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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반칠환 시인

부흐고비 2021. 1. 8. 11:51

 

새해 첫 기적 

 

황새는 날아서

말은 뛰어서

거북이는 걸어서

달팽이는 기어서

굼벵이는 굴렀는데

한날 한시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

 

바위는 앉은채로 도착해 있었다

 

 

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

보도블록 틈에 핀 씀바귀 꽃 한 포기가 나를 멈추게 한다/ 어쩌다 서울 하늘을 선회하는  제비 한두 마리가 나를 멈추게 한다/ 육교 아래 봄볕에 탄 까만 얼굴로 도라지를 다듬는 할머니의 옆모습이 나를 멈추게 한다/ 굽은 허리로 실업자 아들을 배웅하다 돌아서는 어머니의 뒷모습은 나를 멈추게 한다/ 나는 언제나 나를 멈추게 한 힘으로 다시 걷는다.//

 

오래 아주 오래 / 반철환

우주적 연대감 이어준 나는 너다’/ 나비는 날개가 무거워 바위에 쉬어 앉았다/ 평생 꿀 따던 꽃대궁처럼 어지럽지 않았다/ 바위 등판에 밴 땀내도 싫지 않았다.// 달팽이 껍질에 무서리 솟던 날/ 마지막 빈 꽃 듣던 바로 그 다음날/ 바람은 낙엽인 줄 알고 나비의 어깨를 걷어갔다// 나비의 몸은 삭은 부엽에 떨어져/ 제 주위의 지층을 오래 아주 오래 굳혀갔고/ 바위는 느리게 아주 느리게 제 몸을 헐어 가벼워졌다// 지금 저 바위는 그 나비다/ 지금 저 나비는 그 바위다/ 봐라, 나비 위에 갓 깬 바위가 앉아 쉬고 있다//

 

팔자 / 반칠환

나비는 날개가 젤루 무겁고/ 공룡은 다리가 젤루 무겁고/ 시인은 펜이 젤루 무겁고/ 건달은 빈 등이 젤루 무겁다/ 경이롭잖은가/ 저마다 가장 무거운 걸/ 젤루 잘 휘두르니//

 

먹은 죄 / 반칠환

새끼들에게 줄 풀벌레 잡아오던/ 지빠귀를 새매가 나꾸어 갔다/ 가까스로 허물 벗은 날개 말리던/ 잠자리를 물총새가 꿀꺽 삼켜 버렸다/ 오전에 돋은 새싹을 다람쥐가 갉아먹는다/ 그러나 어느 유족도 복수를 꿈꾸지 않는다/ 다 먹은 죄가 있기 때문이다/ 한없이 슬퍼도 적막한, 푸른 숲 속의 일이다//

 

야심 / 반칠환

불개미 한 마리가 덥썩 내 발가락을 물었다./ 온 힘을 다해 나를 잡아당긴다./ 여름 장마 오기 전에/ 나를 끌고 개미굴로 가려고…….//

 

/ 반칠환

저 요리사의 솜씨 좀 보게/ 누가 저걸 냉동 재룐 줄 알겠나/ 푸릇푸릇한 저 싹도/ 울긋불긋한 저 꽃도/ 꽝꽝 언 냉장고에서 꺼낸 것이라네/ 아른아른 김조차 나지 않는가//

 

두근거려보니 알겠다 / 반칠환

봄이 꽃나무를 열어젖힌 게 아니라/ 두근거리는 가슴이 봄을 열어젖혔구나// 봄바람 불고 또 불어도/ 삭정이 가슴에서 꽃을 꺼낼 수 없는 건/ 두근거림이 없기 때문// 두근거려보니 알겠다//

 

