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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잘 쓴 시와 좋은 시의 사이 / 나호열

by 부흐고비 2019. 12. 17.

[시] 잘 쓴 시와 좋은 시의 사이 / 나호열


1.

어느 사람은 시를 잘 쓰고 싶다고 비법을 묻고 어느 사람은 좋은 시를 쓰고 싶다고 말한다. 비슷한 듯 하면서도 다른. ‘잘 쓴 시’와 ‘좋은 시’의 개념을 명쾌하게 설명할 수는 없으나 나름 생각하기를 시를 잘 쓴다는 것은 재기才氣가 바탕을 이루는 것이고 ‘좋은 시’는 시대를 초월해서 만인에게 감명을 주는 시라고 해보는데 이 또한 부족함이 남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두 개념 간에는 공통점이 전혀 없는 것일까? 다른 면으로 생각을 바꿔보면 ‘잘 쓴다’는 것은 창작자가 의도한 한 바대로 수월하게 작품이 완성된다는 것이고 ‘좋은 시’는 완성된 작품이 독자들에게 의식의 전환을 이룰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 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본다면 시를 잘 쓰는 행위와 좋은 시의 탄생 사이에는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던 통념의 어긋남을 감지할 수도 있겠다. 시를 다루는 능숙함이 좋은 시를 쓰는데 충분조건은 될 수는 있겠지만 그 전부는 아닐 것이며, ‘좋은 시’의 개념도 각각의 독자들의 성향과 지적 감수성의 여부에 따라 달라질 것이기 때문에 쉽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시인들은 자신들의 의도대로 어떻게 작품을 완성할 것인가에 몰두해야 할 것이며 미리 독자들의 선호를 추측하고 예감하는 글쓰기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여진다.

한 마디로 작품(시)의 성패는 그 작품의 독창성에 있다. 주제의 새로움, 그 주제를 형상화하는데 필요한 소재의 참신한 묘사와 구성이 조화를 이룰 때 창작創作의 실체는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시인들이 눈여겨보았던 주제나 소재는 보편적 실체로서 새로움을 표현하는데 어려움을 가져온다. 자연, 이를테면 나무, 꽃, 산과 강에 대한 완상玩賞, 반성과 회한悔恨의 상징처럼 되어버린 부모 등은 일반화된 상식의 범주에 놓이기 때문에 창작의 요소인 독창성, 개별성, 특수성을 두루 포용하기엔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한 편의 시작품 속에 용해되어 있는 시인의 특수성이라든가 독창적인 것, 그리고 참신성斬新性은 곧 시의 소재가 되는 어떠한 사물이나 대상의 객관적이고 보편적이고 일반적이고 지시적인 특성의 발견에서부터 시작되어 발견해낸 시인이 상상의 세계에서 창조된 새로운 시각의 예술품으로 재탄생한다. 따라서 참신한 시작품은 감상자로 하여금 새로운 눈뜸의 기회를 주어 신선한 충격과 함께 감동의 도가니에 휩싸이게 한다. 보편적으로 좋은 시작품이라 불리는 많은 시작품들이란 그 시작품이 가지는 참신성에서 결코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 구재기, 「무엇이 참신斬新한 것인가?」

시 창작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소재는 체험이다. 그러나 이 체험은 상식으로 일반화되기 쉽기 때문에 이 체험의 영역을 넓히는 상상 想像力이 요구된다. 체험(사실)을 바탕으로 하지만 시가 허구(Fiction)라고 정의하는 것은 이 상상력이 과학적 증명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시 속의 화자 話者가 시인의 의도를 드러내주는 개관적 자아기 될 때 시는 감성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2.

『산림문학』의 특성상 『산림문학』에 게제되는 시들은 자연의 속성과 자연에 대비되는 인간의 삶, 자연보호와 같은 범주에 속하는 작품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자연물에 대한 관찰과 애호愛好는 『산림문학』이 지향하는 목표와 부합하는 것이기에 앞으로도 더욱 창달暢達되어야만 하는 필연성을 띠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하기에『산림문학』(2018년, 겨울호)에도 이와 같은 흐름을 지닌 시들이 다수 보이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 들 작품들을 감상하면서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으니 예술은 결국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궁극적으로 예술이 꿈꾸는 항구적 열망은 존재의 의미를 되묻고 한 순간 소멸해 버리고 마는 것이 아니라 영원을 향해 열려있는 시각視覺이라는 점에서 몇 편의 시를 가려보게 되었다. 그렇다면 존재의 특성은 무엇일까? 첫 번째로 무소유를 들어본다. 흔히 불가佛家에서 이야기하는 무소유는 모든 생명체의 유기적 순환有機的 循環이다.

