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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침향(沈香) / 정목일

부흐고비 2020. 1. 28. 16:39

침향(沈香) / 정목일1


‘침향(沈香)’ 이란 말을 처음 듣게 된 것은 어느 날의 차회(茶會)였다.

뜻이 통하는 몇몇 사람들이 함께 모여 우리나라의 전통차인 녹차(綠茶)를 들면서 대화를 나누는 모임이 한 달에 한 번씩 있었다. 차인(茶人) ㅅ선생이 주재하시는 차회(茶會)에 가보니 실내엔 전등 대신 몇 군데 촛불을 켜놓았고 여러 가지 다기(茶器)들이 진열돼 있었다.

ㅅ선생은 끓인 차를 찻잔에 따르기 전 문갑 속에서 창호지로 싼 나무토막 한 개를 소중스러이 꺼내 놓으셨다. 그것은 약간 거무튀튀한 빛깔 속으로 반지르르 윤기를 띠고 있었다. 마치 관솔가지처럼 보이는 이 나무토막을 ㅅ선생은 양손으로 감싸 쥐고 비비시며 말씀해 주셨다.

“이게 침향(沈香)이라는 거요.”

나를 포함한 차회 회원들은 그 나무토막을 코로 가져가 향기를 맡아 보았다. 향나무보다 더 깊은 향기가 마음속까지 배여 왔다.

“옛 차인들이 끓인 차를 손님에게 권할 때 손에 배인 땀 냄새를 없애기 위한 방법으로, 이 침향으로 손을 비벼 향긋한 향기를 찻잔에 적신 다음, 권해 드리는 것이라오.”

나는 이날, ㅅ선생으로부터 처음으로 ‘침향’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침향은 땅 속에 파묻힌 나무가 오랜 세월동안 썩지 않고 있다가, 홍수로 인해 땅 위로 솟구치게 된 나무라고 한다. 감나무나 참나무가 1천년 동안 땅 속에 썩지 않은 채로 파묻혀 있다가 땅 위로 솟아오른 것이어서, 그 나무엔 1천년의 심오한 향기가 배어난다는 것이다. 나무가 땅 속에 묻혀서 1천년 동안 썩지 않은 것은, 땅 속이 물기가 많은 곳이었거나, 나무가 미라가 된 상태일 것이라고 했다. 이 침향은 땅 속에서 오랜 세월이 지날수록 향기를 간직하게 된다고 한다.

침향을 들고서 1천년의 향기를 맡아 보았다. 땅 속에 파묻힌 1천년의 향기가 가슴속으로 흘러들었다. 이 침향이야말로, 썩지 않는 나무의 사리(舍利)이거나 나무의 영혼일 것만 같았다. 침향에 1천년 침묵의 향내가 묻어났다. 방안의 촛불들이 잠시 파르르 감격에 떠는 듯 했다. 차를 들면서 1천년의 시-공(時-空)이 내 이마와 맞닿는 듯한 느낌이었다. 1천년의 그림자가 찻잔에 잠겨 있었다.

지난 1988년 4월, 경남 창원시 다호리 고분에서 삼한(三韓)시대의 유물이 출토된 일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대형 통나무 목관(木棺)과 붓이 들어 있었다. 2천년전의 통나무 목관이 거의 원형의 모습으로 나온 것을 보고 감격과 신비감에 사로 잡혔다. 낙동강 유역의 다호리 고분에서 나온 통나무 목관과 붓은 물에 잠긴 진흙 속에 파묻혀 있었기 때문에 썩지 않고 보존될 수가 있었다. 이로써 나무가 땅 속에 파묻혀 2천년 이상 썩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다.

촛불 아래서 침향에 젖은 차를 마셔 보았다. 1천년의 말들을 생각해 보았다. 썩지 않는 나무의 영혼과 말들을 생각해 보았다. 참으로 고요하고 담백하기만 한 차의 맛처럼 1천년이 지나가 버린 것일까. 손바닥만 한 나무토막, 모르는 사람이면 눈길조차 주지 않을 보잘 배 없는 것이 1천년 세월을 향기로 품고 있다니, 다시금 손으로 어루만져 보곤 하였다.

나는 가끔 침향을 생각하며 그 향기를 꿈꾼다. 과연 무엇이 1천년 동안 썩지 않고 향기로울 수 있을까. 세월이 지날수록 퇴색되지 않고 더욱 향기로울 수 있단 말인가. 침향이야말로, 영원의 향기가 아닐까.

땅 속에 파묻혀 아무도 모르게 버려졌던 나무토막이 1천년의 향기를 전해주고 있다니, 참으로 신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 하면 나의 삶도 한 1백년의 향기쯤 간직할 수 있을까. 땅 속에 파묻힌 듯 침묵으로 다스린 인내와 인격 속이라야만 향기가 밸 수 있으리라. 어쩌면 땅 속에 묻혀 썩을 것이 다 썩고 난 다음, 썩을 것이 없을 때, 비로소 영혼에 향기가 나리라.

나는 꿈속에서도 가끔 침향을 맡으며 삶 속에 그 향기를 흘려보내고 싶어 한다. 침향을 보배이듯 간직하고 계신 ㅅ선생님이 부럽기만 하다.

한 달에 한 번씩 열리는 차회에 은근히 침향으로 인해 마음이 당겨 참석하곤 한다. 창호지를 벗기고 침향을 만지면, 마음이 황홀해진다. 내 마음을 촛불이 알아 펄럭거리고, 어디선가 달빛 젖은 대금산조 소리가 들려올 듯싶다. 침향이 스민 차 한 잔을 들면, 1천년의 세월도 한순간일 것만 같다. 차향(茶香)에 침향(沈香)을 보태면, 찰나와 1천년이 이마를 맞대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리운 이여, 조용히 차 끓는 소리. 촛불은 바람도 없이 떠는데, 침향으로 손을 비비고서 마주 보고 한 잔 들어보세. 1천년 침묵의 향기, 세월의 향기가 어떤가.

촛불 아래 차 끓이는 소리-. 침향으로 손 비비는 소리. 코끝에 스미는 차향과 1천년 침향의 향기…….

  1. 정목일: 수필가, 1945년 경남 진주 출생. 1975년 월간문학 수필 당선. 1976년 현대문학 수필 천료. 경남문인협회장 역임. 한국문인협회 수필분과 회장. 창신대 문예창작과 겸임교수. 경남문학관장. 계간 선수필 발행인. 저서: 『남강부근의 겨울나무』(백미사),『한국의 영혼』(부름사),『별이 되어 풀꽃이 되어』(문학세계사),『만나면서 떠나면서』(현대문학사).『모래알 이야기』(자유문학사).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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