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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싸움의 기술 / 배혜숙

부흐고비 2020. 1. 21. 20:45

싸움의 기술 / 배혜숙


이중섭의 그림 <투계>앞에 서 본다.

작은 화면이 점점 크게 확대되어 보인다. 두 마리의 싸움닭이 사선구도로 배치되어 있어 마음을 확 끌어당긴다. 붉은 벼슬을 바짝 세우고 온 몸에 적의를 드러낸 투계 두 마리가 평면구도라면 얼마나 밋밋한가. 날개를 활짝 펼치고 높이 뛰어오르는 놈과 어떤 경우에도 이길 각오가 되어 있는 또 한 놈이 비스듬한 구도에서 더 팽팽한 긴장감을 준다.

붓을 사용하지 않고 나이프로 처리한 스크래치 형식은 격렬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림을 오래 들여다본다. 밑바닥으로부터 갑자기 뭔가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눈에 점점 오르더니 충혈된다. 머리카락도 쭈뼛 서는 느낌이다. 그러면서 온 몸에 진저리가 쳐진다. 싸움에 대한 원초적 본능이 지나치게 빨리 반응을 보인다.

축제가 한창인 시골 장터의 투계장을 빙 둘러 에워싼 사람들은 한껏 고조되어 환호와 탄식을 연발했다. 마치 자신이 싸우는 것처럼 나 또한 다르지 않았다. 싸움닭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순식간에 땅을 차고 오르자 나도 모르게 발바닥이 아프도록 땅을 차 버렸다. 상대방을 향해 발톱을 세워 쉬지 않고 공격을 해대느라 온몸이 열에 들떴다. 그즈음 매일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할퀴고 싶어 안달을 했었다. 이중섭의 <투계>를 보고 있으니 속내를 감추지 못한 그날처럼 날개 죽지가 근지럽다. 흠칫 놀라 그림 앞에서 슬며시 물러나 전시장의 반대편을 향한다.

태생이 그랬다. 작은 것에도 두려움이 앞섰다. 세상사는 일에 뒷걸음질만 치는 데면데면한 나를 친구는 답답해 했다. 직설적인 말도 곧잘 하던 친구 덕분에 내 약점은 여지없이 밝은 햇빛 아래 너덜너덜 드러나곤 했다. 남의 동정심이나 자극하는 태도에 짜증이 났던지 어느 날, 시내와 좀 떨어진 자기 집으로 나를 데려갔다.

친구 집은 농사도 짓고 가축도 길렀는데 싸움닭도 여러 마리 있었다. 일본종인데 ‘샤모’라고 힘주어 말했다. 미끈하고 늘씬한 다리, 곧게 뻗은 목, 넓고 긴 꼬리는 탄탄했다. 군살하나 없는 꼿꼿한 몸매를 보는 순간 약간의 흥분이 일었다. 혹 수탉 앞에 서도 내가 주눅이 들까봐 잔뜩 긴장하던 친구가 웃음을 띠며 말했다. 싸움닭이 되어 보라고. 고등학교 1학년 봄이었다.

그해 가을, 싸움닭이 되어 승자가 된 사건이 일어났다. 모두가 수재라고 인정하는 부잣집 외동딸인 k는 항상 목을 꼿꼿하게 세우고 다녔다. 무엇하나 빠질 것이 없는데 미모도 빼어나 우리 반 아이들을 심히 불편하게 했다. 안하무인격인 그녀를 슬슬 피해 다녔는데 학교 도서관에서 자주 마주쳤다. 내가 읽는 책 표지를 휙 넘겨보고는 꼭 한 한마디 했다.

“그거 중학교 수준 아냐? 나는 벌써 읽었는데, 좀 늦지 않니?”

봄부터 나에게 트집거리를 잡던 그녀와 정면 승부가 벌어졌다. 가을 소풍에서 닭싸움을 하게 되었는데 제 맘대로 나를 상대로 골랐다. 키도 비슷했고 덩치도 거의 같지만 누렇게 뜬 얼굴로 구석 자리나 찾아다니는 내가 만만하게 보였던 것이다. 그래도 모래판에서 벌이는 정정당당한 싸움인데 질 수는 없었다. 아, 그런데 그 애의 오뚝한 콧날이 햇빛에 반짝 빛나는 것을 본 순간 다리에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그때, 누군가 ‘샤모’ 하고 외쳤다. 싸움닭이 되어 보라고 내 본능을 자극했던 친구였다. 외다리로 서는 거라면 얼마든지 자신이 있었다. 남보다 긴 목을 쭉 빼고 눈에다 힘을 주고 다가갔다. 순간 ‘샤모’가 되어 날개를 활짝 펴고 잽싸게 날아올랐다. 그녀를 쪼고 활퀴는 사나운 수탉이 되어 가볍게 승리를 했다.

