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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고희와 보름달 / 최시호

부흐고비 2019. 11. 15. 12:05

고희와 보름달 / 최시호


세상의 모든 일에는 장단점이 있다.

나이 듦 역시 마찬가지다. 노화의 단점이 있지만 이순(耳順)과 독락(獨樂)의 장점도 있다. 젊은 시절에는 즐겁기 위해 운동을 하고 바둑을 두는 친구라는 파트너가 필요했으나, 나이가 드니 혼자서도 즐거울 수 있는 지혜가 생겼다. 그 중 하나가 달구경이다. 태양의 광휘(光輝)보다 달의 유현(幽玄)이 가슴에 더 와 닿기 때문이다. 어느 때 부터인지 달력을 보면 보름달이 며칠인지 확인해보는 버릇이 생겼다. 1년 열두 달 중 1월은 정월(正月)이라고 한다. 10월 상달(上月)처럼 계절의 쾌청함과 오곡백과의 풍성함은 없지만, 정월은 새해의 시작과 소망을 비는 희망의 달이다.

달빛도 표정이 있다.

꽃 피는 봄날 이화(梨花)에 월백하는 봄의 달빛은 은은(隱隱)하고, 천 개의 강과 천 개의 호수에 월인(月印)을 찍는 녹음짙은 여름 달빛은 정숙(靜肅)하며, 구만 리 장천을 날아가는 기러기를 인도하는 가을 달빛은 정연(正然)하고, 눈 내린 겨울날 월백 설백 천지백 하는 겨울 달빛은 교교(皎皎)하다.

보름달.

저 작은 ‘몸짓’ 하나로 하늘을 가득 채우는 그 넓음.

달빛 한가득 땅으로 보내 산(山)은 산이 되게 하고, 풀은 풀이 되게 하는 그 달빛 보시(布施). 그 빛은 밝으나 눈부시지 않고, 교교하나 화려하지 않으며, 은은하나 끊임이 없고, 부드러우나 손에 잡히지 않는다.

고희란 그림자의 뜻을 이해 할 수 있는 나이다. 나도 인생길을 한참 걸어와 고희를 앞둔 오늘. 이제는 해질 무렵 긴 그림자를 안고 있는 나무들을 사랑할 줄 알고, 내 지나온 인생길의 그림자도 사랑할 줄 알게 되었다. 연극무대의 조명은 밝음과 어둠의 조절이 용이하나 인생길의 조명은 그 명암을 마음대로 조절 할 수는 없겠지만, 내 남은 인생길의 조명도 이 정월 보름달처럼 제자리를 지키며 눈부시지도 어둡지도 않은 빛을 제 몫 만큼만 밝힐 수 있으면 좋겠다. 정월의 대보름달을 보며 이 작은 소망을 빌어본다.

달빛이 파도치며 드럼 소리처럼 울려 퍼진다.



대구 출생
현재 영남성형외과원장
1996년 《수필과비평》등단
조선일보 ‘의학칼럼’ 연재(2010)

수필집 「개나리꽃을 아시나요」

대구문인협회, 대구수필가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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