 같은 엄숙 말고도 안방 같은 따스함을 주었기에 지금도 내게는 꺼지지 않는 호롱불로 남아 있다.

노양재가 가물가물한 호롱불이라면 산지기의 집은 시베리아의 소리가 들리는 바람 머리였다. 그 집은 온통 초가였다. 초가삼간의 안채 외로 좌우에 행랑이 있었다. 좌로는 솔잎 · 솔가지의 마른 나무를 쟁여 두는 헛간, 그 옆으로는 디딜방아, 디딜방아는 바로 사립문에 붙어 있었다. 사립문을 닫아도 노산의 바람이 윙윙거리며 몰려오는 입구요 출구였었다.

방앗간이라야 네댓 평의 생땅이면 족했다. 부잣집 광 넓이였지만 따로 문이 필요 없고 추녀 밑으로 바람이 제멋대로 들락거렸다. 진흙을 발라 바탕을 편편히 닦은 뒤 저 안창에다 구덩을 파고 돌확을 묻었다. 확 옆으로 괴밑대를 세우고 그 위에 4, 5미터의 차미나무 방아의 원목을 걸치곤 그 방아대의 안쪽에는 공이를 박고 그 바깥은 디딜대로 삼았다. 디딜대는 외다리와 양다리 두 가지, 서적굴의 디딜방아는 양다리였다. 그리고 방아의 중간쯤 지렛대의 위치에 굴대를 박아 방아의 상하 운동을 조절했고, 천장에다 밧줄 두 개를 매어 방아를 딛는 두 사람에게 손잡이로 제공했었다.

방아를 찧는 데엔 두 사람이 필요헀다. 한 사람은 확을 맡고 한 사람은 밖에서 딛는 일을 맡았다. 그러나 효과적인 작업을 위해선 네 사람이 좋았다. 그리고 성별로 분담이 이루어졌다. 확 쪽에는 부녀가, 디딜대에는 사내가 적임이었다. 부녀 중 한 사람은 몽당 빗자루를 들고 공이가 오르고 내릴 때마다 튕겨 나오는 곡물을 쓸어 모으고 한 사람은 키나 체로 확 속의 곡물을 까불고 쳐내어 미세한 분말을 함지에 담았다.

디딜대는 두 사내가 자못 공격적이었다. 두 사람의 체중을 방아의 양다리에 싣고 방아의 그 공이가 확 속의 곡물을 명중하여 그것들을 처절하게 분쇄시키는 일이었다. 그러니 정확한 조정이 필수적이었다. 방아의 머리나 공이가 잘못 사람을 다칠 우려가 없지 않아서였다.

나는 디딜방아의 역사를 좋아했다. 본래 숫기가 없던 탓으로 안일 돕기를 좋아했다. 어머니 옆에서 부엌에 솔잎 지피기나 여름날 대청 안반에다 국수 밀기, 가을날 이른 아침 대청에서 홑이불을 다림질할 때 그 한쪽 귀퉁이를 잡아당기는 일 같은 잔챙이 일을 좋아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아내 따라 장보기나 설거지를 나로서는 무가내하지 않는 셈이다.

명절을 쇠거나 제사를 지낼 때면 우리집도 부산하게 방아를 찧었다. 특히 떡방아처럼 쌀을 물에 담갔다가 가루로 부수거나 제사 때 정갈한 메를 올리기 위해 나락을 찧을 때는 디딜방아를 찾았었다. 그때마다 그 역사는 안팎의 혼성이었다. 어머니나 형수 중 한 분이 체를 잡았고 바깥쪽에서는 내가 충원되었다. 물론 나머지 자리는 우리집 머슴의 몫이었다.

방아가 머리에 공이를 달고 괴밀대에 서 있는 모습은 가을날 논두렁을 뛰는 여치 같았다. 더구나 길다란 몸통 끝에 두 개의 가랑이를 내리고 있는 모습이 그렇다.