내 안에 도사리고 있던 응어리를 토해 낸 그 가을 이후, 괜히 어설픈 싸움닭 흉내를 냈다. 어깨에 빵빵하게 바람을 넣고 도서관을 휘젓던 그녀에게 얼토당토않게 도전 의식을 느껴 책상 앞을 떠나지 않았다. 아니 진중함을 잃은 나는 그녀뿐만 아니라 누군가를 뒤에서 끊임없이 노려보곤 했다. 열여섯 그때도 그랬지만 어른이 된 후에도 진정한 싸움의 기술을 몰라 냉혹한 투쟁의 세계에서 지금껏 하수로 살고 있다.

허방을 짚고 사는 사람은 의외로 많았다. 결혼하고 처음 살림을 차린 동네어귀에 작은 슈퍼가 있었다. 뽀얀 얼굴에 입술을 새빨갛게 칠한 가겟집 주인 여자를 모두 ‘싸움닭’이라고 물렀다. 혼자서 어린 남매를 키우는 젊은 여자였다. 동네 아이들은 군것질거리를 사러 들락거렸고 남자들은 담배와 술을 샀다.

가끔 해질녘이면 동네 여자들과 싸움이 붙었다. 그녀는 팔을 걷어붙이고 육두문자로 한바탕 골목이 떠나가도록 악다구니를 썼다. 하나둘 사람들이 모여들면 기세가 더 등등해졌다. 동네 여자들은 웃음이 헤픈 여자를 경계의 대상으로 삼았다. 여자에게 남편이 있다면 아무도 그녀와 싸우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항상 연민이 앞섰다. 알고 보면 부족함을 감추려고 바짝 벼슬을 세우는데 사람들은 그걸 참지 못했다. 우리가 세든 주인집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그 가게에 자주 드나든다고 나를 힐책했다. 담배를 꼭 그곳에서 사야 하느냐고 자기 남편에게 따지기도 했다.

날이 갈수록 여자의 입술은 더 붉어졌고 싸우는 횟수도 잦아졌다. 그러더니 어느 날 홀연히 떠나고 말았다. 골목 안은 조용해졌는데 괜히 서글펐다. 알고 보면 우리가 딛고 사는 이 세상이야말로 싸움판이다. 그녀도 나처럼 보이지 않는 것들을 향해 잔뜩 적대감을 품고 있었으니 어떻게 자신을 이길 수 있었으랴. 싸움판에도 기술이 필요하다는 걸 알지 못했던 것이다.

전시장을 이리저리 기웃거리다 이중섭의 <투계> 앞에 다시 돌아와 선다. 비극적이고 절망적인 삶 속에서 그려진 그림은 극도의 긴장감을 보여준다. 암울한 현실 속에서 정신적 불안을 숨기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저만치 이중섭이 보인다. 어쩌면 그는 장자가 말한 목계지덕(木鷄之德)을 표현하려고 애쓴 것이 아닐까. 자신의 좌절된 삶을 완전히 숨기고 부드러움 속에 빛나는 광채를 보여주려 했는지 모른다.

영화 속에서 언제나 화려한 영웅이었던 또 다른 남자를 그림 속에서 만난다. 얼마 전에 이소룡의 어록을 모은 <나를 이기는 싸움의 기술>이란 책을 읽었다. 철학을 공부한 그 남자의 모든 글귀는 삶의 방식에 대해 치열한 사유를 보여주었다. 그가 떠난 지 37년이 지났는데도 살아있던 그때처럼 다가왔다. ‘나 스스로를 이긴 자가 초강자다!’ 이 글귀를 읽는 순간 이소룡이 장자가 말한, 부드러움이 저절로 익어 강함을 물리친 목계지덕을 갖춘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목계’란 나무로 만든 닭이란 뜻이다. 목계처럼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여 상대방에게 완전한 모습을 보여 줄 때 최고의 투계가 된다고 했다. 이중섭은 최고의 투계를 그리기 위해 오래도록 마음속에 수십 마리의 목계를 새겼을 것이다.

겸손한 척, 부드러운 척, 여유로운 척 남의 눈을 속이고 늘 공격적인 자세로 살아온 것이 부끄럽다. 스스로 상처를 내 피를 철철 흘리던 붉은 입술이 여자도 내 곁에 세운다. 두 마리의 싸움닭은 우리를 완전히 무장해제 시킨다.

이중섭의 그림 앞에서 싸움의 기술을 배운다. ‘싸우지 않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고 싸움의 고수인 영웅도 말한다. 그러나 투계 한 마리를 키우기로 했다. 마음의 울타리를 치고서, 그건 목계가 절대 될 수 없는 나 자신이 무력감에 빠질까 두려워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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