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수필 읽기

한 걸음 / 이진숙

부흐고비 2019. 12. 4. 11:09

한 걸음 / 이진숙
2019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토오옥, 토오옥.

봉황산 밑에서 깨 터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저기 엄마가 계시는구나, 비틀거리는 발걸음이 더욱 바빠진다. 예전 같으면 한걸음에 갔을 텐데…. 뇌경색으로 퇴원한 지 일주일. 아직은 마음을 안 따라주는 몸이다. 부르르, 부르르, 트리를 불고 혀를 잘근잘근 씹어본다. 다시 천천히 힘을 모아 한 걸음 한 걸음 엄마 숨결을 향해 발을 옮긴다.

바람의 무게가 느껴진다. 한 걸음.

탱자나무 울타리를 지난다. 샛노랗게 달린 열매에서 향긋한 향이 흘러나온다. 향의 소리도 가을 하늘만큼 상큼하고 신선하다. 어린 날의 추억이 슬그머니 기지개를 편다. 날카로운 가시를 피해가며 잘 익은 탱자 하나를 따서 입 안에 넣었다. 눈이 찡긋해질 만큼 새콤달콤한 맛이다. 동글동글 씨앗들이 한입 가득 남는다. 후루루 퉤, 입안이 알싸하다. 코끝까지 개운해진다. 엄마는 그것을 뒷마루에 말려두었다가 우리가 고뿔이라도 걸릴 양이면 화롯불에 약탕기를 올려놓고선 내내 달였다. 그런 날은 달빛조차 환했다.

하늘을 올려다본다. 다시 한 걸음.

발이 돌에 걸려 삐끗했다. 작은 돌멩이에도 이젠 균형을 잃는다. 발밑을 조심하며 걸음을 옮기는데 질경이가 밟혔다. 엄마는 이것을 소달구지 밑에서도 살아남는 배짱 좋은 녀석이라고 했다. 길가에 흔한 풀로 산에서 길을 잃으면 질경이를 따라가라고도 말씀하셨다. 그러나 나에게 질경이는 고소한 냄새로 남아있다. 엄마는 그것을 끓는 물에 데쳐 간장 넣고 조물거리다가 참깨를 뿌리고 들기름을 살짝 쳐서 무쳐 주시곤 하셨다. 지금도 그 고소함이 땅에 납작 엎드린 잎에 묻어 있다. 갈색이 되어가는 씨앗들도 대글대글 영글어 있다. 무르익어가는 것이다. 나도 이처럼 잘 익을 수 있을까? 오십 초반에 갑작스레 찾아온 뇌경색은 앞만 보고 달려온 나에게 쉼표를 허락하는 선물임을 확신한다. 이렇게 한 걸음에도 5초 이상 감상할 수 있는 여유를 누릴 수 있으니 말이다.

잠포록한 날씨다. 또 한 걸음.

한 해를 달려온 엄마, 그녀의 마지막 숙제인 배추밭을 지난다. 일렬로 길게 뻗은 밭이랑에 진녹색 배추가 예닐곱 겹의 속살을 채워가고 있다. 김장철이 오면 노랗게 속이 찬 배추가 토방 가득 쌓이겠지. 배추를 네 조각으로 가르고, 그것을 소금에 절여 한밤을 재울 것이다. 품앗이 온 이웃 아주머니들과 무채를 치며 밤새는 줄 모를 것이다. 참깨 볶는 향이 진동하고, 시원한 배와 사과, 생강과 마늘, 대파, 양파의 매콤함과 달큼함이 온 마당을 차지할 것이다. 찹쌀 풀을 쑤어 태양초 고춧가루와 섞은 후 설탕 대신 홍시를 넣고, 까나리 액젓과 새우젓, 온갖 양념거리를 한데 섞어 버무리면 양념 준비는 끝이다. 마당에 멍석을 깔고 동네 아주머니들은 삼삼오오 배추에 빨간 양념을 입히며 시집간 딸 이야기와 갓 태어난 손주 이야기로 꽃을 피우시겠지. 부엌에선 보쌈 익는 냄새가 구수하고, 갓 버무린 배추김치를 손으로 죽죽 찢어 깨소금 듬뿍 묻혀서 고기 한 점을 싸 먹으면 겨울의 매운바람도 시어머니의 독한 시집살이도 모두 고소한 추억으로 변화될 것이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두부를 가운데 놓고 한 입 두 입 김치와 곁들여 먹는 재미도 뺄 수 없다. 편하고 빠른 것만을 추구하는 나는 김장문화가 변질되고 있는 이 시대에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

또 한 걸음, 다시 한 걸음.