어떤 채용 통보 / 반칠환

아무도 거들떠보도 않는 저를 채용하신다니/ 삽자루는커녕 수저 들 힘도 없는 저를,/ 셈도 흐리고, 자식도 몰라보는 저를,/ 빚쟁이인 저를 받아주신다니/ 출근복도 교통비도, 이발도 말고 면도도 말고/ 입던 옷 그대로 오시라니/ 삶이 곧 전과(前過)이므로 이력서 대신/ 검버섯 같은 별만 달고 가겠습니다/ 미운 사람도 간다니 미운 마음도 같이 가는지 걱정되지만/ 사랑하는 사람도 간다니 반갑게 가겠습니다/ 민들레도 가고 복사꽃도 간다니/ 목마른 입술만 들고, 배고픈 허기만 들고/ 허위허위 는실는실 가겠습니다/ 살아 죄지은 팔목뼈 두개 발목뼈 두 개/ 희디희게 삭은 뼈 네 개쯤 추려/ 윷가락처럼 던지며 가겠습니다/ 도면 한 걸음, 모면 깡충깡충 다섯 걸음!/ 고무신 한 짝 벗어 죄 없는 흙 가려넣어/ 꽃씨 하나 묻어 들고 가겠습니다//

 

목격 -속도에 대한 명상 / 반칠환

질주하는 바퀴가/ 청개구리를 터뜨리고 달려갔다// 나는 한 생명이 바퀴를 멈추는데/ 아무런 제동도 되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한평생 / 반칠환

요 앞, 시궁창에서 오전에 부화한 하루살이는, 점심때 사춘기를 지나고, 오후에 짝을 만나, 저녁에 결혼했으며, 자정에 새끼를 쳤고, 새벽이 오자 천천히 해진 날개를 접으며 외쳤다. 춤추며 왔다가 춤추며 가노라.// 미루나무 밑에서 날개를 얻어 칠일을 산 늙은 매미가 말했다. 득음이 있었고 지음이 있었다. 꼬박 이레 동안 노래를 불렀으나 한 번도 나뭇잎들이 박수를 아낀 적은 없었다.// 칠십을 산 노인이 중얼거렸다. 춤출 일 있으면 내일로 미뤄두고, 노래할 일 있으면 모레로 미뤄두고, 모두 좋은 일은 좋은 날 오면 하마고 미뤘더니 가쁜 숨만 남았구나.// 그 즈음 어느 바닷가에선 천년을 산 거북이가 느릿느릿 천년 째 걸어가고 있었다.// 모두 한평생이다.//

 

바퀴 -속도에 대한 명상5 / 반칠환

우리는 너 나 없이 세상을 굴러먹고 다닌다/ 아버님, 오늘은 어디서 굴러먹다 오셨나요/ 아들아, 너는 어디서 굴러먹다 이리 늦었느냐/ 여보, 요즘은 굴러먹기도 예전 같지 않아요/ 이거, 어디서 굴러먹다 온 뼈다귀야// 바퀴를 타자 우리 모두 후레자식이 되어 버렸다//

 

시간을 뒤적이다 / 반칠환

시간을 뒤적이지 말걸 그랬다. 신학자가 시간을 뒤적이는 그 아까운 시간을 기도하는데 쓸걸 그랬다. 저 통계는 마치 느닷없이 들이닥친 손님 앞에 너절한 살림을 들킨 것처럼 당혹스럽다. 저 모든 시간을 더하니 661개월이다. 나머지 811개월은 개별적인 자유시간인가? 그 시간을 쪼개어 사랑을 하고, 싸움을 하고, 눈물도 흘리고, 웃음도 지었을 것이다. 우리는 저 평균치로부터 각각 얼마나 다른 자기만의 편차를 지니고 있는가? 시간의 다소가 중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매순간 달게 자고, 열심히 일하고, 즐겁게 보고, 맛있게 먹고, 설레며 줄 섰다면 저 통계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신에게 기도한 시간이 5개월이라니 얼마나 다행인가? 만약 반대로 747개월을 신에게 기도해야만 하고 나머지 5개월 동안 저 모든 일을 해야 한다면 진심으로 신을 경배할 자신이 당신에게 있는가? 신은 당신보다 우리의 삶에 경배할 시간을 더 많이 배려해 놓았으니 얼마나 자비로운가?//

 