우리는 먼저 확에 쌀이나 나락을 붓고 괴밑대를 밀친 후, 머슴과 나는 양다리에 각각 발을 올렸다. 두 사람이 호흡을 맞추기란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다만 두 사람이 한 발을 땅에 내리고 한 발을 디딜대에 올리고 상하 운동을 할 때 정확한 방향을 조작해야 했었다. 이윽고 디딜대를 밟으면 굴대에서 비꺽- 하는 소리와 함께 공기가 불쑥 솟는데 이건 영락없이 몽니 난 황소가 뿔을 앞세우고 확- 달려오는 형상이었다. 그때 얼른 발을 내리면 방아는 공이와 함께 확으로 곤두박질하면서 퍽- 하는 둔탁한 소리 따라 나락이 혼비백산했다. 그때마다 몽당 빗자루를 든 아줌마의 손길이 바빴다.

밟고 떼고…. 나의 단순 동작이 거듭할수록 허기졌다. 어쩌다가 눈꽃이 방앗간으로 맴을 돌면 그것들이 싸늘하게 혀끝에 잡혔다. 무릎이 시리고 종아리가 무거웠다. 그 무렵 방아 소리가 또 달랐다. 퍽 퍽 둔탁하던 소리가 픽픽 첨예한 소리로 바뀌었고, 어머니는 머리에 하얀 가루를 둘러쓴 채 부지런히 체를 빙빙 돌렸다. 방아는 위아래로 직선을 긋고 어머니는 공이 옆에서 작은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러나 방아일은 마무리가 힘들었다. 날은 침침하고 발은 천근으로 무거운데, 글쎄 그 몇 주발의 쌀이 좀처럼 분쇄되지 않는 것이다. 그럴수록 공이가 확에 닿을 때 그 섬뜩한 금속성은 가슴을 찔렀다. 그렇다고 그 어렵던 세상에 몇 알의 싸라기라도 버릴 수 없었다.

나 어릴 적에 어머니의 쑥대머리 비슷한 단가조를 몰래 들은 일이 있었다. 긴긴 겨울밤, 어쩌다가 잠에서 깨었을 때 어머니는 희미한 호롱불 밑에서 바느질을 하셨다. 때마침 일손을 놓고 무언지 알아들을 수 없게 중얼거렸다. 그 구슬픈 애탄은 문풍지처럼 가락으로 떨고 있었는데, 이윽고 깡마른 주먹으로 연신 가슴을 치고 있었다. "아이구 내 새끼야! 일거무소식이라니." 그것을 훔쳐 본 나는 덩달아 이불 속에서 방바닥을 치고 싶었다.

나는 때로 무명밭을 매던 어머니를 뵌 일이 있었다. 무명밭은 본시 자갈이 많은 박토였었다. 한여름에 달포 쯤 가뭄이 겹친 날이면 무명밭에 화기가 사람을 찔렀다. 무명밭 고랑 사이로 무, 배추의 모가지가 타들어 갈 때 마침 비라도 한 줄금 뿌리고 나면 호미질을 했는데 뿌리마다 흙을 돋우고 잡초를 뽑아야 했다.

철렁한 무명치마로 무릎은 물론 발등까지 꼭꼭 가린 채 원숭이의 쭈그린 자세로 무명밭 긴긴 고랑과 두덩을 쫓아가며 푸석푸석 흙자갈에 뾰족한 호미를 꽂았다가 끌어안듯 당기는 동작이었다. 그렇게 땅을 찍으면서 목숨을 키우고 세월을 사르고 계셨다.

어머니는 우리집에 시집오셔서 이승을 떠날 때까지 칠십 년 동안 어엿하게 사대 봉사의 종부에다 여섯 사내의 어머니로서 꽤나 큰살림을 꾸려 오신 것만으로 수와 복을 누렸다 할 것이다. 나 비록 그분이 땅을 치면서 호곡하거나 뉘와 눈을 부라리며 촌적의 이를 다툰 일을 보지 못했지만, 서적굴 디딜방아는 떠올리면 그때 디딜방아의 공이가 아프도록 확을 찧던 그 몸짓과 침침한 호롱불 밑에서 자식의 행방을 몰라 축도하고 저주하며 가슴을 치던 어머니의 주먹 소리, 그리고 뙤약볕 아래 무명밭을 매느라 흙두덩을 찍어 내던 호미질, 그 세 가지 형상이 함께 포개지는 것이다.

이제사 알 것만 같다. 제사를 모시고 자식을 기르는 일이 끝내 디딜방아를 찧고 가슴을 치는 일일 줄이야. 그리고 눈 갠 저녁노을에 파랗게 피어나는 안개 속에 '쿵 쿵 쿵더쿵'하는 방아 소리조차 슬픔인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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