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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눈 속의 매화 / 정선모

부흐고비 2020. 2. 11. 11:31

눈 속의 매화 / 정선모



입춘이 오기 전, 평소 존경하던 시인에게서 탐매 모임에 초대를 받았다. 아직 겨울을 벗어나지 않은 추운 날씨라 매화가 피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해마다 탐매 모임을 주선하는 분의 초청이라 흔쾌히 응하였다.

가평의 깊은 산 밑에 있는 산장에 들어서니 사방에서 매화를 보러 몰려든 예술가 30여 명이 작은 찻집에 빼곡히 들어찼다. 찻집 테이블에 놓여있는 매화 분재에 백매()가 만개했다. 매화를 본 사람들은 모두 탄성을 지른다. 코끝에 스치는 매화향이 참으로 그윽하다.

그날 모임의 주제가 탐매이니 매화시가 빠질쏘냐. 시인들은 자신이 지은 매화시를 낭송하고, 대금 연주자는 유장하게 대금을 연주한다. 분위기를 돋우려는 듯 때맞춰 눈발이 휘날린다. 아! 설중매다. 눈 속에서 매화 구경이라니…. 대금소리에 맞춰 난분분 휘날리는 눈발이 마치 매화꽃잎 같다. 이러한 정취는 난생 처음이다.

눈이 가득 내리는 고요한 산장을 은은한 매화향이 넉넉히 감싸고, 사람 발길 뜸한 깊은 산자락 곳곳에 숨어있는 산의 내밀한 이야기를 들려주듯, 휘돌아드는 대금소리는 내 가슴 저 밑바닥을 훑는다, 한참을 듣고 있노라니 나도 모르게 마음이 저릿해져 온다. 정말 좋구나! 신선이 따로 없다.

말 한마디 없어도 모두들 그 풍경 속에 절로 녹아든다. 오래 전부터 그곳에 있었던 듯 나도 저 겨울나무처럼 한 그루 나무가 된다. 흐벅지게 내리는 눈을 맞고도 추운 줄 모르고, 두 팔 벌려 한껏 눈을 안는 저 겨울나무는 머지않아 딱딱한 수피를 뚫고 여릿한 새순을 밀어 올리리라. 봄으로 가는 길목에서 만나는 서설이다. 저 눈은 마른 대지를 적시고, 겨우내 목말랐던 겨울나무가 마음껏 물을 끌어올리도록 아낌없이 자신을 내어줄 것이다. 그렇게 내어주어 결국은 매화처럼 화사한 꽃을 피워낼 것이다. 자연의 법칙은 그냥 얻는 것이 없다는 걸 새삼 일깨워준다.

이곳에는 매화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목사님이 온실 속에 수많은 매화를 가꾸고 있다. 겨우내 얼어 죽지 않도록 온도를 맞추고, 물을 주며 돌보는 정성이 가득한 곳이다. 올해 들어 매화를 사랑하는 첫 손님을 맞는 날, 저마다 가장 어여쁜 모습으로 피어났다. 청매, 백매, 홍매 등 각종 매화 분재가 온실 속에 가득하다. 사진작가는 이슬 맺힌 꽃잎을 놓칠세라 카메라 렌즈를 들이대고, 나는 감탄사 한마디도 아까워 지긋이 눈을 감고 각기 매화가 뿜어내는 향기를 음미한다.

작은 분재이지만 줄기의 용트림이 예사롭지 않다. 저 작은 화분 속에서 일생을 보내며, 자신만의 세계를 가꾸어 온 매화의 굵은 둥치를 쓸어본다. 강한 의지가 손끝에 전해진다. 마음껏 가지를 뻗으며 자란 나무나 태어날 때부터 인간의 손길 속에서 다듬어진 나무나 다 나름대로 생의 목적이 있을 것이다. 크다고 성공했고, 작다고 실패한 건 아닐 것이다. 주어진 운명 속에서 나름대로 일생을 버텨온 저 매화는 지금 가장 아름다운 시기를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꽃 한 송이 피우기 위해 수만 번의 움직임이 저 작은 나무뿌리에서 일어났으리라. 보이지 않는다고 그 뿌리의 수고를 모른다 할 수 있겠는가. 이 여린 꽃 한 송이를 피우기 위한 모든 수고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백매와 홍매 꽃송이를 하나씩 넣고 차를 우린다. 한 모금 마시니 매화의 향기가 온몸으로 스며든다. 속진이 천천히 벗겨져나가는 느낌이다. 움츠리고 있던 겨울 동안, 내 안에 얼마나 많은 때가 쌓여있었던 걸까. 요 작은 꽃잎에서 우러나오는 향기가 견고하게 다져진 세속의 때를 한 겹씩 벗겨내는 동안, 주위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듯, 곁에 있어도 보이지 않는다. 오롯이 내 안으로 침잠해 들어간다. 차 한 잔이 가져다주는 명상의 힘이 놀랍기만 하다.

매화 향에 가득 취하여 돌아오는 길, 좀 전에 들었던 시 한 편이 계속 따라온다.

오늘 본 매화는 그냥 꽃이 아니었다.

“꽃은 같이 있을 때 아름답다// 그해 섣달/ 아버진 고창 장에서 누나 고무신을 사왔다/ 예쁜 매화 그려진 고무신을 신은 누나/ 너무나 예뻐 마당도 뜰도 매화가 가득했다/ 함박눈 푹푹 온 동네 쌓이는 날/ 눈꽃으로 설중매 피어/ 얼음판 미끄러지는 썰매 위에 홍매가 가득/ 섣달 얘기를 한다/ 설이 지나 서투른 봄/ 놀란 꽃과 누나를 보고 싶은 나는/ 누나를 놀리려 예쁜 고무신을 뒤란 헛광에 감추고/ 그날부터 누나와 난 홍역을 앓기 시작 /몇날 며칠 죽음의 강을 오 간다/ 죽음이 속삭이는 먼 강을 돌고 돌아/ 나는 돌아오고/ 누나는 죽음을 따라 이승의 강을 건너간다// 정월보름 지난 봄날 뒤란에 홍매 혼자 피어/ 겨울을 건너온 바람이 / 왜 혼자만 서 있느냐 묻는다// 꽃은 같이 피었을 때 아름답다.

- 박남권의 시 ‘생명의 강, 꽃들의 바람’ -홍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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