꽃의 주소 /반칠환

식구들 발길에 채일 때는 끄떡없더니/ 일가족 떠나고 나니 오히려 문턱이 허물어지네/ 나부끼던 공과금 고지서도 끊긴 지 오래/ 담장에 번지수는 하릴없이 선명하다 하였더니/ 봄마다 벌 나비 배달부 찾아오는 꽃의 주소였네//

 

자벌레 / 반철환

한심하고 무능한 측량사였다고 전한다. 아무도 저이로부터 뚜렷한 수치를 얻어 안심하고 말뚝을 꽝꽝 박거나, 울타리를 치거나, 경지정리를 해 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딴에는 무던히 애를 썼다고도 한다. 뛰어도 한 자, 걸어도 한 자, 슬퍼도 한 자, 기뻐도 한 자가 되기 위해 평생 걸음의 간격을 흐트러트리지 않았다고도 한다 그러나 저이의 즐자엔 눈금조차 없었다고 한다.//

따뜻하고 유능한 측량사였다고도 전한다. 저이가 지나가면 나무뿌리는 제가 닿지 못하는 꽃망울까지의 거리를 알게 되고, 삭정이는 까맣게 잊었던 새순까지의 거리를 기억해 냈다고 한다. 저이는 너와 그가 닿지 못하는 거리를 재려 했다고 한다. 재면 잴수록 거리가 사라지는 이상한 측량을 했다고 한다. 나무 밑둥에서 우듬지까지, 꽃에서 열매까지 모두가 같아졌다고 한다. 새들이 앉았던 나뭇가지의 온기를 이파리 떨어진 상처의 진물을 온 나무가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저이의 줄자엔 눈금조차 없었다고 한다.//

저이가 재고 간 것은 제가 이륙할 열 뼘 생애였는지도 모른다고 한다. 늘그막엔 몇 개의 눈금이 주름처럼 생겨났다고도 한다. 저이의 꿈은 고단한 측량이 끝나고 잠시 땅의 감옥에 들었다가, 화려한 별박이자나방으로 날아오르는 것이었다고 한다. 별과 별 사이를 재고 또 재어 거리를 지울 것이었다고 전한다.//

키요롯 키요롯-느닷없이 날아온 노랑지빠귀가 저 측량사를 꿀꺽 삼켰다 한다. 저이는 이제 지빠귀의 온몸을 감도는 핏줄을 잴 것이라 한다. 다 재고 나면 지빠귀의 목울대를 박차고 나가 산에 가 닿는 메아리를 잴 것이라 한다. 아득한 절벽까지 지빠귀의 체온을 전할 것이라 한다.//

 

늦가을 / 반칠환

서리 맞은 박꽃이 하루를 더 피어 있다/ 날개가 해진 잠자리가 하루를 더 날고 있다/ 알을 슬고 자궁이 텅 빈 사마귀가/ 한나절을 더 풀잎에 머물고 있다/ 구십 년 늙은 노인이 하루를 더 늙고 있다//

 

웃음의 힘 / 반철환

넝쿨장미가 담을 넘고 있다/ 현행범이다/ 활짝 웃는다/ 아무도 잡을 생각 않고 따라 웃는다/ 왜 꽃의 월담은 죄가 아닌가?//

 

/ 반칠환

이렇게 속없는 놈도 사는 구나/ , , / 깍뚝 썰기를 해도/ 날 상하게 할 뼈가 없다/ , , / 채썰기를 해도/ 손 물들일 피 한 점 없다/ 칼로 무 베다 보면 속 부끄럽다// 이렇게 속 깊은 놈이 사는구나/ 난도질하고 남은 목/ 던져놓으면 수채 속일망정/ 파랗게 웃으며 되살아난다// 숙취를 지우는 무국을 뜨며/ 속없이 속 깊은 법을 생각 한다//

 

수평선 / 반칠환

멸치 한 마리 솟구쳤을 뿐인데/ 일순 수평선은 수평을 놓친다// 수평선은 언제나 수평이 없는 채로 수평이다//

 

사는 이유 / 반칠환

꽃조차 안 피우면 무엇하리/ 모두 떠나고/ 혼자 남은 이 비탈에// 어느 가을날/ 낯선 바람 찾아와/ 문득 데려갈 이 어깨// 낭떠러지 바위 틈에/ 꽃조차 안 피우면 무엇하리//

