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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백자와 홍매 / 정목일

부흐고비 2019. 11. 10. 08:53

백자와 홍매 / 정목일


내가 자주 들르는 P 화랑 한구석, 사방탁자 위엔 목이 긴 조선 백자병이 하나 놓여 있다. 화랑에 들를 때마다 무심결에 그 백자병에 눈이 머물곤 했다. 담담한 그 빛깔과 태깔을 바라보고 있으면 목에서부터 미끄러져 내려온 곡선이 내 눈길과 마주쳤다. 모르긴 해도 백자는 달빛을 담아 둔 그릇 같았다. 볼수록 은은하고 마음이 비칠 듯한 그릇이었다.

어느 날, 이 백자병에 홍매(紅梅)가 꽂혀 있었다. 화랑의 주인 S여사의 솜씨였다. 목이 긴 조선 백자의 미끄러지는 곡선미와 쭉쭉 뻗은 가지에 점점 이 맺힌 붉은 꽃망울…….

백자와 홍매의 만남이야말로 기막힌 조화의 극치이며 대화이다. 그저 할말을 잊어버리고 마음으로 주고받는 대화는 어떤 말일까. 서로 은밀한 얘기로써 매화 가지에 물이 오를 때 백자는 그윽한 달빛이 되어 피리 소리를 띠고 있는 것일까.

꽃병은 꽃을 꽂는 그릇이지만, 마음을 담아 두는 그릇이다. 담는 이에 따라 병도 다르고 꽃도 다르다. 또한 이 꽃병을 꽂는 위치도 달라진다.

조선 백자병이 사방탁자 위에 올려져 있을 때, 백자병에 홍매가 꽂혀 있을때, 시간과 공간의 만남, 그 의미와 멋은 사뭇 달라진다. 이런 멋의 깊이, 눈썰미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랫동안 백자와 마음으로 대화를 나눠 정이 들대로 들어야 그 맛을 터득하게 되는 법이다.

백자를 어느 공간의 어디에 놓아두어야 할까. 그것을 깨닫기에도 오랜 세월이 걸린다. 더군다나 백자에 어떤 꽃을 꽂을 것인가 하는 문제에 있어선 하나의 재능이요 솜씨가 아닐 수 없다.

우선 병이든지 항아리든지 간에 꽃을 꽂을 그릇을 잘 알지 않으면 안 된듯 싶다. 오랫동안 항아리를 쳐다보며 어떤 꽃을 꽂을 것인가 생각하는 것 자체가 미(美)의 경지인 것이다.

드디어 매화가 피었을 때, 나무 밑에서 어떤 가지를 꺾을 것인가 생각하는 것은 선(禪)의 경지가 아닐 수 없다.

매화나무 아래서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 한 송이 매화가 맺히기까지의 전 과정을 생각하면서 백자 항아리의 흰 곡선을 떠올릴 것이다. 아무 가지나 꺾는 법이 아니다. 나뭇가지 밑에서 조용히 바라보면서 생각해 둔 것― 마음에 드는 가지 한 가지를 꺾어 항아리에 담으면 되는 것이다. 눈에 거슬리는 두세 가지를 잘라 내고 꽂으면 그만이다.

그냥 한 가지면 족하다. 소탈하게 툭 던져 담아 두면 될 것이다. 여기에 어떤 기교나 방법이 따로 필요치 않다. 백자 항아리를 그냥 두고 바라만 보아도 아름다운데 꽃을 담았으니 어찌 아름답지 않을 수 있으랴.

내가 어렸을 적에 우리 어머님은 안방의 탁자 위에 흰 책보를 펴놓으시고 그 위 백자 항아리에 복사꽃이나 살구꽃을 꽂아 두셨다. 항아리에 물을 넣어 줄 때도 옥양목 책보에 물방울이 떨어지지 않도록 정성을 들이셨다.

며칠이 지나고 나면 책보 위에 꽃잎이 떨어졌다. 어머니는 떨어진 꽃잎을 책보에 싸서 바깥에 나가시어 조용히 털고 오셨다. 어머님의 주름진 얼굴을 대하면, 지금도 어릴 적의 흰 책보 위에 단정히 놓인 백자 항아리와 복사꽃 이 떠오르며 향긋한 꽃내음을 느낀다.

