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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공광규 시인

부흐고비 2019. 11. 17. 01:30

 

소주병 / 공광규 술병은 잔에다/ 자기를 계속 따라 주면서/ 속을 비워 간다// 빈 병은 아무렇게나 버려져/ 길거리나/ 쓰레기장에서 굴러다닌다// 바람이 세게 불던 밤 나는/ 문 밖에서/ 아버지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나가 보니/ 마루 끝에 쪼그려 앉은/ 빈 소주병이었다//

 

공광규 시인은

1960년 서울 돈암동에서 태어나 충남 청양에서 성장했다. 
동국대 국문과 및 단국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
,
1986
년 월간 동서문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하였다.

시집으로 대학일기』 『마른 잎 다시 살아나』 『지독한 불륜』 
소주병』 『말똥 한 덩이,
아동전기 성철스님은 내 친구』  『윤동주,
시론집 시 쓰기와 읽기의 방법등이 있다.

신라문학대상, 윤동주 문학상, 동국문학상, 김만중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을 수상
계간
내일을 여는 작가편집위원 겸 불교문예편집주간


별국 / 공광규 

가난한 어머니는/ 항상 멀덕국을 끓이셨다// 학교에서 돌아온 나를/ 손님처럼 마루에 앉히시고// 흰 사기그릇이 앉아 있는 밥상을/ 조심조심 받들고 부엌에서 나오셨다.// 국물 속에 떠 있던 별들// 어떤 때는 숟가락에 달이 건져 올라와/ 배가 불렀다.// 숟가락과 별이 부딪히는/ 맑은 국그릇 소리가 가슴을 울렸는지// 어머니의 눈에서/ 별빛 사리가 쏟아졌다.// 

 

손가락 염주 / 공광규 

밥상을 차리고 빨래를 주무르고/ 막힌 변기를 뚫고// 아이들과 어머니의 똥오줌을 받아내던/ 관절염 걸린 손가락 마디// 이제는 굵을 대로 굵어져/ 신혼의 금반지도 다이아몬드 반지도 맞지가 않네// 아니, 이건 손가락 마디가 아니고 염주알이네/ 염주 뭉치 손이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아내는 손가락에 염주알을 키우고 있었네//

 

걸림돌 / 공광규

잘 아는 스님께 행자 하나를 들이라 했더니/ 지옥 하나를 더 두는 거라며 마다하신다/ 석가도 자신의 자식이 수행에 장애가 된다며/ 아들 이름을 아예 장애라고 짓지 않았던가/ 우리 어머니는 또 어떻게 말씀하셨나/ 인생이 안 풀려 술 취한 아버지와 싸울 때마다/ “자식이 원수여! 원수여!” 소리치지 않으셨던가/ 밖에 애인을 두고 바람을 피우는 것도/ 중소기업 하나 경영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고 한다/ 누구를 들이고 둔다는 것이 그럴 것 같다/ 오늘 저녁에 덜 돼먹은 후배 놈 하나가/ 처자식이 걸림돌이라고 푸념하며 돌아갔다/ 나는 못난 놈! 못난 놈!” 훈계하며 술을 사주었다/ 걸림돌은 세상에 걸쳐 사는 좋은 핑계거리일 것이다/ 걸림돌이 없었다면 인생의 안주도 추억도 빈약하고/ 나도 이미 저 아래로 떠내려가고 말았을 것이다//

 

염소 브라자 / 공광규

북쪽에서는 염소가/ 브라자를 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웃으려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사람이 먹어야 하니까/ 젖을 염소 새끼가 모두 먹을까봐/ 헝겊으로 싸맨다는 것이다// 나는 한참이나 심각해졌다가/ 그만 서글퍼졌다/ 내가 남긴 밥과 반찬이 부끄러웠다//

 