 

시치미 / 반칠환

저 해맑은 거짓말 좀 보게나// 치악산 능선마다/ 새똥, 곰똥, 달팽이 오줌/ 다 씻어내린 계곡물이/ 맑다//

 

젓국 가게 / 반칠환

굴젓,/ 갈치젓,/ 명란젓,/ 오징어젓/ 비린내 가득한 그 옆에 쭈그려/ 상한 내 마음 한 종지/ 헐값에 팔고 싶네//

 

2 / 반칠환

어떤 건달 하나/ 일출봉에 올라 월출을 보고/ 월출봉에 올라 일출을 보더니/ '세속의 命名 믿을 거 하나 없다'/ 장히 탄식하더라/ 제 낮밤 바뀐 줄도 모르고//

 

노랑제비꽃 / 반칠환

노랑제비꽃 하나가 피기 위해/ 숲이 통째로 필요하다/ 우주가 통째로 필요하다/ 지구는 통째로 노랑제비꽃 화분이다//

 

가정방문 / 반칠환

이 일을 어쩌믄 좋아, 저기 저기 감낭구 아래 담임 선생님 가정 방문 오시네. 오늘 낼 넘기믄 안 오실 줄 알았지. 뒤란에 숨으까 산으로 가까, 콩밭에 숨으까 수수밭에 숨으까. 마음은 동서남북 사방팔방 첫서리하다 들킨 것처럼 뿔뿔이 달아나는데 몸은 왜 이리 고구마자루 같으까, 옴쭉달싹 못 하고 가슴은 벌렁벌렁, 선생님 벌써 사립문 없는 삽짝에 들어서시네... 선생님 오셨어유? 치란아, 어머니 어디 가셨냐, 밭에 가셨나 봐유. 지가 불러올게 잠깐 기다리세유... 엄마, 엄마, 선생님 오셨어. 열무밭 매던 엄마, 허겁지겁 달려 나오시는데, 펭소에 들어오지 않던 우리 엄마 입성이 왜 저리 선연할까. 치마 저고리 그만두고, 나무꾼이 감춘 선녀옷 그만두고, 감물 든 큰성 난닝구에, 고무줄 헐건 몸뻬바지 넥타이허리띠로 동여매고, 동방위 받는 시째 성 깜장색 훈련화 고쳐 신고 달려나오시는데, 조자룡이 헌창 쓰듯 흙 묻은 손에 호멩이는 왜 들고 나오시나.//

양푼에 조선오이 삐져놓고, 찬물 한 대접 곁들여놓고, 엄마 옆에 붙어 앉았지만 선생님 말씀 듣기지 않고, 기름때 묻은 사기등잔이, 구멍 난 창호지가, 흙 쏟아지는 베름짝이, 쥐오줌에 쳐진 안방 천장이, 잡풀 돋는 헛간 지붕이 용용 죽겠지 눈 꿈쩍이며 선상님 나 여깄수 소릴 치네. 주고개 이정골 통틀어 제일 외딴집, 전기도 안 들어오는 산지기 집에 담임 선생님 오신 날, 나 이날 잊을 수 없었네. 잊을 수 없어서 선생님 오신 다음 다음날 일요일 날, 나 뒷산에 올라 대낭구 장대로 참낭구 시퍼런 누에고치를 두들겨 털었다네. 이놈 따다가 우리 엄마 참낭구 새순처럼 은은히 푸른 비단 치마 저고리 해드려야지. 털고 또 털어 대소쿠리 그득 고치 찼지만, 그러나 엄마는 그 고치 내다 팔았고, 나 울면서 그 돈 타다 공책 샀다네.//

 

 

 

반칠환 시인

1963년 충북 청주출생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1992년 <동아 일보>신춘문예 당선

1999년 대산문화재단 시부문 창작지원 수혜

2002년 서라벌 문학상 수상

2001년 시집 <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랑> 시와시학사

2003년 시선집 <누나야> 시와시학사

2004 년 <내게 가장 가까운 신, 당신 > 시와시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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