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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마디 / 안희옥

부흐고비 2019. 12. 3. 23:38

마디 / 안희옥1
제12회 2019 영주신춘문예2 당선작


하늘 향해 뻗은 대나무의 기상이 옹골지다. 미끈한 몸매에 둥근 테를 두르고 서 있는 모습은 흡사 초록 옷을 입은 병사들의 열병식을 방불케 한다. 이따금 간들바람이 푸른 대숲을 훑고 지나간다. 무성한 댓잎 사이로 신기루처럼 일어나는 햇살에 눈이 부신다.

굵은 대나무가 길을 가로막는다. 두 손으로 감싸 쥐니 손안에 가득 찬다. 매끄러운 줄기 사이, 마디가 껄끄럽다. 볼록한 부분은 특별히 다른 곳에 비해 단단하고 힘이 있다. 대나무는 기후가 나쁘거나 수분이 부족할 때 성장을 멈추고 힘을 모은다고 한다. 이때 생기는 것이 마디다. 성장판을 닫고 힘을 비축한 뒤 기회가 되면 다시 커간다. 이런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대나무는 휘지 않고 곧고 높이 자랄 수 있는 것이다.

아들 귀한 집안의 다섯째 딸로 태어난 여동생은 그 아래로 남동생이 태어나자, 다른 형제들에 비해 귀한 대접을 받았다. 할머니는 터를 잘 팔아 대를 잇게 해 주었다며 동생을 추켜세웠고, 잘못된 행동을 해도 크게 나무라지 않았다. 할머니의 특별한 사랑 때문인지 동생은 어릴 때부터 고집이 세고 자기주장이 강했다.

대나무가 한창 클 때는 한 시간 동안 자라는 속도가 삼십년간 자라는 소나무 속도와 맞먹는다고 한다. 생장점이 많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대부분의 나무들은 줄기 끝에만 생장점이 있는데, 대나무는 마디마다 생장점이 있다. 그러나 줄기의 벽을 이루는 조직은 엄청나게 빨리 늘어나는 반면 내부성장은 느려서 속이 텅 비게 된다.

조실부모하고 사고무탁한 청년과의 결혼을 집안에서 극구 반대했지만 동생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모두들 아무 탈 없이 잘 살아 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가족의 걱정은 기우였다. 동생의 결혼생활은 순탄했다. 제부의 사업은 승승장구했고 상류층 사람들과 친분을 쌓으며 자신의 영역을 넓혀 나갔다. 이 곳 저 곳 모임에서 익힌 세련된 매너와 옷차림에 자매들은 모두 부러워했다. 생활의 여유가 있으니 친정 식구들에게도 여러모로 도움을 주었다.

대나무 마디는 멈춤을 뜻한다. 중간에 잠시 쉬었다가 다시 자라면 더 쑥쑥 큰다. 대나무만의 특징이다. 중간에 마디가 형성되는 시기는 유난히 더디다. 그러나 그 마디들이 없다면 가늘기만 한 나무가 그렇게 높이 자랄 수 있을까. 잠시 정지해있는 듯 보이지만 그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의 시간이다. 멈춤이 없다면 진정한 성장도 없다는 교훈을 대나무에게서 얻게 된다.

언제까지나 이어질 것 같던 동생네의 행복이 암초에 부딪혔다. 기다리던 둘째 조카의 탄생을 가족 모두가 기뻐한 것도 잠시, 의료진의 불찰로 그만 하늘나라로 보내고 말았다. 온 세상을 다 가진 듯 넘쳐나던 웃음들이 연기처럼 사라져 갔다. 아이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가슴에 피멍이 들었다. 동생의 인생에 굵은 마디 하나가 생겼다.

설상가상으로 거침없이 질주하던 제부의 사업이 IMF를 맞으면서 또 한 번 위기를 맞았다. 무리한 사업 확장은 곳곳에 빚을 남겼고, 끝까지 지키려 했던 집마저 경매에 넘어갔다. 하루아침에 길가로 나앉은 신세가 되고 말았지만 어려움을 모르고 자란 터라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았다. 월세 단칸방에서 온 식구가 하루하루를 힘겹게 연명해 나갔다. 생활의 여유가 없다 보니 부부간 갈등도 심해 연일 큰소리가 담장을 넘었다. 사춘기에 접어든 큰아이도 점점 밖으로 나돌았다. 삶은 나날이 피폐해져 갔다.

혼다의 창업자 혼다 소이치로는 휴식을 ‘대나무의 마디’와 같다고 말한 바 있다. 마디가 있어야 대나무가 성장하듯, 사람에게도 쉼이 있어야 강하고 곧게 성장할 수 있다는 의미다. 드럼통은 최초, 표면에 아무런 굴곡 없이 매끈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작은 충격이나 굴릴 때 쉽게 찌그러졌다. 누군가 대나무 마디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드럼통 옆구리에 마디를 넣었더니 강도가 네 배나 강해졌다.

시간이 약이라 했던가. 지옥 같던 고통도 조금씩 사그라질 무렵, 새로운 생명이 태어났다. 예쁜 딸이었다. 아이는 동생네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딸이 태어나고부터 신기하게도 살림살이가 나아지기 시작했다. 집안에 다시금 웃음이 찾아왔다.

그것도 잠시, 잘 자라던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이 끝나갈 무렵, 뇌종양이란 큰 병에 걸렸다. 청천벽력이었다. 하늘을 원망하며 속울음을 삼키는 동생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내려앉았다. 강단 있고 패기 넘치는 모습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받고 있던 동생을 단단하게 버틸 수 있게 한 것은 바로 엄마라는 이름이었다. 아이를 위해 대나무처럼 마음을 비우고 낮은 자세로 임했다. 조그마한 일에도 감사하고 인내하는 삶을 살았다. 그러자 아이의 병도 조금씩 나아져 갔다.

시원스레 하늘로 솟구친 대나무 숲은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죽순이 돋아나고 성장할 때까지 그 음습한 땅 속에서 수년 간 뿌리를 내리는 과정을 거친다. 뿌리가 깊기 때문에 쉽게 쓰러지지 않는다. 속이 빈 채 커 나가는 대나무로서는 반드시 필요한 인고의 세월이다.

대나무는 허허실실이다. 속이 빈 것이 허라면 밖이 단단한 것이 실이다. 내강외유다. 속은 허술해 보이지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더 강하다. 속을 비워 내지 않으면 단단한 마디를 만들 수 없다는 걸 가르쳐준다. 삶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순탄하게 잘 흘러가다가 어느 순간 시련이 닥치곤 한다. 시련은 곧 마디다. 넘어지면 실패가 되고 말지만 그것을 극복하면 승화가 된다. 시련은 크고 강하게 되기 위한 일종의 통과의례다. 작은 일에도 쉽게 절망했던 나의 나약함에 대해 반성해본다.

마디를 가만히 만져 본다. 매끄러운 몸통에서 따뜻함이 느껴진다. 믿음직스럽게 자리 잡은 마디 사이로 봄기운이 가득하다. 대나무 숲 사이로 환하게 웃는 동생의 얼굴이 떠오른다.

  1. 안희옥: 합천 출생. 동리목월 문예창작대학 수료(2012). 동서문학상 수필부문 은상(2012). 공무원문예대전 수필부문 금상 (2017). 천강문학상 수필부문 우수상(2018). 동화집 「호미곶 돌문어」공저 (2014) [본문으로]
  2. 영주신춘문예는 제주 인터넷신문 영주일보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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