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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안씨의 공부 / 윤제림

부흐고비 2018. 8. 15. 12:26

 

 

 

안씨의 공부 / 윤제림


 

 

己亥生 안씨 할머니가 이제 와서 한글을 깨쳐 보겠다고 검정고시학원에 딸린 한글반 학생이 된 까닭은 전주 가는 버스를 탔는데 진주에 부려지고 싶지 않아서다. 아니, 어느 날 저승에 가서도 그럴까 더럭 겁이 나서다. 거기선 글자 하나 잘못 읽으면 영판 엉뚱한 세상으로 간다지 않는가. 길 한 번 잘못 들면 한 칠만팔천 리쯤 엇나가서, 고쳐 잡자면 이천삼백 년쯤 걸린다지 않는가.

한글공부가 쉬이 끝나면, 한자도 조금 익혀 볼 생각이다. 그 나라 공문서는 아무래도 한자가 많이 섞여 있을 것 같아서다.


 


[해설]

 

할머니 걱정 마세요. 전주에 가려다 진주에 부려지는 일 없으실 거예요. 물론 상주에 가려다 성주에 부려져서도 안 되겠지요. 더구나 저승 가서도 잘못 부려진다면 큰일이지요. 그러나 저승길이 멀고 험하다지만 할머니처럼 삶을 예비하시는 분은 절대 잘못 부려지는 일 없으실 거예요.

많이 배우고 똑똑하다는 젊은이들도 걸핏하면 헷갈리곤 하거든요. ‘사랑해’라고 보낼 문자 메시지를 ‘사망해’라고 잘못 보낸 경우나, ‘너 지금 심심해’라는 문자를 ‘너 지금 싱싱해’라고 실수를 해서 애인으로부터 호되게 낭패를 당한 경우가 있었다지요. 초등학생 영어반 조카도 다급하면 곧장 키친과 치킨이 헷갈린다니 이 정도는 일상인가 봐요.

그러니 할머니 아무 걱정 마세요. 己亥生이면 할머니 올해 일흔일곱, 요즘 평균수명이 늘어 한창 아니신가요. ‘한글반’에 가시거든 어두운 눈 활짝 뜨고 지금껏 못 본 세상 맘껏 꽃피우세요. 한자 꽃도 피우세요. 그리고 행복하세요. (이규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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