고구마를 캐내고 벌겋게 속살을 드러낸 황토가 보인다. 무더기무더기 된서리를 맞은 고구마 순들은 축축 늘어져 있다. 그 옆으로 노란 호박이 하나, 둘, 셋…. 여덟 덩이나 달려 있다. 늙은 호박을 갈아서 부침개를 해 먹고, 호박죽을 쑤었던 그 날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친다. 우리 여덟 남매와 작은집 여섯, 고모네 여덟 남매를 책임졌던 엄마의 식사 준비에 호박죽이 최고였다. 언니들과 나는 빙 둘러앉아 한 나절 내내 달챙이 숟가락으로 껍질을 긁고 속을 파냈다. 호박씨는 깨끗이 씻어 채반에 말렸다가 백산을 만들 때 고명으로 쓸 것이다. 뭉텅뭉텅 토막 낸 호박을 큰 가마솥에 넣고 기다란 나무주걱으로 저으면서 끓여준다. 거기에 불린 찹쌀을 학독(돌확)에 갈아서 부어준다. 불렸다가 삶은 붉은 팥도 넣으면 궁합이 제격이다. 한참을 젓다 보면 몽글몽글 밝은 주황빛 죽이 된다. 어우렁더우렁 조화를 이루며 살던 배부른 가난이 해결되는 순간이다. 찹쌀 새알을 넣어 끓인 뜨끈한 호박죽을 생각하며 한 걸음에 힘을 모아 다시 발을 옮긴다.

툭, 툭, 툭.

엄마가 보인다. 토독, 토독, 토도독, 산 그림자가 짙게 내려와 누운 봉황산 자락에 깨 쏟아지는 소리가 들린다. 거무죽죽하게 마른 들깨 더미가 산처럼 쌓여 있다. 은행나무에 기댄 채 돌아앉아 깨를 터는 엄마의 뒷모습은 작고 쓸쓸하였다. 머리카락을 감싼 하얀 수건엔 검불이 쉬고, 웅크린 등으로 고단한 가을바람이 끙끙거리며 지나간다.

내가 다가서는 것도 모른 채 긴 막대기로 깨를 터는 구순의 엄마. 십 년 전 먼저 떠난 남편의 빈자리, 그 허전함을 애써 털어낸다. 톡톡, 여기저기 흩어져 사는 자식들을 향한 그리움이 한 보따리 털어진다. 먼저 가버린 큰아들에 대한 애증이 또 한 보따리 쏟아진다. 진안 성수면 봉황산자락 상수리나무도 노랗게 다홍으로 물들어 가는데 돌아온다는 소식이 없는 이들을 부르는 소리다.

나는 아픈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고 허리를 세우고 웃음으로 입 꼬리를 올린다. 솔음으로 엄마를 불러본다.

“엄…, 마…, 엄마!”

소리는 울음을 먹고 잠긴다. 쪼그라든 엄마의 품으로 달려가고 싶지만, 발길이 옮겨지지 않는다. 엄마의 깨 터는 소리는 여전히 봉황산에서 놀고, 엄마의 지게에 근심 한 짐을 더 지울 나는 한숨처럼 발길을 돌린다. 내 소리를 더 키워서 와야지. 내 걸음에 힘이 실리면 저 깨를 같이 털어야지. 고단한 엄마의 걸음에 힘을 주는 막내가 되어야지. 무수히 떨어지는 저 근심 덩어리가 웃음소리가 되기를 빌면서 하늘을 올려다본다. 들깨의 고소한 향이 한 걸음 앞서 걸어가고 있다.


▶ 당선소감


또 하나의 기적이 내게로 왔다. 당선 소식을 듣는 순간 막혔던 혈관들이 모두 열리고 두 눈이 맑아짐을 느낀다. 웃고 또 웃었다. 오선지에 가장 높은 음까지 올라간 목소리는 내려올 줄을 모른다.

