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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산(山) 사람 / 반숙자

부흐고비 2020. 2. 6. 21:37

산(山) 사람 / 반숙자1


산(山)사람은 노상 사람 그리는 병을 앓는다. 또박또박 잊지 않고 찾아오는 계절의 변화 속에 유독 겨울을 타는 것은 이 병이 더 기승을 부리기 때문이다.

마을에서도 행길에서도 동떨어진 산기슭에 그림처럼 오두마니 한 채 서 있는 집이다. 봄부터 가을 까지는 철 따라 피고 지는 꽃이 있고 흙을 파고 씨를 넣어 살뜰히 기르는 재미도 있다. 고추밭 이랑에서 만나는 이웃과 소풍 삼아 찾아오는 친구도 있다. 그러나 11월이 깊어지고 사과나무가 옷을 다 벗을 때쯤이면 모두 서둘러서 자기네 집으로 돌아간다.

눈을 두는 곳 마다 빈곳이다. 산꼭대기서부터 쓸어내리는 찬 겨울바람은 냉랭한 빈손이고 이따금씩 비쳐 오는 햇빛도 잠깐이다. 오는 이도 가는 이도 없는 산속은 밤이 빨리 찾아온다.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기가 무섭게 서둘러 창문을 닫아걸고 불을 밝히면 무한의 시공 속에 나는 단 한 점으로 부웅 떠 있는 진공 상태가 된다. 누가 말했던가.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고즈넉한 밤, 산사람은 편지를 쓴다. 어떤 편지는 바람에 날려 보내기도 하고 어떤 봉투는 소인도 없이 책상머리에 뒹굴기도 한다. 그러나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서 날마다 편지를 쓴다. 어떤 날은 게걸스레 책 속에 파묻히기도 하고 눈이 침침해 지면 방바닥에 엎드려 모차르트와 지내기도 한다. 겨울은 춥고 길다. 한길이나 쌓인 눈 속을 푹푹 빠져가며 과수원을 돌아보며, 그 속에 겨울나무가 되어 묵묵히 서 있기도 한다. 사람이 그리운 것이다.

어제 낮, 앞머리가 희끗희끗한 갱엿장수 아주머니가 찾아왔다. 수상하게 여겼던지 개가 치마꼬리를 물어대며 그악스레 짖었다. 돌아가신 친정어머니가 살아오신 듯 반갑게 맞아들이고 따끈한 차를 드렸다. 남도에서 왔다는 아주머니는 시장기가 든 푸르죽죽한 얼굴로 차 한 잔을 맛있게 드셨다. 나는 담북장을 끓이고 진지상을 보아 늦은 점심을 대접하면서 연신 신바람이 났다. 숭늉을 떠다 드리니까 아주머니는 “고맙소 잉, 참으로 고맙소 잉!” 하며 내 손을 잡았다.

눈길로 그분을 배웅하고 돌아서면서 나는 내 병이 깊어 있음에 새삼 놀랐다. 인적 없는 대낮 눈 위 바람이 차다. 집안에서만 뱅뱅 돌다 그도 무료해 지면 나는 쌀 한 큼을 퍼들고 밭으로 나선다. 잠깐 비쳤다 넘어가는 대낮 햇살이 뒤뜰에 찾아 올 때쯤 산에서 산토끼나 꿩들이 모이를 찾아 과수원으로 내려오기 때문이다.

모이를 눈 위에 뿌려 놓고 사과나무 뒤에 슬쩍 숨어서 보면 푸득하고 내려앉는 장끼 네는 꼭 한 쌍이다. 꼬리가 길고 몸매가 날렵하고 알록달록 색깔이 고운 것이 장끼다. 이놈 들은 눈밭에서 한바탕 멋지게 왈츠를 춘다. 백설 위에서 벌이는 맨발의 즉흥 발레는 요한스트라우스의 ‘다뉴브강의 물결’을 연상케 한다. 투스텝으로 원을 그리다 모이를 쪼고 둘이 스텝을 맞춰 저만치 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모이를 쪼고... 아름답다. 움직인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 생명이 있는 것은 아름다운 것. 산사람은 넋을 잃고 바라보다 홰를 쳐 본다. 나도 살아있는 목숨임을 확인하기 위하여.

산토끼는 겁이 많다. 우리 집에 내려오는 토끼는 거무스레한 갈색 털을 보송보송 휘감고 눈은 언제나 불면증에 걸린 사람처럼 발그레하다. 이놈은 생명을 걸고 전쟁터로 뛰어드는 그런 모습이 아니고 훔쳐 먹으러 광에 드나드는 쥐 같은 모습이다. 쌀알 몇 알 먹고 오물오물 사방을 살피고 깡총깡총 뛰어다니다 또 한 번 먹고...귀엽다. 냉큼 보듬고 입맞추고 싶다. 그러나 기척이 났다 하면 뒷산으로 줄행랑을 치기 때문에 몸살을 끙끙 앓으면서도 지켜보고 만 있어야 한다.

이렇게 달콤한 밀월의 시간을 훼방 놓는 놈은 다름 아닌 우리 집 개 바우다. 하루에도 몇 번씩 동네에 마실가서 싸다니다 오는 이놈은 예민한 청각과 취각을 동원해서 풍비박산을 만든다. 그러고는 꼬리를 저으며 내 품으로 파고든다. 히앙히앙 웃는 소리를 내면서 제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 없노라는 듯 혀로 내 볼을 핥고 오줌까지 찔끔찔끔 지리면서 아양을 떤다.

하루 한 번씩 눈길을 헤치고 찾아오는 우체부의 발길을 위해 나는 설레이는 가슴으로 차를 끓인다. 잠시나마 차 한 잔으로 맞이하는 기쁨과 녹이는 추위는 차 한 모금에 정(情) 한 모금이 스며들어 축복의 시간이 된다. 편지가 오는 날이면 나는 감격한다. 그래서 겨울에 오는 편지는 더욱 반갑다. 이 반가움을 위해서 산사람은 차 끓이기를 좋아 한다.

‘동무생각’ 한 곡을 피아노로 두드리다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침묵했던 과수원에 연옥색 물기가 도는 듯하다. 겨우내 깊어 간 내 지병을 치료 받기 위해 흙냄새가 구수한 시골에 사과 꽃구경 오시라는 초대장을 이 봄엘랑은 수십 장 쓰리라.

봄 아가씨, 어서 오십시오.

  1. 반숙자: 1939년 충북 음성 출생. 청주사범학교 졸업, 청주대 행정대학원 수료. 『한국수필』천료(81),『현대문학』천료(86), 한국문인협회, 국제펜클럽, 수필문우회, 가톨릭문우회 회원, 음성문인협회 초대회장 역임, 음성예총회장 역임, 음성예총 창작교실 강사. 수필집:『몸으로 우는 사과나무』 『가슴으로 오는 소리』 『천년숲』등. 수상: 현대수필문학상(1991), 한국자유문학상(1992), 충북문학상(1998) 충북 도민대상 문학부문(1999), 제1회 자랑스러운 음성인상(2002) 제1회 월간문학 동리상(2003), 동포문학상(2004) 충북현대예술상(2009) 대한문학상 대상(2009), 산귀래문학상 본상(201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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