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수필 읽기

소리로 빚은 청자 / 정선모

부흐고비 2020. 2. 11. 11:32

소리로 빚은 청자 / 정선모



가을을 보내려면 아무래도 창덕궁이 제격입니다. 자연 그대로의 형세를 고스란히 살려 지은 창덕궁의 가을은 도심에서 가을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입니다. 언제부턴가 가을의 끝자락은 늘 이곳에서 맞았습니다. 왼쪽으로 대조전을, 오른쪽엔 창경궁을 두고 약간 경사지게 휘어진 숲길을 따라가면 후원이 나타납니다. 부용지芙蓉池에 떨어진 단풍과 물에 어리는 주합루가 그려내는 풍광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늦가을, 올해도 어김없이 정다운 이들과 찾은 창덕궁에선 뜻하지 않게 궁중음악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운이 좋게도 창덕궁 창건 600주년을 기념하여 열린 음악회를 접하게 된 것입니다. 고전무용과 더불어 대금연주, 여창가곡의 공연을 창덕궁 인정전 앞에서 감상하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에 뜻밖의 선물에 가슴 떨리는 기분으로 감상하였습니다.

궁궐의 야외무대에서 보는 공연은 일반 무대와는 또 다른 감흥이 일었습니다. 기와지붕 아래에서 무희들이 춤을 출 때마다 전통의상에 입힌 금박 무늬가 햇살에 반짝여 마치 선계仙界인 듯 황홀하였습니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가을 하늘, 손가락으로 튕기면 탱! 하고 소리가 날 것만 같은 맑은 공기, 단풍이 무르익은 궁을 둘러싼 숲 그 모두가 오늘의 공연을 위한 장치처럼 여겨질 정도였습니다.

아름다운 춤사위도 혼을 빼놓기에 충분하였지만 정작 제 마음을 흔들어놓은 건 다름 아닌 여창가곡女唱歌曲이었습니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즐겨 불렀던 가곡은 시조시時調詩에 가락을 얹어 부르는 것으로 호방하고 시원한 남성의 목을 위한 남창가곡男唱歌曲과 섬세하고 맑은 여성의 목을 위한 여창가곡女唱歌曲이 있습니다. 단정한 자세로 앉아 삼현육각三絃六角 반주에 맞춰 ‘바람에 지동치듯’이란 가곡을 부르는데 그 소리가 어찌나 청아하던지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피리에서 나는 것처럼 여겨질 정도였습니다. 한참 귀 기울여 듣고 있으려니 부르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새털처럼 가벼워져 점차 공기 속으로 사라지는 듯 하였습니다.

바람은 지동치듯 불고 궂인 비는 붓드시 온다
눈 정에 거룬 님을 오늘밤 서로 만나자 허고
판첩쳐서 맹서를 받았더니
이 풍우 중에 제 어이 오리
진실로 오기 곧 요량이면 연분이가 하노라

- 가곡 ‘바람은 지동치듯’ -


그리움과 기다림이 간절히 매인 노랫말을 보면 감상적이며 슬픈 느낌의 계면조界面調로 불러야 할 듯싶은데 장중하고 당당한 느낌을 주는 우조羽調로 불러 의아하게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구절의 연인에 대한 믿음을 보니 우조로 부른 까닭을 알겠습니다. 단단히 약속을 하였으니 아무리 비가 퍼부어도 임은 분명히 올 것이라고 믿고 있는 여인이 비탄에 잠길 리 없지요. 희망을 잃지 않는 노랫말을 음미하노라니 마치 구중궁궐에 살고 있는 궁녀들이 왕을 그리워하는 마음처럼 여겨집니다. 궁궐에서 듣는 이 가곡이 특별한 느낌을 주는 까닭이 여기에 기인한 듯합니다. 같은 노래도 장소에 따라 확연히 다른 느낌을 준다는 사실이 새삼스럽습니다.

한번 궁에 들어오면 죽어서야 나갈 수 있었던 궁녀들의 애환이 아직도 전각 곳곳에, 회랑이나 돌담 사이사이에 스며있을 것만 같은 창덕궁에서 한 여인이 확 트인 목소리로 노래를 부릅니다. 속이 텅 빈 대나무가 맑은 가락을 연주하듯 마음 속 온갖 상념 다 가라앉혀 토해내는 노래가 기와지붕을 넘어 회화나무 사이를 휘돌아 쪽빛 가을 하늘로 둥글게 둥글게 퍼져나갑니다. 연정을 품은 여인은 자신의 심정을 땅에 알리고 하늘에 고하며 마치 기도하듯 노래를 합니다. 낮은 소리를 낼 때는 땅을 가르고, 높은 소리를 낼 때는 하늘을 엽니다. 우주 한가운데로 그리운 임에게 가는 길을 냅니다. 연인의 마음속에 길을 낼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이 가득 담긴 노래뿐입니다.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지 않고 살아온 우리 조상들이 가꿔온 모든 예술이 그렇듯 가곡 역시 닫힌 공간에서 연주하는 것보다 야외에서 듣는 것이 훨씬 그 묘미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바람이 불면 바람에 가락을 싣고, 낙엽이 지면 낙엽에 마음을 얹어 절절하고 애틋한 사연을 풀어놓으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꿋꿋한 기상을 느끼게 해 주는 ‘바람에 지동치둣’이 몇날 며칠 귀에 맴돌고 가슴에 남아 시도 때도 없이 울려나옵니다.

시조나 민요에 비해 예술성이 높은 가곡은 소리로 빚은 청자입니다. 희로애락이 모두 응축된 청잣빛 소리, 깊이를 알 수 없는 신비한 청자의 그 오묘한 빛깔은 오랜 세월동안 수많은 아픔을 견뎌내고 얻어낸 결과일 것입니다. 노래를 하느라 목이 붓고 잠기기를 수없이 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음색을 찾아낸 창자唱者는 한 곡을 불러도 평생 살아온 세월을 담아 노래합니다. 때론 이슬처럼 맑게, 때론 우람하고 장중하게 그러면서도 손짓 한번 하지 않고 시종일관 단아한 자세로 노래를 부릅니다. 한 낱말을 길게 늘여 부르며 호흡 따라 음을 흔들고 때론 지르며 소리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것 같지만, 잘 들어보면 엄격히 절제되어 있는 가곡, 오랜 수련 끝에 얻은 심연에서 솟아나는 소리에 무심히 젖어들면 이별의 아픔을 노래하든 태평성대를 기원하든 마음에 낀 속진이 조금씩 벗겨지는 느낌이 들어 새털처럼 가벼워졌는지도 모릅니다.

궁중음악회가 끝나고 모처럼 개방된 옥류천으로 가는 길, 깊어가는 창덕궁 가을빛이 영롱합니다. 계곡물이 작은 폭포를 이루고 있는 이곳에 바위를 파서 샘을 만들고, 포석정처럼 둥글게 휘돌아 흐르게 하여 왕과 신하들이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지으며 곡수연曲水宴을 즐겼다는 풍류가 깃든 장소입니다. 그때 부른 노래가 바로 가곡이 아니었을까요? 곱게 물든 단풍잎이 술잔 대신 흐르고 있는 옥류천에 조금 전에 들었던 가곡이 따라와 같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수필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징검다리 / 고경숙  (0) 2020.02.13
숫눈길 / 정선모  (0) 2020.02.11
눈 속의 매화 / 정선모  (0) 2020.02.11
꽃 진 자리 / 정선모  (0) 2020.02.11
그날의 밤기차 / 정선모  (0) 2020.02.11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