잎이 달렸던 자리
꽃이 피었던 자리
씨가 열렸던 자리
새가 앉았던 자리

비가 뿌리는 자리
눈이 내리는 자리
달이 머무는 자리
바람이 스친 자리

- 구자운, 「나뭇가지」 전문

이 시는 나뭇가지의 쓰임새에 주목하고 있다. 나뭇가지는 잎이 달리고 꽃이 맺히는 자리이지만 주목받을 만큼 눈에 띄는 소재는 아니다. 단순한 2연 구성의 구조 속에서 나무의 한 속성으로의 기능을 수행하는 수동적 존재로서 가리워졌던 존재의 의미가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1연에서는 다른 존재를 위해 기꺼이 제 몸을 내어주는 어머니의 마음이, 2연에서는 자신이 가질 수도 없고 머물지도 않는 타자他者들에게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는 무한한 사랑이 감추어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두 번째로 존재의 특성으로 드러나는 것이 본능의 아름다움이다. 맹자가 이르기를 ‘인간이 오로지 금수禽獸와 다른 것은 예禮를 아는 것일 뿐’이라고 하였다. 이 말을 오늘날 인간의 삶에 비추어보면 개만도 못한 추악한 인간들이 지닌 본능을 꾸짖는 말로 들리기도 한다. 금수들의 본능은 생명의 보전 이외에 다른 것은 없다. 금수들의 본능에 어디 탐욕이 깃들어 있는가? 높은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새끼오리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인간이 지닌 본능을 예禮로서 다스리려고 했던 인간의 슬픔을 되이게 된다.

어미 오리 뒤에 새끼 오리들이 뒤따른다 줄 맞추어 가듯 가다가 어미가 밑으로 뛰어내리면서 꽥, 꽥 새끼들이 자기들 키의 수십 배는 족히 되는 낭떠러지를 지남철에 달라붙듯 잽사게, 아무 거리낌 없이 뛰어내린다
뛰어내렸다!

그 순간에는,
어떤 이념도
어떤 틈도 없었고
시간도 멈추었었다

- 오형근, 「꽥,꽥」 전문

세 번째로 존재의 특성을 이진옥 의「고비사막」에서 찾는다. 사막은 말 그대로 불모지不毛地이다. 살아 있는 것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과연 그럴까? 존재는 살아있음도 아니고 죽음도 아니다. 존재의 필요조건인 ‘있다’와 ‘이다’는 사실 허무한 환상이다. 살아 있음이 존재의 전부가 아닌 까닭에 죽어 있음 또한 존재에 편입될 수 있다. 사막은 죽어 있을 뿐이지 죽음 그 자체는 아니지 않은가!

이곳은 이방의 행성입니다

바람도
모래도
여자도
하늘을 향해 누웠습니다

모래에 몸을 누인지
어느덧 백만 년이 흘렀습니다

바람이 일어나 노래를 부릅니다
모래가 바람의 뒤를 따릅니다
눈을 감은 여자가 새소리를 듣습니다
사막의 바람은 날아가는 새의 영혼입니다

시「고비사막」은 인간이 이름 지은 모든 실체를 ‘사막’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수렴한다. 사막에 사는 낙타가 오래 전 초원에 살던 힘없는 초식동물이었던 것을 기억하자. 사막은 맹수들의 먹이가 되고 쫓겨 다녔던 낙타의 낙원이다. 60년대 상영되었던 영화를 기억하자. 《사막은 살아 있다》 !

구경꾼이 되어 연신 카메라를 눌러댄다

가젤의 심장이 아직 뜨거울 것 같은
적나라한 현장
내장을 드러낸 채
가늘고 긴 다리가 하늘로 뻗쳐 있다
가젤의 처절한 생은 지금 막을 내리는 중이다

밥상을 독차지하고 막 식사를 시작한 표범은
구경꾼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고
허기를 채우는 작업에 진지하고 충실하다

누구도 잘못한 게 없는데
시큰한 코끝

평화로워 보이는 광활한 초원
가젤이 조금 전까지 뛰어다닌 풀 위로
뉘엿뉘엿 붉은 해가 눕는다

구경꾼들은 대박이라며 좋아했다
가젤은 죽었는데

네 번째 존재의 특성은 평등이다. ‘자연은 인간을 추구芻狗로 여긴다.’는 노자老子의 언명은 인간이 제멋대로 구획하고 계급화한 문명을 거부해야 하는 당위성을 강조한다. 세렝게티는 모든 동물들이 서로 먹고 먹히는 자연 생태계의 보고寶庫이다.