덕유산 / 공광규

산정에 오르면 오를수록/ 초록은 키를 낮추고 있다// 벼락맞아 부러진/ 능선의 키 큰 고사목들// 신문 방송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고관대작들 벼락맞는 이유를 알겠다// 높이 올라가더라도/ 절대 까불지 말고// 척박한 고지에서/ 키를 낮추고 견뎌야겠다//

 

새싹 / 공광규

겨울을 견딘 씨앗이/ 한 줌 햇볕을 빌려서 눈을 떴다/ 아주 작고 시시한 시작// 병아리가 밟고 지나도 뭉개질 것 같은/ 입김에도 화상을 입을 것 같은/ 도대체 훗날을 기다려/ 꽃이나 열매를 볼 것 같지 않은// 이름이 뭔지도 모르겠고/ 어떤 꽃이 필 지 짐작도 가지 않는/ 아주 약하고 부드러운 시작//

 

수종사 풍경 / 공광규

양수강이 봄물을 퍼 올려/ 온 산이 파랗게 출렁일 때// 강에서 올라온 물고기가/ 처마 끝에 매달려 참선을 시작했다// 햇볕에 날아간 살과 뼈/ 눈과 비에 얇아진 몸// 바람이 와서 마른 몸을 때릴 때/ 몸이 부서지는 맑은 소리//

 

속 빈 것들 / 공광규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것들은 다 속이 비어 있다// 줄기에서 슬픈 숨소리가 흘러나와/ 피리를 만들어 불게 되었다는 갈대도 그렇고/ 시골집 뒤란에 총총히 서 있는 대나무도 그렇고/ 가수 김태곤이 힐링 프로그램에 들고 나와 켜는 해금과 대금도 그렇고/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회의 마치고 나오다가 정동 길거리에서 산 오카리나도 그렇고// 나도 속 빈 놈이 되어야겠다/ 속 빈 것들과 놀아야겠다//

 

담장을 허물다 / 공광규

고향에 돌아와 오래된 담장을 허물었다/ 기울어진 담을 무너뜨리고 삐걱거리는 대문을 떼어냈다/ 담장 없는 집이 되었다/ 눈이 시원해졌다// 우선 텃밭 육백 평이 정원으로 들어오고/ 텃밭 아래 사는 백 살 된 느티나무가 아래 둥치째 들어왔다/ 느티나무가 그늘 수십 평과 까치집 세 채를 가지고 들어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벌레와 새 소리가 들어오고/ 잎사귀들이 사귀는 소리가 어머니 무릎 위에서 듣던 마른 귀지 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하루 낮에는 노루가/ 이틀 저녁엔 연이어 멧돼지가 마당을 가로질러 갔다/ 겨울에는 토끼가 먹이를 구하려 내려와 밤콩 같은 똥을 싸고 갈 것이다/ 풍년초꽃이 하얗게 덮은 언덕의 과수원과 연못도 들어왔는데/ 연못에 담긴 연꽃과 구름과 해와 별들이 내 소유라는 생각에 뿌듯하였다// 미루나무 수십 그루가 줄지어 서 있는 금강으로 흘러가는 냇물과/ 냇물이 좌우로 거느린 논 수십만 마지기와/ 들판을 가로지르는 외산면 무량사로 가는 국도와/ 국도를 기어다니는 하루 수백 대의 자동차가 들어왔다/ 사방 푸른빛이 흘러내리는 월산과 청태산까지 나의 소유가 되었다// 마루에 올라서면 보령 땅에서 솟아오른 오서산 봉우리가 가물가물 보이는데/ 나중에 보령의 영주와 막걸리 마시며 소유권을 다투어볼 참이다/ 오서산을 내놓기 싫으면 딸이라도 내놓으라고 협박할 생각이다/ 그것도 안 들어주면 하늘에 울타리를 쳐서/ 보령 쪽으로 흘러가는 구름과 해와 달과 별과 은하수를 멈추게 할 것이다// 공시가격 구백만 원짜리 기울어가는 시골 흙집 담장을 허물고 나서/ 나는 큰 고을의 영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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