십 년 전부터 최명희의 「혼불」을 통해 그녀를 만나면서 묘사의 묘미를, 토박이말의 정겨움과 고유어의 속살거림을, 사라지는 전통 복원의 열정을, 역사를 재조명할 수 있는 혜안을, 우는 어깨를 다독일 줄 아는 심성과 어두운 곳에 소외된 것들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동경해왔었다. 이제 미흡하나마 그녀의 발자국을 한 걸음 한 걸음 따라갈 수 있을까? 두려움과 기대감이 교차된다.

감사할 은인들이 너무 많다. 곁에서 응원해준 남편과 아이들. 기름을 부어준 박정희 선생님, 경희 언니와 정민이 그리고 나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신 어머니와 가족들 모두가 감사할 따름이다.

끝으로 나의 나 된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며 부족한 글에 날개를 달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전북일보에 무한한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어머니께서 즐겨 쓰시는 말로 들뜬 마음을 마무리하련다.“하도 좋아. 하도 좋아”

△이진숙: 1965년 전북 출생.1989~2000년 고교 국어교사로 재직, 우석대평생교육원·조선대평생교육원 독서지도전문강사, 최명희문학관 전문위원


​ ▶ 심사평


예선을 거쳐 본선에 오른 작품은 30편이었다. 3편을 응모한 사람이 4인이고 나머지 9인은 2편씩 응모했다. 응모자들의 나이는 중년층 이상인 것으로 판단되었고, 일상적인 생활경험을 다룬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글쓰기의 수준은 높은 편이었다. 소재를 다루는 솜씨와 그것을 문학적 언어로 표현하는 능력, 그리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자연스러운 서사적 진행에 초점을 맞추어 최종심 대상으로 3편의 작품을 선별했다.

‘속긋을 긋다’와 ‘붉은 잠망의 시간’과 ‘한 걸음’은 글쓰기의 내공이 느껴지는 수작(秀作)들이다. 이 3편 모두 사물에 대한 감각과 자신의 경험을 통합하여 서술하는 능력, 글의 속도감과 긴장감, 서사적 진행의 자연스러움, 어휘 활용의 적절성과 소재를 풀어내는 노련함이 돋보였다.

세 응모자의 또 다른 작품들도 당선작을 선정하는데 참고했다. 응모자 작품들을 면밀하게 다시 읽고 문학적 역량과 작가적 발전 가능성 등을 검토한 결과 ‘한 걸음’을 선정했다. 이 작품을 응모한 사람의 작품이 다른 두 명의 응모작들에 비해 글쓰기의 정치함과 감성적 호소력의 측면에서 우수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한 걸음’은 소재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하여 언어로 풀어내는 힘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특히 뇌경색으로 입원했다 퇴원한 화자-딸이 “힘을 모아 한 걸음 한 걸음 엄마의 숨결을 향해 발을 옮”기는 대목들이 인상적이었다.

현재의 입장-상황에서 ‘고향의 풍경과 어머니의 숨결’을 여러 감각들을 동원하여 통합적으로 서술하고 표현하는 솜씨가 수준 이상이었다. 정제된 문장구성과 언어구사 능력도 뛰어난 편이었다. 고향의 실체가 사라져가는 시대에 ‘어머니와 고향을 감각적 이미지’로 부활시켜 향수감을 자극한 점도 ‘한 걸음’이 지닌 미덕이다.

‘멈춤과 쉼, 그리고 여유’를 되새기며 ‘실존(實存)의 깊은 의미’를 진지하게 성찰한 이 응모자의 또 다른 작품인 ‘초짜드막(잠깐 동안)’도 ‘한 걸음’을 당선작으로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선을 축하하며 긍지와 자부심을 지닌 작가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 전정구 문학평론가

'수필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복숭아씨 / 박혜자  (0) 2019.12.04
나의 부족한 언어로 / 박하림   (0) 2019.12.04
수탉의 도전 / 이인숙  (0) 2019.12.03
마디 / 안희옥  (0) 2019.12.03
연잎밥 / 조경숙  (0) 2019.12.03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