요즘엔 꽃꽂이를 수반에 많이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꽃꽂이에 대한 책과 강습회도 자주 열린다. 현대 여성들이라면 꽃꽂이의 기초 정도는 익혀야만 행세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현대의 꽃꽂이는 자연미보다 너무 기교적 인 조형미에 치중하는 감이 없지 않다. 이쪽의 가지가 이렇게 뻗었으니, 저 쪽의 가지는 요렇게 뻗어야 한다는 식의 공식적인 기교에 얽매이고 있다.
겉모양은 그럴 듯하나 깊고 고요한 맛이 우러나지 않는다. 형식적인 미는 있지만, 마음이 담겨 있지 않다. 어쩌면 수필을 쓰는 법도 꽃을 꽂는 법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수필이라는 문학 형식이 꽃을 꽂는 그릇이라면 꽃을 꽂되 어떤 꽃을 꽂아야만 되는 것일까.

겨우내 매화 피기를 기다리며 항아리에 물을 채워 두는 마음 ― 매화나무 아래서 어떤 가지를 한 가지만 꺾을까 곰곰 생각하는 경지가 수필을 쓸 수 있는 경지가 아닐까 한다. 소탈하게 한 가지만 툭 꺾어 항아리에 던져 담은 멋, 이것이야말로 수필을 쓰는 비법이 아닐까. 노력도 없이 짧은 시간에 단숨에 멋들어진 꽃꽂이 솜 씨를 보이려는 생각은 무모한 것이다.

항아리에 홍매 한 가지만으로도 족한 것인데 나는 어리석게도 장미, 라일락, 튤립, 안개꽃 등 보이는 대로 욕심을 부려 왔지 않았는가.

역시 항아리에 꽃을 꽂는 법을 터득하려면 먼저 마음을 맑게 닦아 달빛이 쌓일 수 있는 깊이와 백자의 담담한 선미(禪美)를 알지 않으면 안 될 듯싶다.

누구나 항아리에 꽃을 꽂을 수 있는 것처럼 수필도 누구나 손쉽게 쓸 수 있다. 그러나 하나의 백자 항아리가 지니는 미의 세계에 도달하기도 어려운 일이고 여기에 어울리는 꽃을 꽂는 일은 더욱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

어릴 적에 하얀 책보 위 백자 항아리에 살구꽃을 꽂아 놓으시던 우리 어머님 같은 분은 어쩌면 꽃꽂이 솜씨만은 보통 이상이라고 생각된다.

요즘 꽃꽂이 전시장에 출품된 눈부시게 화려하고 정교한 솜씨의 작품들엔 오히려 아무 생각 없이 항아리에 그냥 꽃가지를 꺾어 담아 놓으시던 우리 어머님보다 점수를 더 주고 싶지 않다. P 화랑의 사방탁자 위 조선 백자병의 매화를 바라보며 나는 한숨을 내쉰다. 홍매는 가엾게도 꽃잎이 떨어지고 있다. 며칠 후면 시들어 버리고 말 것이지만, 백자는 사방탁자 위에 언제나 그래도 있을 것이다.

한 순간에 잠깐 피어 지는 매화와 죽지 않는 생명을 지닌 백자가 이처럼 기막히게 어울릴 수 있는 까닭은 도대체 무엇일까.

백자가 홍매와 만나 더 우아롭고 향기로운 생명을 잉태할 수 있고, 홍매 역시 백자를 만나서 그 자태를 아낌없이 드러낼 수 있다. 백자와 홍매의 만남도 인연이다. 항아리는 항아리대로, 홍매는 홍매대로 눈을 감고 조용히 만남을 기다릴 줄 알아야 할 것이다. 홍매가 아니더라도 백자의 태깔에 어울리는 꽃을 알고서 꽂는 법을 터득할 수 없을까.

나도 백자 항아리의 매화와 같은 수필을 한 편이라도 써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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