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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무량수전에서 / 주영순

부흐고비 2019. 10. 29. 16:08

무량수전에서 / 주영순
2019 매일시니어문학상 수상작


길을 잃은 듯 안양루에 서 있다. 절집은 처마 끝마다 버선코처럼 살짝 들리어져 신비롭다. 운해에 섞여 먼 산은 간 곳 없고 어렴풋이 보이는 낮은 산들이 남실거리는 파도처럼 아련하게 보인다. 우산을 높이 들고 공중에 뜬 기분으로 천천히 돌아선다. 비를 맞는 무량수전의 모습이 음전하다.

부석사는 일주문에서 안양루까지 돌계단으로 길이 이어져 있다. 다른 절집처럼 한눈에 사찰 정경이 보이지 않는다. 누각 밑의 계단을 한 발 한 발 디딜 때마다 번뇌를 하나씩 버리면 누구나 극락으로 들어갈 수 있단다. 헝클어진 생각을 정리하다 전화 속 힘없던 딸의 음성에 맥없이 주저앉던 날이 떠오른다. 어느만큼 가다가 절집의 수려한 모습이 펼쳐지고, 단청이 없는 민낯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범종루로 들어선다. 시야가 시원해 한숨을 돌린다.

사사로운 갈등을 미련 없이 버리지만 돌아서면 어느새 가득 차 있는 번뇌를 어이하겠는가. 맑은 여인으로 살고자 했었다. 못난 짓거릴 많이도 하였다. 뉘우침은 없고 한만 남는 이유는 뭘까. 교만이, 이기심이 옥죄는 걸 왜 모르나. 비는 끊임없이 내리고 아홉 개로 되어있는 석단의 마지막 돌계단을 딛는다.

딸은 모든 걸 잊으려고 애를 쓰며 살아간다. 아직도 슬픔에 젖어 과거에 사는 이 못난 어미는 딸만도 못하다. 알게 모르게 지은 죄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것일까. 의심에 불안을 달고 산다. 백팔개의 돌계단에서 무엇을 내려놓았나. 마음대로 안 되어서 주저앉고 싶던 날들을 다 끌고 올라왔다.

마지막 돌계단을 딛고 안양 문으로 들어섰다. 빗줄기 사이로 퇴색된 천년 빛을 휘감은 무량수전이 보인다. 여섯 개의 배흘림기둥이 우뚝 서 형형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홀리듯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을 조심스럽게 만진다. 습기를 잔뜩 먹어 축축하다. 거칠거칠한 몸을 쓸어내리며 거대한 세월 동안 수고한 노동에 숙연해진다. 쩍쩍 갈라진 골진 주름을, 깊은 몸속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배흘림기둥은 통통한 것이 딸애의 배를 닮았다. 천하를 얻은 것처럼 기쁨이 딸애를 감쌌다. 온갖 수식어를 다 가져와도 모자랄 만큼 신기하고 대견해서 봉긋한 배를 만져보고 또 만졌다. 몇 십 년 만에 우리 가정에 쌍둥이 첫 손주들이 나올 거라는 기대에 모두 꿈길을 걸었었다. 배가 막달처럼 부풀어 오르는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양수과다증으로 아기는 물론 산모까지 위태로웠다. 그렇게 아기들을 잃고 이 년 후 이번엔 기필코 아기를 잃는 일은 없을 거라고 했건만 오 개월이 되자 또 실패하였다.

울음바다에 빠진 듯 허우적거리던 딸이 툭툭 털고 일어났다. 딸애의 의지가 굳어 오히려 위로를 받았다. 몸을 추스르고 전화 속 딸의 음성은 차분했다. 나쁜 꿈을 꾼 거라며 다 잊자고 한다. 학교에 다시 나간단다. 건강 잘 챙기시라며 오래오래 살아 힘이 되어달라고 한다. 그 이후 지금까지 아기는 가슴에 묻고 사는듯하다. 한 번도 이야길 꺼내지 않는다.

배흘림기둥에 손을 얹고 사무치는 마음을 꼭 끌어안는다. 죄 없는 태아들이 이슬처럼 슬어지고, 부모님은 늙지도 않아서 서둘러 가셨다. 누구나 먼지처럼 사라진다는 것에 계속 헤맨다. 거세게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걷잡을 수 없는 속울음을 참는다. 세상 빛을 못 보고 간 태아들이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길 바라며 천천히 배흘림기둥을 쓸어내린다.

빗방울을 말없이 바라보다 소조여래좌상이 있는 무량수전 안을 들여다본다. 진흙으로 빚은 몸에 금박을 입힌 아미타부처는 근엄한 모습이다. 아미타부처는 우주의 모든 생명체가 깨달음을 얻고 열반에 들어 윤회에서 벗어날 때까지 극락세계에 머문다고 한다.

정갈한 듯 날아갈 듯 사뿐히 고개를 쳐든 지붕의 추녀가 마음을 흔든다. 안쏠림은 기둥이 건물 안쪽을 향해 쏠리도록 기울여 세우는 독특한 기법이다. 또 귀솟음은 건물 중앙에서 양쪽 끝으로 갈수록 기둥을 점차 높여주는 것이다. 착시효과라지만 기와의 곡선은 춤을 추는듯하다. 비에 젖는 무량수전은 더욱 수려하고 마음을 고요하게 해준다.

무량수전 앞에 부처의 진리를 비추는 석등이 있다. 석등을 천천히 돌며 곱게 핀 꽃을 발견하였다. 연꽃은 돌 속에서 빗물을 머금고 활짝 폈다. 더러운 흙탕물에서도 우아하게 올리는 꽃을 생각한다. 한 송이 연꽃처럼 피어난 무량수전을 바라본다. 어떠한 순간에도 나만의 기품있고 맑은 생을 살 수 있다는 것에 산란하던 마음을 가라앉힌다.

절집으로 내려온 구름을 밟는 느낌으로 무량수전의 은은한 향에 취한다. 큰 우산에 부딪는 빗소리에 정취가 더욱 무르익는다. 무량한 자비 속 고요가 내면에 잠재된 그리움이 되어 뭉게뭉게 피어오름을 느낀다. 적멸을 꿈꾸는 절집에서 새롭게 태어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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