한경의「세링게티 초원에서」는 세렝게티 초원을 여행하며 목도한 풍경을 이야기하고 있다. 「고비사막」에서 드러나 있듯이 초원 또한 그 자체로 생명이고 무덤이다. 여행객의 눈에 세렝게티는 아름다운 풍경이지만 원주민이나 그곳에 깃들어 사는 생물들에게는 집이며, 무덤이며, 지옥이며 천국이다. 백수百獸의 왕이라 불리는 사자의 어린 새끼는 물소들의 발에 짓밟혀 죽거나 하이에나의 먹이가 되기도 한다. 가젤은 표범에게 단지 먹이에 불과할 뿐 애증의 대상이 아니다. 「세링게티 초원에서」가 전해주는 시의 의미는 마지막 행에 있다. ‘구경꾼들은 대박이라며 좋아했다 / 가젤은 죽었는데’. 이 마지막 구절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인간의 폭력성과 관음증觀淫症을 토로하는 것으로 의미를 다하는 것일까? 그 여백을 메꾸는 것은 독자들의 몫이다.

3.

「나뭇가지」, 「꽥,꽥」, 「고비사막」, 「세링게티 초원에서」는 일반화되어 좀처럼 진부함을 벗어날 수 없는 소재를 통해 우회적으로 존재의 의미를 캐묻는 사유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성공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작품들과는 다른 측면에서 진부한 소재를 재미있는 이야기로 풀어내는 한 편의 시가 주목을 끈다. 최금녀의 「한겨울 나무마을에 간다」는 나무를 의인화 擬人化하는 일반적 서정시의 기법을 활용하면서도 일방적으로 화자 話者가 ‘나무’라는 대상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숲을 ‘나무마을’ 로 명명하고 인간사人間事와 다름없는 나무들의 성쇠 盛衰를 대화하듯 풀어내는 유쾌함이 돋보이는 작품이라고 보여진다.

나무마을로 간다
키가 큰 잣, 리기타, 상수리, 느릅
그 아래 작은 집 한 채씩 짓고 사는
산뽕, 살매, 산죽, 다릅

이 겨울 나무마을은
하나같이 독한 마음으로
머리털 깎고 선방 禪房에 들어갔다

눈도 그 동네 눈은 참선을 한다
나뭇가지에 앉았다가 슬그머니
땅으로 내려와 가부좌를 튼다

깎지 못하는 머리털을 이고
나는 나무마을로 간다

비탈진 쪽으로 뿌리 버팅겨 섰던
뿌리의 등허리, 흙 밖으로 불거졌던
등 시린 나무
이 추위 어떻게 지내는지,
중심은 아직 튼튼한지
작년 봄, 옆구리 여기저기에
링거 줄 매달고 중환자였던 고로쇠나무,
입춘은 가까워오는데 또 어쩐다?

오늘 눈이나 마음 푸근하게 쏟아져
여린 싹들도 눈이불 다 덮어주고
관자놀이에 심줄 돋은 뿌리와
못자국이 험한 고로쇠도
푹 덮어주었으면 좋겠다

선방 나무들도 동안거 해제 解制하고
숲으로 뛰어나와 두 팔 벌리고
하늘이 내려주는 복을 받으며 기뻐하리라

- 최금녀, 「한겨울 나무마을에 간다」 전문

4.

창작은 새로움을 첫 번째 덕목으로 삼는다. 주제나 소재의 새로움, 새로운 기법의 형상화가 이에 해당된다. 그러나 반드시 새로운 것이 최선이 아니라는 사실을 요즘의 난해한 경향의 시들을 만나면서 느끼게 된다. 부재승덕不才勝德, 재능을 뽐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섣불리 독자들을 교화敎化하겠다는 욕심 또한 시인들이 버려야 할 덕목이 아닐까.

계간 『산림문학』 2019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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